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정신을 잃은 소년이 눈을 떴을 때는, 묘정의 등에 업힌 상태였다.
‘깼니?’
관아에서 나온 묘정은 소년을 등에 업은 채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현감에게 뺨을 얻어맞고, 미친 듯이 화가 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후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묘정. 우리 지금 어디 가?’
‘집에 가지, 어딜 가느냐.’
‘나 그 원님한테 뺨 맞았어.’
‘그래, 내가 반 죽여 놨단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소년은 묘정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묘정의 이마를 슥 만져 보았다.
‘…….’
이전에 몇 번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피가 묻어 나왔다.
‘거짓말하지 마. 또 머리 처박고 빌었지?’
묘정은 말없이 웃었다.
‘잡놈들 그냥 죽여 버리면 되지 왜 빌어? 왜… 약한 범인한테 그렇게 절절매는 거야. 훨씬 더 강하면서, 그쪽이 먼저 잘못한 건데 왜 묘정이 맨날….’
소년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분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럼 내가 뭘 했는지라도 알려 줘.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우리 제자가 뭘 했는고 하니, 옷을 홀딱 벗고 해괴한 춤을 췄나?’
‘농담하지 마. 나 지금 장난으로 물어보는 거 아니니까.’
피식거리며 웃던 묘정이 한참 만에 조용히 대꾸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는 평범하게… 멀쩡히 괜찮아질 것이다.’
내가 또 화가 나서, 정신 못 차리고 사람들을 패고 물건을 깨부쉈는가 보다.
‘묘정.’
‘오냐.’
‘미안해.’
묘정이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저로 인해 모욕을 겪은 묘정에게 미안하여 눈물이 나왔다. 소년은 소리 없이 묘정의 어깨를 적셨다. 그에 묘정은 소년을 훌쩍 고쳐 업더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산길을 올라갔다. 소년은 생각했다. 역시 저는 묘정한테 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묘정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겸아,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소년이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어서, 묘정이 물었다.
‘…….’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마침내 짐을 다 챙긴 소년은 봇짐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붙잡고 고생한 흑색 장포를 곱게 접어서 내밀었다.
‘어? 이것은….’
사라졌던 옷이 눈앞에 있었다. 묘정이 눈을 휘둥그레 뜰 때였다.
‘저번에 옷고름 벤 거. 내가 바느질로 꿰맸어.’
소년이 시선을 내리깔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이제 떠날게. 묘정은 이제 나 생각하지 말고 살아.’
이마에 상처를 짊어지고, 묘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
‘혼인도 하고 애도 낳고 잘 살어. 그동안 고마웠어. 만날 나 때문에 애 딸린 홀아비 취급 받았잖어. 나도 이제 웬만치 컸으니 알아서 내 살길 찾을게.’
마침내 묘정의 낯이 기묘하게 굳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쩐지 요 며칠 성질이 팍 죽어서는 괜히 눈치를 보고, 혼자 죽상을 하고 있기에 왜 저러나 싶었다.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된 묘정이 하하하, 크게 웃었다.
‘이놈아. 나는 혼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몸이다.’
‘…뭐? 왜?’
죽상을 하고 있던 소년이 슬쩍 눈을 들었다.
‘아, 그건…….’
묘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침울하게 있던 소년이 중얼거렸다.
‘뭐 문제 있어? 혹시 구실을 제대로 못 하나….’
‘…….’
이 맹랑한 놈이….
어이도 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묘정이 헛웃음을 흘렸다.
‘좌우지간에 나는 평생 혼인할 일이 없으니 그런 줄 알아라. 그러니 어리석은 우리 제자는 허튼 생각 말고, 평생 이 스승님의 수발을 들도록 하여라.’
묘정이 능청스레 정좌하며 말했다. 소년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 때였다.
‘나는 평생 우리 제자에게 금이야 옥이야 수발을 받다가, 제자가 끌어주는 상여를 타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훗날 노쇠하여 등이 굽으면 네가 나를 업고 다녀야 할 것이다. 그때 가서 모른 척하고 팽하지나 말아라, 알겠느냐?’
묘정은 도포를 펼쳐보더니 “고운 잎사귀구나.” 기쁜 낯으로 활짝 웃었다.
‘이 세상 하직하는 날, 내 이것을 입고 무덤에 들어가리라.’
소년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어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죽을 때까지 나랑 함께 살겠다는 말을 한 거다. 나는 여기 있어도 된다!
소년은 마음속 가득히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꼈다.
거 봐, 묘정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묘정은 나와 평생 같이 살 생각인 거다.
소년은 지금 이 순간, 더는 바랄 것 없이 온전히 행복하였다.
***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제 자리를 찾은 소년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소년은 벌써 묘정과 며칠을 보냈다. 사소한 매 순간이 즐거웠다. 오늘도 평소처럼 밥을 먹고 묘정과 함께 수련을 하기 위해서 나란히 산길을 올랐다.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날. 하늘은 푸르렀고 햇볕은 따사로웠으며,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소년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묘정에게 툭툭 장난을 치기도 하며 즐겁게 걸었다.
‘아야.’
