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39)화 (139/348)

#139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도로는 한산했다. 윤태희는 강이빈이 전달한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그대로 차를 몰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디오 주파수는 클래식 채널에 맞춰져 있었는데, 문득 익숙한 연주가 흘러나왔다.

[방금 들으신 곡은… 예브게네프 연주의… 야상곡 제3번… 사랑의 꿈…]

어디서 들었나 싶었더니 윤태희가 선물해 준 오르골에서 나오던 노래였다. 제목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재겸은 순간 이끌리듯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옆모습을 훔쳐보는데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만 할 따름이었다.

가만히 손을 꿈지럭거리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목패는 언제쯤 뺏어?”

“이번 달 지나서. 다음 달 중순쯤.”

성의 없을 정도로 짤막한 대답이었다.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

재겸도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반지의 주인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잠시 차를 세운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핸들 위에 팔을 걸쳐 놓고, 그 위에 턱을 괸 상태로 바깥을 응시했다.

재겸도 두리번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에 보이는 풍경은 완벽한 번화가였고, 늦은 밤임에도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파티가 열리는 살롱 입구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귀에 인이어를 낀 가드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윤태희는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가서 차를 댔다.

윤태희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콘솔 박스를 열었다. 여러 잡동사니, 간단한 제구 등이 들어 있었는데. 윤태희는 넥타이핀 두 개를 꺼냈다. 그것은 재겸도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지난번 면신례 때 지박령을 퇴치하러 가서 쓴 적 있던, 무전 겸용으로 제작된 특수 넥타이핀이었다. 윤태희는 무선 핀을 제 셔츠 깃에 꽂더니 재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 모자 좀 줘 볼래?”

재겸이 모자를 벗어서 건네자, 윤태희는 귀와 가깝게 붙는 위치에 핀을 꽂아 넣은 뒤, 작동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들리니.]

“응, 잘 들려.”

두 사람은 서로 통신이 잘 되는지 확인했다.

[그래, 나도 잘 들려.]

다시 운전석에 올라탄 윤태희는 슈트 재킷을 벗어 뒷좌석에 던져두었다. 넥타이도 풀고,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셔츠 소매는 깔끔하게 몇 번 접어 올렸다. 윤태희는 너무나 손쉽게 파티와 어울리는 차림이 되었다.

“자, 그럼 갑시다.”

윤태희와 재겸은 나란히 건물 입구로 향했다. 윤태희가 전달받은 초대장을 건네자, 문을 지키던 가드는 초대장을 확인한 뒤 재겸과 윤태희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명단을 체크한 다음 인이어에 뭐라 말을 하더니,

“입장하시면 됩니다.”

정중하게 손짓을 해 보였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여니, 이번엔 붉은색 쿠션이 붙은 또 다른 문이 나왔다. 이중으로 된 문을 열자 비로소 파티 홀이 펼쳐졌다. 시끄럽고 흥겨운 음악 소리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음악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쿠션이 붙어 있던 문은 실로 차음이 완벽했다.

파티 홀을 둘러보던 윤태희가 살짝 눈썹을 구겼다.

내부가 예상보다 훨씬 더 침침하고 어두컴컴했기 때문이었다.

말이 파티장이지, 라운지 바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한쪽에는 주류를 제공하는 커다란 바가 설치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스탠드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파티장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은 몇 명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나 어둡고, 사람이 많은데 반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한 가지 이점이 있다면, 사람이 많으니 인파에 섞여 들기 쉽다는 것이다.

“우선은…….”

윤태희는 곁에 선 재겸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건넸다.

“뭐라고? 안 들려!”

재겸이 목소리를 높였다. 음악 소리가 워낙 커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에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고, 재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우선 반지 낀 사람부터 찾아야 해. 둘이 흩어져서 찾아보자. 만약 반지를 발견하면 곧바로 무전 핀 눌러서 나한테 말해 줘. 회수는 내가 할 테니까.”

“응.”

