#161
그때였다.
따르릉—
어느 자리에서인지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제조실에서 온 전화가 틀림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팀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강이빈이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윤태희가 주저 없이 수화기로 손을 뻗었다.
“내가 받을게요.”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째로 울릴 때 수화기를 들었다.
“네, 축역1팀 윤태희 수석입니다.”
전화를 당겨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 뭐라 말소리가 들렸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눈치를 살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일방적으로 다다다, 쏘아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윤태희는 이마를 매만지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네, 교육 중이었는데 실수로 메일이 전송된 것 같아요.”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윤태희가 무사히 통화를 종료했다.
“괜찮아요. 잘 몰라서 실수한 건데, 그럴 수 있어요. 큰 실수도 아니고.”
윤태희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벼운 해프닝일 뿐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강이빈의 자리에 모여 있던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재겸도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수석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윤태희는 탕비 테이블로 가서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
윤태희는 커피 믹스를 뜯어 머그잔에 털어 넣다가, 힐끔 재겸을 쳐다보았다. 재겸은 불퉁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풀죽은 듯한 기색이었다. 얼굴에는 묘하게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티스푼을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타던 윤태희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김이 폴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수석실로 들어가던 윤태희가 말했다.
“달리기 잘 하는 추격부 김 수습님.”
재겸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오세요.”
“…….”
재겸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수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윤태희는 어느새 의자에 재킷을 벗어서 걸어 두고 셔츠 단벌 차림이 되어 있었다. 쭈뼛거리며 데스크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설 때였다. 머그컵에 입술을 붙인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조용히 말했다.
“문 닫고.”
재겸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
팀원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저를 따로 불러서 혼내려고 한 모양이었다. 재겸은 일단 윤태희의 요구대로 문을 닫았다. 가뜩이나 남색가 윤태희가 껄끄러워 죽겠는데 사고까지 쳤으니 왠지 긴장이 되었다. 재겸은 불만이 역력한 낯으로 데스크 앞에 가서 섰다.
윤태희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재겸을 빤히 쳐다보던 윤태희는 근처에 굴러다니던 사탕을 집어 들었다. 낱개 포장된 비닐을 벗기던 윤태희가 물었다.
“줄까?”
“안 먹어.”
윤태희는 두 번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는 입안에 사탕을 굴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앞에 선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결국은 제 발 저린 재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잘 모르니까 실수하는 게 당연한 거야.”
재겸이 어느 한 곳을 노려보다가 까칠한 얼굴로 말했다. 당당한 자기변호에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뺨에 볼우물이 쏙 패였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직 안 한 거지, 어차피 한소리 하려고 부른 거잖어.”
“아닌데.”
“그럼 왜 불렀는데.”
별다른 대답 없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윤태희가 재겸에게 다가왔다. 뺨 한쪽에 사탕을 물고 있던 윤태희가 손을 뻗었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움찔할 때였다. 단정한 손이 비뚤어진 와이셔츠 칼라를 정돈해 주었다.
“넥타이 누가 매줬어?”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넥타이 타령이었다.
“내가 맸어.”
윤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매는 법 알아?”
“응.”
“누구한테 배웠어?”
“그냥 본 대로 대충 따라서 했어.”
“거짓말.”
정복을 입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지 한 달 동안 어깨너머로 여러 번 보다 보니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인지 윤태희는 못 믿겠다는 눈치여서, 재겸은 저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넌 속고만 살았냐? 진짜 내가 맨 거야.”
윤태희가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래요? 그럼 어디 내 것도 한 번 해봐요.”
윤태희는 잘 묶여 있던 넥타이를 굳이 풀어헤치면서 턱짓을 했다.
“…….”
뾰로통한 얼굴로 윤태희를 노려보던 재겸이 팔을 들어 올렸다. 얘는 꼭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한다. 제 것은 묶어봤으나 남의 넥타이를 매주는 건 처음이어서 헤맸다. 윤태희는 넥타이를 매는 데 열중한 재겸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재겸의 눈썹뼈에 입술이 쪽, 닿았다 떨어졌다. 그에 재겸은 화들짝 놀라서 목을 뒤로 확 움츠렸다.
불시에 날아든 입술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재겸이 제 눈썹뼈를 만지며 벌컥 화를 냈다.
“너무 오래 걸리길래… 혹시 일부러 그러나 해서.”
뭐? 재겸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윤태희의 말인즉슨, 지한테 입맞춤 받고 싶어서 일부러 느리게 매주고 있는 거 아니냐는 헛소리였다.
“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나, 나는 너처럼 남색가가 아니라고 말했잖어. 맨날 내 것만 묶다가 남한테 매주는 건 처음이라 헥, 헷갈려서 그랬어.”
“그래요? 아님 말고.”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로 까딱 눈짓을 했다.
“씨발 너 혼자만 아님 말고면 다냐?”
“네? 왜 갑자기 욕을….”
“네가 자꾸 욕 처먹을 짓을 하잖어.”
“알았으니까 빨리 묶기나 하세요.”
귀가 살짝 붉어진 재겸은 씩씩거리며 넥타이를 마저 묶어주었다. 난생처음으로 남의 넥타이를 매준 것치고 제법 그럴듯한 모양이 나왔다.
“어… 잘 맸는데?”
