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윤태희는 이 공간 안에서 천천히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윤태희를 보고 슬쩍 눈짓을 주고받거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 하며 속닥거리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윤태희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많아졌다.
그건 윤태희에게 있어 상당히 성가신 일이었다. 신분을 위장하여 잠입한 만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봤자 득이 될 일이 없었다. 자칫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파티는 원칙적으로 초대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윤태희는 가벼운 스몰 토크 위주로 사람들과 말을 섞었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기 위해서는, 적당히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귀신을 상대하는 게 낫지, 인간을 상대하는 건 이래서 싫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잠시 붙잡혀 있었던 윤태희는 술을 가져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간신히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어쩌다 보니 벌써 술을 석 잔이나 마셨다. 살짝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곤란했다.
윤태희는 슬쩍 셔츠 깃을 매만졌다.
“어디쯤 돌고 있어? 나 잠깐 붙잡혀서,”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알아서 잘 돌고 있으니까 신경 꺼.]
“…….”
쌀쌀맞은 대꾸에, 윤태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매만졌다. 이마에는 여전히 미열이 있었다. 거기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살짝 어지러웠다.
윤태희는 드링크 바로 가서 얼음물을 한 잔 마셨다. 컵에 입을 대고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에 얼음을 굴리며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고개를 돌리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있었는데,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저 사람도 아니네, 하는데 문득 윤태희의 시선을 확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어…….”
윤태희의 눈길이 향한 곳은 손이 아니라 목이었다. 그가 착용한 목걸이에는 녹색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가 꿰어져 있었다. 영롱한 초록빛이었다.
찾았다.
윤태희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상대는 딴청을 피우듯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다시 윤태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윤태희는 컵 속에 남아 있던 얼음을 먹으며 상대를 빤히 응시하다가, 그대로 뚜벅뚜벅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
윤태희가 뺨 한쪽에 얼음을 물고 말을 건넸다.
“계속 나 봤죠?”
“네.”
“왜 자꾸 봐요?”
“그럼 그쪽은 날 왜 봤는데요?”
상대가 질문을 되돌리자,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글쎄요…….”
윤태희는 볼에 얼음이 툭 튀어나온 상태였다. 뒤로 고개를 젖혔다.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상대를 쳐다보았다. 윤태희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으신 것 같은데.”
상대가 픽 미소를 짓더니, 윤태희를 따라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윤태희는 슬쩍 소파에서 등을 떼더니 상대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상대가 홀린 듯이 눈을 감았다. 어느새 코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윤태희는 상대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그렇게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의 순간,
“아, 맞다.”
윤태희가 우뚝 멈추며 입술을 달싹였다.
…응?
상대가 눈을 떴다. 코끝이 닿은 상태에서, 윤태희가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충치 있으세요?”
“…네?”
“충치 있어요?”
“…….”
갑자기 웬 충치?
“충치 있는 사람하곤 키스하기 싫은데.”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라구요?”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를 풀려고 괜스레 농담을 던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재밌다는 듯이 잠시 쿡쿡 웃던 상대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없어요.”
윤태희가 따라서 웃었다.
“다행이네요.”
상대가 다시 눈을 감을 때였다.
“그럼 실례지만….”
왜 또.
“아, 해 봐요.”
“…네?”
상대가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아- 해 봐요. 확인 한 번만 할게요.”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진심이에요?”
“네.”
마침내 상대가 미친놈 바라보듯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
상대는 윤태희의 어깨를 확 밀더니 갑자기 앞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하, 씨이발…….”
상대는 술을 반쯤 벌컥 들이켰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허리춤에 손을 짚고 와하, 하고 소리를 냈다.
“진짜 뭔, 별 또라이 같은 새끼 다 보겠네.”
상대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윤태희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
“얼굴값 하는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야.”
그렇게 상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시원한데.”
윤태희의 얼굴에서 술이 뚝뚝 떨어졌다. 윤태희는 손등으로 물기를 닦고,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멀어져가는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찾았어. 회수 완료.]
인파를 헤집고 다니는데, 윤태희에게서 무전이 왔다.
“찾았다고? 어디서?”
[응. 손에 끼고 있는 게 아니라, 반지를 목걸이에 매달아서 걸고 있었어.]
“목걸이? 그걸 어떻게 뺏었어?”
[자세한 건 나가서 얘기해 줄게. 상황실에 연락해서 정화부 나자한테 지원 요청하고 뒷수습 부탁할 거야. 삼십 분 안으로 온다고 했으니까, 정화부 나자 오면 이관하고 나가자. 아까 들어온 출입구 방향, 기둥 쪽에 서 있을게.]
“알았어. 화장실 들렀다가 갈게.”
눈알이 빠져라 손모가지만 훑어보고 있었는데, 목걸이로 매달고 있었다니 왠지 허탈해졌다. 그래도 회수했다니 다행이었다.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에 오랫동안 있었더니 왜인지 기가 빨려서, 재겸은 살짝 지친 상태였다.
재겸은 아까 봐 두었던 화장실 위치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은 구석 모퉁이를 돌아서, 통로를 지나야 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 가?”
통로를 지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팔을 확 잡았다. 재겸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재겸을 붙잡은 사람은 아까 전에 보았던 타투남이었다.
“뭐야. 놔.”
“또 보네. 찾는 사람 있어?”
재겸이 인상을 쓰며 타투남의 손을 뿌리치려 할 때였다.
“저기, 너 말이야. 이쪽이지?”
