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푸른 첫새벽, 불면 속에서 밤을 지새운 재겸은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퀭한 눈으로 누워 있던 재겸이 몸을 일으켰다. 정주와 메산이는 아직 자는 중인지 집 안은 적막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서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재겸은 운동화를 신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나왔다. 북한산 기슭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골목을 오르자, 머지않아 등산로와 이어지는 공원이 나왔다. 자발적으로 등산에 나선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재겸은 신발 끈을 동여매고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감싸 오는 산 공기는 맑고 축축했다. 이른 시각이라 등산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도시의 풍경은 조금씩 작아져 있었고, 하늘의 채도는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어느덧 해가 완전히 떠서 푸르른 아침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정상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재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평평한 바위 위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재겸은 눈을 감고 이른 아침의 산 공기를 만끽했다.
잠시 명상에 빠져 있던 재겸이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잠시 후의 일이었다.
천천히 산에서 내려가는데 산을 올라올 때에 비해 등산로에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어쩐지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곁을 지나가다가 하나같이 재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가는 것이었다. 타인의 관심에 무감각한 재겸마저도 그 시선을 느낄 정도였다.
뭐지? 기분 탓인가….
그렇게 몇 걸음 더 내려갔을 때였다.
“뭐여. 저거 진짜여, 짜가여?”
“쟈가 직접 키우는 거 아니여?”
“에이, 설마. 모형이겄지….”
등산객 무리가 재겸의 어깨 부근을 삿대질하며 수군거렸다. 그에 의아해진 재겸은 제 어깨를 슥 쳐다보았다가,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어이 씨 깜짝이야! 뭐, 뭐야 이거?”
제 어깨를 확인한 순간 재겸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 웬 손바닥만 한 거북이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유남생’이었다.
동굴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으니 유남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 역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날 재겸은 도움을 청하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 무너지는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가, 바위틈에 끼어 버둥거리고 있는 유남생을 보았다. 저대로 두면 금방이라도 깔려 죽을 것 같아서, 재겸은 곧바로 유남생을 구해다가 동굴 앞에서 풀어 주었다. 거기서 이 녀석과는 연이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재겸은 어깨에 매달려 있던 유남생을 뚝 떼어 내 얼굴 근처로 들어 올렸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황당한 마음에 벌컥 입을 열었던 재겸이 별안간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보는 눈이 많았다. 남생이가 사람 말을 한다면 다들 기절초풍할 것이다. 재겸은 등산로를 벗어나 커다란 나무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재겸이 목소리를 낮추며 유남생에게 따져 물었다.
“푸헹취! …주인님, 좋은 아침입니다요!”
“좋은 아침이고 자시고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예에, 저 유남생이! 정기를 받으러 이 산에 왔다가, 우연히 주인님을 발견하여….”
유남생이 눈을 끔뻑끔뻑 뜨며 해맑게 뻥구라를 늘어놓았다.
“장난하냐?”
재겸은 더 듣지도 않고 유남생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 어기적어기적한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네 걸음으로 그 산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한 달은 걸린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뭐로 보고….”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덧붙였다.
“바른대로 말 안 해? 너 이번엔 진짜 거꾸로 뒤집어 놓고 간다.”
“진, 진짭니다요….”
깨갱한 유남생이 목을 움츠리며 꿍얼거릴 때였다.
“너 그거 아냐?”
“예?”
“난 같은 말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는 놈들을 제일 싫어해.”
재겸은 유남생을 땅바닥에 내려 놓고는 등을 돌렸다.
“흐어엉! 알겠습니다요!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요!”
재겸은 유남생과 동굴 앞에서 작별한 줄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이러했다.
유남생은 총총 멀어져 가는 재겸을 뒤쫓아 가서 바짓단을 꽉 깨물고 은밀히 재겸과 동행했다. 그렇게 죽자 살자 매달려서 세 식구가 사는 서울 집까지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집에 숨어든 유남생은 지난 며칠간 뒷마당에 있는 돌 무더기에 섞여 바위로 위장해 있었다. 움직일 일이 있으면 깊은 밤중에나 집 내부를 돌아다녔고, 은밀히 집 안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다 마침내 지낼 만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뭐?”
유남생의 이야기를 들은 재겸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어이가 없네, 진짜….”
집에 몰래 들어온 주제에 지낼 만한 곳인지 아닌지 동태를 살펴보았다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또 그와 동시에 유남생이 여기까지 몰래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재겸은 동굴에서 돌아온 이후 나사가 빠진 채로 지냈기 때문에 눈치를 못 챈 것도 당연했다.
“누가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냐?”
재겸이 짜증스레 이마를 긁적거릴 때였다.
“주인님의 은덕에 저 유남생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인제 와서 딱히 갈 곳도 없고,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런데, 주인님 댁에서 한동안 신세 좀 지면 안 되겠습니까요?”
유남생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은 떨떠름한 낯으로 유남생을 훑어보았다. 하루아침에 동굴이 무너져서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내심 딱하긴 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며 이 산에 두고 가자니 등산객이 많은 산이라 여러모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시 동굴에 데려다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았으니까, 나머지는 내려가서 얘기해.”