“반지는 은반지라고 했고, 위에 에메랄드… 어, 녹색 보석이 박혀 있다고 했어. 알이 꽤 크다고 했으니까 아마 딱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응.”

“그리고….”

윤태희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누가 붙잡으면 무시해. 말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상대하지 마.”

“응. 알았어.”

재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윤태희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모자를 휙 쳐낸 다음, 이마를 아프게 깨물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

윤태희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곧바로 인파 속에 섞여들었다.

***

약 한 시간이 흘렀다. 재겸은 인내심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었다.

윤태희와 찢어져 파티장 내부를 돌아다니던 재겸은 인파에 치이고 치이다, 결국은 드링크 바 제일 끝에 놓은 의자에 앉아 잠시 쉬는 중이었다.

재겸은 모자를 푹 눌러쓰며 주먹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반지를 찾으면 된다기에, 처음에는 그저 사람들 손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서서 대화하는 사람들 위주로 손을 관찰했는데,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손짓을 섞어 가며 대화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초점을 놓치게 되었다. 인파 속에 부대껴 춤추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장소가 장소인 만큼,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당연히 손에 액세서리 하나쯤은 착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녹색 보석이 달린 반지를 찾아야 한다니… 재겸은 점점 화딱지가 났다.

어두컴컴한 데서 사람들의 손모가지를 보고 있노라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더러 이곳은 너무나 시끄러웠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러 과감하게 노출을 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때마다 재겸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렸고, 괜스레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재겸은 막막한 심정이 되어 모자에 붙은 무선 핀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윤태희도 열심히 반지를 찾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그때, 재겸의 시야로 무언가 초록빛 광채가 슥 지나갔다.

“어?”

저쪽 기둥에 서 있는 사람의 손에서 금방 초록빛으로 빛나는 뭔가를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상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손을 휙휙 움직여 대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재겸은 좀 더 유심히 살펴보기 위해 상체를 쭉 빼고, 모자챙도 슥 들어 올렸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헤이.”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놀란 재겸은 고개를 휙 돌려 상대를 쳐다보았다. 온몸에 타투가 가득하고, 한쪽 귀에 피어싱을 한 깡마른 남자였다.

“왜? 저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흔들며 능청스레 눈짓했다. 남자는 재겸과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허물없이 말을 붙여 오고 있었다.

얜 뭐야?…

재겸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타투남을 쳐다보았다.

“뭐?”

“아까부터 저 사람만 보고 있던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재겸은 살짝 당황했다.

“어, 옷… 옷 입은 게 멋져서.”

재겸이 핑계를 대자, 타투남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런 스타일 좋아하나 봐?”

“…….”

“관심 있으면 소개해 줄까? 친한 건 아닌데, 나름대로 안면은 있거든.”

“……아니, 관심 없어.”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시선을 피했다.

“흐응…. 그래?”

타투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재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딘지 의미심장한 시선이라, 묘하게 기분 나빴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윤태희가 말 섞지 말라고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상대해 주고 말았다.

재겸은 자리를 피하기 위해 슬쩍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누군가 다가와서 타투남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타투남의 신경이 딴 곳으로 쏠린 사이, 재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큰 기둥이 있는 곳을 지나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인파 틈에 윤태희가 보였다. 재겸은 반사적으로 윤태희에게 다가가려다, 발길을 멈칫 세웠다. 윤태희는 스탠드 테이블에 서서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가 뭐라 뭐라 말을 건네자, 윤태희가 허리를 숙여 귓가를 갖다 댔다. 이야기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윤태희가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상대는 윤태희의 어깨를 때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팔을 만지기도 하고, 손을 뻗어 옷에 묻은 티끌을 떼어 주기도 했다.

“…….”

아니 저 씹새끼는 나한테는 사람들이랑 말하지 말라더니….

재겸은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쪽은 눈이 빠져라 반지를 찾아다니고 있건만, 저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왜인지 기분이 팍 잡쳤다.

재겸은 다시 반지나 열심히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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