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35)화 (135/348)

#135

회색 슈트를 입은 윤태희는 그렇게 슥 지나갔다.

아니, 지나간 줄 알았다. 안심한 재겸은 임효문과 마주 앉아 열심히 휴대폰을 두들겨 댔다. 주어진 시간은 60초가 전부였기에, 재겸은 순식간에 액정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금세 프렌즈팡에 몰입했다. 게임에 몰두한 재겸은 가게 문이 열리며 딸랑, 맑은 종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세요?”

“아뇨, 일행 있는데….”

집중한 재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테이블 앞에 와서 서더니, 똑똑 테이블을 두들겨 정중한 노크 소리를 냈다. 재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토끼 눈을 떴다. 어찌나 놀랐는지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어? 윤 수석님?!”

임효문도 숨을 들이켜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올린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재겸을 한 번, 임효문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밖에 지나가는데 보여서. 그냥 갈까 하다가 들렀어요.”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던 임효문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 저는!! 암행부 제4팀 수습 나자…!!”

윤태희가 좌우로 고개를 돌리더니 재빨리 쉿, 검지를 갖다 댔다.

“밖에서는 관등 성명 금지.”

임효문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아차차… 울망한 눈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자, 윤태희가 괜찮다는 듯이 눈짓을 하더니 오른손을 들어 악수를 청했다. 윤태희가 소곤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윤태희예요.”

“임, 임, 임효문입니다!”

“반가워요. 저번에 시험날에 한 번 뵀었죠?”

“네네! 헉! 기억하시는구나!”

윤태희가 아는 척을 하니, 임효문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임효문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수석님, 여기 저희 부모님이 직접 하시는 가게예요.”

윤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가게를 둘러 보았다.

“어, 정말? 여기 영신이가 되게 맛있다고 한 곳인데….”

“혹시 식사하셨어요? 저희랑 같이 드실래요?”

뭐? 아니, 저 노락깽이 자식이 상의도 없이…

재겸이 눈짓을 보냈으나, 임효문은 재겸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까요. 저도 아직 식사 전이라서.”

윤태희는 재겸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임효문의 얼굴이 환해졌다. 말로만 듣던 그 윤 수석과 겸상을 하다니! 동기를 잘 둔 탓이다!

“수석님, 정식 드세요. 저희 집 정식 맛있어요.”

“그래요.”

임효문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냅다 주방으로 튀어갔다. 윤태희의 몫을 추가로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임효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빙그레 웃고 있던 윤태희가 웃음기를 지웠다. 비스듬히 턱을 괴더니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녕.”

“…….”

재겸은 말없이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제 별일 없었어요? 나 휴무였는데.”

“어… 뭐….”

재겸이 말을 흐리며 미적지근하게 대꾸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임효문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윤태희가 쓸 식기와 물컵 등을 챙겨서 돌아온 임효문은 윤태희 앞으로 착착 세팅을 해 주며 싱글벙글 웃었다.

“수석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네. 관할 서에서 잠깐 협조 요청 올라와서.”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아직 출근 전인 것 같은데 둘이 어쩌다 만났어요?”

“아, 그게 저희 둘이 영화관 갔다가요. 밥 먹고 들어가려고요.”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영화관?”

임효문이 선홍빛 잇몸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칠칠이가 영화 보여 줬어요.”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요.”

“네네! 말씀대로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실천 중입니다!”

윤태희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요.”

그때, 주방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효문아! 아빠 잠깐만 도와줘!”

임효문이 흠칫하더니, 주방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놔… 오늘은 손님이라니까는… 잠시만요, 금방 다녀올게요!”

꿍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임효문이 또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재겸은 피클을 뒤적거렸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윤태희가 턱을 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너 칠칠이야?”

순간 손이 삐끗했지만, 재겸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직원이 쟁반에 음식을 가져왔다.

윤태희는 기다리지도 않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그에 재겸도 눈치를 보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윤태희는 쓱쓱 잘 써는데 재겸은 영 서툴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자, 갑자기 윤태희가 재겸의 접시를 쓱 들어서 뺏어가더니, 자신의 접시와 맞바꾸어 주었다. 접시에는 돈가스가 먹기 좋은 크기로 가지런히 잘려져 있었다.