타투남이 갑자기 고개를 확 들이밀더니, 재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이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 보려던 재겸이 어느 순간 불현듯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이쪽이라면… 혹시 ‘귀재’를 말하는 건가?
“…어떻게 알았어?”
재겸이 묻자,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흠, 그냥 뭐… 사람 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 게이더 꽤 좋거든.”
뭔 소리야. 재겸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할 때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웃던 남자가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근데 너… 좀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타투남의 손을 떨쳐 냈다.
“알 거 없잖어. 알아서 생각해.”
대충 받아치고 지나쳐 가려는데, 타투남이 웃으며 팔을 들더니 재겸의 앞을 떡하니 가로 막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역겨웠다.
“비켜.”
재겸이 짜증스레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랑 한잔할래?”
“싫어.”
그때,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가 갑자기 슥 사라졌다. 타투남이 허락도 없이 모자를 뺏어 간 것이었다. 무선 핀이 부착된 모자는 타투남의 손에 있었다.
“…….”
마침내 재겸이 살벌하게 낯을 굳혔다.
“내놔.”
“에이, 그러지 말고. 한 잔만 하자.”
“…….”
재겸이 싸늘한 눈으로 타투남을 노려보았다.
“내놓으라고, 씨발놈아.”
타투남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하하 웃었다.
“와. 성깔 있네?”
뭐가 웃긴다고 처웃어….
그냥 확 패 버릴까? 재겸이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혼자 웃어 대던 타투남이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미짜지?”
미짜가 뭐지? 뭔진 몰라도 추궁하는 말투여서 일단은 잡아떼기로 했다.
“아닌데.”
“에이, 거짓말. 그럼 민증 까 봐.”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미짜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지.”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럼 민증 좀 까 보라니까?”
“너나 까.”
대화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자, 결국 타투남이 손발을 들었다.
“아, 알겠어. 그래, 민증은 됐고. 대신 번호 알려 줘.”
“뭐?”
“번호 알려 주면 오늘은 그냥 보내 줄게.”
재겸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 번호 몰라. 못 외워.”
“워… 컨셉 대단한데?”
타투남은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내가 직접 따지 뭐. 폰 좀 줘 봐.”
“싫어.”
재겸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타투남이 허, 하고 혀를 찼다.
“너무 튕기니까 재미없잖아. 그냥 보내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는데? 형이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누구 초대로 왔어? 초대장 내놔 봐.”
갑작스러운 요구에, 재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초대장은 윤태희에게 있었다.
“초대장 지금 나한테 없어.”
“그래? 너 누구 초대로 왔는데?”
“…….”
“말해 봐, 누구 초대로 왔냐니까?”
재겸이 우물쭈물하자, 타투남이 짓궃은 미소를 지었다.
“너 몰래 들어왔지? 솔직히 말해 봐.”
“…….”
“어! 저기 가드 있네, 가드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여기요!”
타투남이 재겸의 뒤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에 재겸은 움찔하여 후다닥 타투남의 팔을 잡고, 확 끌어 내렸다.
“아, 알았어! 주면 될 거 아냐! 번호 줄 테니까 모자나 내놔.”
재겸은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래, 번호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내밀 때였다.
누군가 휘청거리며 다가오더니 타투남의 어깨에 빡, 몸을 부딪쳤다.
“윽, 씨발! 당신 뭐야?”
휴대폰을 받아 들기 전에, 타투남이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아, 쫌.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니시죠?”
“아. 쏘리….”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투남에게 와서 몸을 부딪친 사람은 다름 아닌 윤태희였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윤태희에게선 술 냄새가 엄청났다.
“어, 뭐야….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윤태희가 비틀거리듯이 재겸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물거리는데, 타투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어? 어….”
재겸이 윤태희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이인데?”
“어? 그, 그냥 친구….”
“친구는 무슨 친구야? 나이도 훨씬 많아 보이는데.”
타투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맞아, 친구 아니야.”
그때, 비틀거리던 윤태희가 재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질펀하게 붙어먹는 사이를 친구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타투남과 재겸의 낯이 동시에 굳었다.
뭐?… 붙, 붙어 먹….
재겸이 몹시 당황하여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가자.”
윤태희가 그대로 재겸의 팔을 덥썩 잡고 등을 돌렸다. 재겸이 어정쩡한 걸음으로 끌려가듯 윤태희의 뒤를 밟을 때였다. 황당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타투남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손을 뻗어서 재겸을 붙잡았다.
“저기, 잠깐만….”
타투남이 재겸의 반대쪽 팔을 움켜쥐었다. 윤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낯으로 멈춰 서더니, 타투남의 손목을 강한 힘으로 틀어쥐었다.
“아니면, 네가 올래?”
타투남이 황당한 얼굴로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뭐?”
윤태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타투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너라도 딱히 상관은 없어. 면상이 역겹긴 한데, 뭐 그거야 옵션이고.”
“…….”
“대신에 내가 취향이 좀 더러워. 그건 감안해 줘.”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타투남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그러자 타투남은 사색이 되어 윤태희의 손을 떨쳐버렸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뭐, 뭔 소리야? 난 탑이라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난, 난 중요해. 이거 놔!”
“왜? 생각 없어?”
곱상하게 생긴 인간이 얼마나 술을 퍼먹은 건지 개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잘못 걸렸다 싶었다. 윤태희가 픽 웃으며 타투남을 확 끌어당겼다. 엄청난 완력에 타투남이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고, 타투남에게 귓속말을 했다.
“싫으면 훼방 놓지 말고 꺼져, 씨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