결국, 재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유남생을 데리고 하산하기로 했다.
***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부엌에서 푸근한 밥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 재겸아. 너 어디 갔다 왔어?”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정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재겸이 여태껏 방에서 자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재겸은 몸이 찌뿌둥해서 등산을 다녀왔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유남생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헌 칫솔을 꺼내서 유남생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엉? 머, 머 하시는 겁니까요…?”
재겸은 의외로 청결을 중요시하는 편이었다.
“야. 너 영물 맞냐? 씨바 뭔 땟국물이….”
“…….”
샤워를 마친 재겸은 세척한 유남생을 집어 들고 욕실을 나왔다.
“재겸아, 얼른 와. 국 다 식는… 어! 저, 저거 뭐야?”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메산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거북, 거부기?!”
남생이를 마주한 여우와 산삼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쩌다 유남생을 집에 데려오게 되었는지 재겸은 둘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사정을 듣고 난 정주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정주는 재겸의 성격을 잘 알았다. 재겸이 겉으로는 무심할지언정 속내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정주 자신이었다.
재겸은 천성이 모질지 못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정주 자신도, 메산이도 이때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어찌 됐든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재겸과 한솥밥을 먹는 식구인 정주의 입장에서, 저 굴러들어온 돌은 탐탁지 않았다.
저게 뭔 줄 알고! 무턱대고 집에 들였다가 사달이 나면 어쩌려고….
사정은 안됐지만, 지금 당장 유남생을 이 집에서 내보내고 싶다는 것이 정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주는 차마 자신의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못했다.
“어어, 안녕하세요?!”
왜냐하면, 메산이가 몹시 기뻐하는 얼굴로 유남생에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메산이는 유남생을 본 순간부터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은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처럼 유남생의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재겸이 손에 들고 있던 유남생을 건네자, 메산이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메산이는 조심조심 유남생을 건네받더니, 자신의 얼굴 높이로 유남생을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췄다.
“어어, 방. 방. 방갑습니다!! 저는!! 저는 메산이라고 해요!!”
메산이는 흥분해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예. 반갑수다. 덕삿골에서 나고 자란 유남생이올시다.”
“어어, 덕삿골이요? 덕삿골은 어디에 있나요?”
정주는 통성명을 주고받는 두 영물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메산이 또한 재겸과 마찬가지로 위기감이랄 것이 부족했다. 메산이는 숙객이 생긴 것이 그저 기쁜 모양이었다.
저리 좋을까? 하긴, 메산이에게 친구라고 해 봐야 너구리랑 산새들뿐이니까….
“…….”
어느 순간, 정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주는 다음 달부터 권순철 감독의 신작에 합류하는 것으로 확정이 난 상태였다. 재겸 또한 매일 출근을 하는 상황에서, 정주 자신마저 촬영장에 복귀하게 된다는 것은 앞으로 이 넓은 집에 메산이 혼자 남는 날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래, 갈 곳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록 해.”
잠시 고민하던 정주는 ‘당분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혹시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나는 정주라고 해. 호족이고. 넌 몇 년이나 살았는진 모르겠지만, 산 세월로만 따지면 제일 오래된 메산이도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 놓을게.”
정주가 새침하게 통보하자 유남생은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남생은 그간 염탐을 통해 이 집에서 무탈히 얹혀살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대강 눈치챈 상태였다. 처음엔 자신이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저 소년이 제일 우위에 있겠거니 했는데, 며칠 지켜보며 파악하기로는 저 정주라는 자가 집안 살림을 관장하는 듯했다.
“야. 일단 밥부터 먹어.”
재겸은 과일 깎을 때 쓰는 커다란 쟁반을 꺼냈다. 쟁반 위에 밥을 조금 푸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한두 젓가락씩 올렸다. 그런 다음, 유남생을 집어다가 쟁반 한쪽에 올려 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요?”
유남생은 감격한 얼굴로 연신 감사를 표하더니, 엉금엉금 음식 근처로 가서 코를 박고 찹찹찹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허겁지겁 먹는지, 세 식구가 수저를 든 채 유남생이 먹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볼 정도였다.
재겸은 요란하게 밥을 먹는 유남생을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야, 무슨… 굶었냐?”
정신없이 밥을 먹던 유남생이 빵빵해진 볼때기를 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예! 아주 오래요!”
“…….”
아, 그렇긴 하겠네… 동굴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고 했지….
“그래… 많이 먹어라….”
시들한 응원을 끝으로, 재겸도 밥을 푹푹 뜨며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재겸아, 너 산은 갑자기 왜 갔다 왔어?”
평이하게 날아든 질문에, 수저를 쥐고 있던 손이 짧게 멈칫했다.
“그냥… 바람 좀 쐴까 하고.”
“왜? 너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은 무슨….”
재겸은 반찬을 뒤적거리며 시큰둥하게 질문을 흘려보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다. 재겸은 문득 생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기어코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윤태희가 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