그런데, 불현듯 귀 한쪽이 끔찍하게 아팠다. 소년은 냅다 인상을 구기며 한쪽 귀를 감쌌다. 빙그레 웃고 있던 묘정이 의아한 낯으로 눈을 깜빡였다.
‘겸아, 왜 그러니?’
‘귀… 귀가 아파.’
소년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냐?’
갑자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온몸을 감싸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커다란 나무 뒤에서 무엇인가 확 튀어나왔다. 들짐승인가 싶어서 소년과 묘정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나으리.’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 앞을 막아선 것은 키가 작달막한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정을 나으리라고 부른 것을 보아하니 혹시 안면 있는 사이인가? 소년이 묘정을 향해 물었다.
‘아는 애야?’
‘글쎄, 처음 보는 아이인데….’
그러나 묘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아이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나으리, 어디 가셔요?’
코앞에서 멈춰 선 아이가 앳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이가 ‘나으리’라고 칭하고 있는 사람은 묘정이 아니라 저였다.
…뭐지? 왜 나보고 나으리라고 하는 거지?
‘너 누구야?’
어린아이가 까치발을 들며 해맑게 웃었다.
‘저예요, 저요!’
‘그러니까 네가 누군데?’
소년이 까칠하게 되물었다.
‘나리께서 직접 이름을 붙여 주셨잖아요!’
어린아이가 쑥스럽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다가 헤헤 웃었다.
내가 이름을 붙여줬다고…?
소년은 당황한 얼굴로 눈앞의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도 하고….
그러니까 얘 이름이… 뭐더라…?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긴가민가한 투로 말했다.
‘메, 산… 메산이?’
마침내 아이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네! 맞아요, 나리, 저는 메산이여요!’
아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손뼉을 치며 몹시 기뻐했다.
‘기억 안 나셔요? 처음 뵈었을 때요. 제가 ‘나는 높은 존재라오! 태산처럼 높은 존재라오!’ 했더니, 나리께서 웃으시면서 ‘태산? 태산 같은 소리 하네.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보다 높겠냐? 쥐방울만 한 놈이 태산은 무슨 태산이냐, 넌 그냥 메산이나 해라.’ 하셨잖아요. 그렇게 저는 메산이가 되었어요.’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던 아이는 소년을 향해 다가오더니,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그에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볼 때였다.
‘나리, 나리. 오늘도 밤늦게 오시나요?’
당황한 소년은 떠밀리듯 대꾸를 했다.
‘어? 어어….’
‘저녁에 집에 오시면요, 어어, 제가요, 공깃돌을 보여드릴까요?’
‘어… 그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활짝 웃었다.
‘네에! 그럼 정주 님이랑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이는 신이 난 표정으로 다다다,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소년은 어린아이가 달려나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뭐지? 소년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묘정을 쳐다보았다. 묘정 역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겸아, 가자꾸나.”
소년은 별말 없이 묘정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걸음 안 가서 우뚝 몸을 세웠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소년은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다가, 대뜸 발길을 돌렸다.
‘겸아, 어디 가느냐, 길은 이쪽인데.’
그에 묘정이 의아한 표정을 하며 소년의 손목을 붙잡을 때였다.
‘묘정, 나… 집에… 집에 갔다 올게….’
묘정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소년이 눈을 깜빡이다가 묘정의 손을 떼어 냈다.
‘나 집에… 집에 가야 돼….’
‘음? 무엇을 두고 왔느냐?’
‘어? 아니, 어… 그런 건 아닌데, 그게… 어, 그러니까….’
눈동자를 굴리던 소년이 불현듯 인상을 구기며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며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그게… 집에서 나올 때, 정주랑 메산이한테 말을 안 하고 나와서….’
머릿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낱말들을, 소년이 성글게 이어 붙였다.
‘이, 이대로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분명히 걱정할 거야….’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던 묘정은 결국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겸아.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 잠깐만…….
이마를 짚고 있던 소년의 표정이 어느 순간, 점점 기묘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정주랑 메산이는… 묘정이 나를 떠나고 나서 만났는데….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묘정과 눈이 마주쳤다.
‘…….’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머리가 핑핑 돌고,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소년이 비틀거리며 묘정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아프게 헤집으며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소년이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묘정이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겸아, 괜찮으냐? 왜 그러니?’
소년의 안색이 일변하자, 묘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묘정은 서둘러 무릎 한 쪽을 꿇어 앉으며 소년에게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묘정은 소년의 양 어깨를 붙잡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걸을 수 있겠느냐?’
그제야 소년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손, 대지 마….’
‘잘 안 들리는구나, 방금 무어라 했느냐?’
소년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묘정의 손길을 떨쳐냈고,
‘겸아, 왜….’
묘정이 다시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짚을 때였다.
‘놔——!!!’
갑작스러운 고함에, 묘정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은 자신의 양쪽 귀를 틀어쥐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소년이 눈을 질끈 감고 악을 썼다.
‘넌 결국 나를 버렸어!! 날 배신했잖아—-—!!!’
헉, 제 말에 놀란 소년이 덜컥하여 번쩍 눈을 떴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