윤태희는 넥타이 매듭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은 눈썰미가 꽤 좋은 편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실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 재겸은 어깨를 폈다. 한결 당당해진 얼굴로 재겸이 까칠하게 말했다.
“야. 그래서 왜 불렀는데.”
“음? 아, 맞다. 이쪽으로 오세요.”
윤태희는 데스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컴퓨터 앞에 앉은 윤태희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넓은 데스크 한 편에 놓여 있던 프린터가 종이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을 출력한 윤태희는 구석에 있던 접이식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오더니 멀뚱히 선 재겸에게 착석을 권했다.
“앉아요.”
그런데, 윤태희가 재겸에게 내어준 의자는 원래 윤태희 본인이 앉던 의자였다. 재겸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는 윤태희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군말 없이 빈 의자에 앉았다. 윤태희의 슈트 재킷이 걸려 있는 의자는 아주 푹신했다. 중역이 쓰는 가죽 의자라서 그런지 착석감이 남달랐다.
윤태희는 재겸에게 잘 보이는 위치에 출력한 종이를 펼쳐 두었다. 종이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낯을 굳혔다. 종이에 담긴 것은 아까 전에 재겸이 작성한 메일 전문이었다. 재겸은 한순간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왜? 집에 가져가서 벼랑빡에 붙여놓고 반성이라도 해?”
다짜고짜 튀어나온 공격적인 반응에, 윤태희가 소리 내서 웃었다.
“아니, 제대로 알려 주려고. 메일 쓰는 법, 맞춤법이랑 띄어쓰기.”
피식거리며 웃던 윤태희가 벗어둔 안경을 찾아 썼다. 필기구가 잔뜩 꽂혀 있는 컵에서 빨간펜을 골라 쥐는데, 재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귀찮아. 그리고 어차피 이미 다 끝난 일이잖어.”
“지난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하자는 거예요.”
“그래 봤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게 뭐가 어때서? 아끼던 소를 잃었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외양간을 고친다는 건 아주 훌륭한 거지.”
“…….”
재겸은 가자미눈을 뜨고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그래. 그럼 너는 훌륭하게 외양간이나 실컷 고치고 있어라. 나는 그 시간에 집 나간 소 찾아다닐 테니까.”
“…….”
윤태희가 말없이 볼펜을 휘휘 돌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사실 아까 전에 제조실장님한테 엄청 혼났는데….”
윤태희가 재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재겸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첫 줄부터 봅시다.”
네 똥 굵다. 재겸은 뾰로통한 얼굴로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윤태희는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며 세심하게 고쳐주기 시작했다.
“추격부가 아니라 축역.”
“알어. 이건 진짜 실수로 틀린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윤태희가 다정하게 말했다.
“어쨌든 추격이 아니라 역(疫)을 내쫓는다. 축역.”
“알았다고.”
윤태희는 틀린 단어를 하나하나 꼼꼼히 바로잡아 주었다. 띄어쓰기가 필요한 부분에는 조그맣게 브이 자로 체크 표시를 하고, 틀린 단어가 있으면 올바른 단어를 옆에 적었다.
“그리고 이건 경위 보고서가 아니라 상비약을 요청하는 게 목적이니까, 고 주임 얘기나… 아무튼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돼.”
재겸이 그렇게 메일을 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강이빈이 참고하라고 준 메일은 너무 딱딱하고 짧아서 정이 없었다. 그래서 제 딴에는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준 거였다.
“그럼 너무 성의 없게 느껴지잖어.”
“먹고 사는 일은 원래 성의 없이 하는 거예요.”
윤태희가 다시 빨간펜을 끄적거리며 말했다.
“여기서 ‘싸그리 동났다’ 이런 표현은 ‘전량 소진’으로….”
윤태희는 차근차근 첨삭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여기서는 무조건 띄어쓰기.”
“응.”
“이해했어?”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귀찮다고 튕기던 재겸은 어느새 집중하여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열심히 설명을 듣는 재겸의 얼굴로 힐끔 눈길을 주었다가, 그대로 뭐에 붙들린 것처럼 시선이 묶였다. 안경 너머의 시선이 동그란 이마를 꿰뚫을 듯이 향하고 있었다.
“…….”
말없이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안경을 슥 내렸다. 자석에 이끌리듯 고개를 숙이며 재겸의 이마에 툭, 입술을 눌러 박았다. 잔과 잔이 부딪치는 건배처럼 담백하게 스쳐 지나가는 입맞춤이었다. 종이를 바라보던 재겸은 난데없이 떨어진 우박을 맞은 것처럼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감싸 쥐며 상체를 뒤로 확 뺐다.
“…….”
재겸은 입술이 닿은 부분을 가린 채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이 정신 나간 남색가 새끼가 또…!
아까는 눈썹뼈에 입술을 붙이더니 이번엔 이마였다. 이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대나 보자. 재겸의 눈꼬리에 날이 설 때였다. 윤태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유를 갖다 붙였다.
“방금 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예상치 못한 자백에 재겸은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거는, ‘놀려는데’가 아니라 ‘놓으려는데’….”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볼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
뭐라 말할 타이밍을 놓친 재겸은 머뭇거리며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씨발, 미치겠네…….
재겸은 이마를 문지르며 집 나간 집중력을 뒤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