“…….”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윤태희가 태연히 물었다.

“…아니.”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윤태희는 감정의 기복을 보여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몇 분 뒤, 임효문이 자리로 돌아왔다. 임효문과 윤태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팀원들이랑 지낼 만하냐, 지내면서 힘든 건 없느냐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재겸은 먹는 데 집중하며 대화에 끼지 않았다.

“효문 씨, 일은 할 만해요?”

“아유, 말도 마세요!”

한숨을 푹 쉬던 임효문이 목소리를 낮추며 슥 말을 붙였다.

“요즘 벽사단 때문에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요?”

“대체 귀신들끼리 모여서 뭔 작당을 하는 건지….”

조사하느라 힘들다는 둥, 선배들도 정신이 없다는 둥, 임효문이 이런저런 고충을 털어놓았다. 윤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들어주었다.

“칠칠아, 넌 어떻게 생각해?”

임효문의 질문에, 밥 먹는 데 열중하던 재겸이 힐끔 눈을 들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

“귀신이 떼로 뭉친 이유 말이야.”

내가 알 바냐? 재겸이 심드렁하게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걔들도 심심하고 외로운가 보지.”

칼질을 하던 윤태희의 손이 우뚝 멈췄다. 재겸의 말이 워낙에 태평해서, 임효문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벽사단이 귀신들 양로원이냐….

“야, 무슨… 귀신이 뭔 외로움을 타냐.”

황당해하던 임효문이 장난스레 받아쳤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산 사람은 학교라도 가고 출근이라도 하고 뭐 할 일이라도 있지. 죽은 사람은 할 일도 없는데 얼마나 심심하겠냐….”

재겸은 돈가스를 욱여넣으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

“…….”

윤태희는 나이프를 손에 쥔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고, 임효문 역시 기묘한 눈을 한 채, 재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조용한 둘을 보고, 재겸이 “왜?” 물었다. 임효문이 대답했다.

“아니, 뭔가… 좀… 되게 인간적인 발상이다 싶어서….”

아까 영화관에서도 그랬다. 칠칠이는 공평했다.

“그럼 인간이니까 인간적이지, 귀신적이냐?”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받아쳤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윤태희의 시선이 스르륵 접시로 미끄러졌다.

인간과 귀신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윤태희는 한동안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

윤태희는 불현듯, 이 모든 것이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

“칠칠아. 맛있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어.”

임효문은 저와 윤태희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재겸에게도 간간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재겸은 윤태희가 합석한 후부터 단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왔다. 임효문은 눈치를 보다가,

“아. 맞다! 수석님… 혹시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대뜸 윤태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윤태희가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나 스물여섯이에요.”

그에 임효문이 옳다구나, 손뼉을 쳤다.

“아니, 그게요. 윤 수석님. 제 얘기 좀 들어 보세요. 만약에요, 수석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글쎄요. 어리다는 것 말고는 딱히 별생각 안 드는데… 왜요?”

“그쵸? 아니 글쎄! 수석님, 들어 보세요. 우리 칠칠이가 스물여섯 살 연상의 누님한테 낚여 가지고… 아주 그냥 별의별 마음고생을…!”

아니 저 새끼가!!

재겸이 테이블 밑으로 냅다 발길질을 했다.

“꺄흐흑!”

밑에서 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임효문이 펄쩍 뛰었다.

“야! 갑자기 발로 걷어차?”

갑자기 나이 얘기는 왜 꺼내나 했다.

“어… 그, 그게 의자 다리인 줄 알았어.”

“시험날에도 그러더니. 너 저번부터 계속 그러더라? 그때 네가 내 발 밟은 거, 그대로 피멍 들더니 나중에 새끼발톱 쏙 빠져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 어어… 그. 그랬냐? 괜찮아.”

“아니, 그니까 네가 괜찮으면 뭐 해, 내가 괜찮아야지.”

임효문이 계속 궁시렁댔다. 그러나 재겸은 임효문은 안중에도 없었다. 윤태희는 워낙에 눈치가 빨라서, 어쩌면 나이만 듣고도 자기 얘기인 줄 눈치챘을까 봐 걱정되었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라더니, 외려 임효문이 나서서 장작을 집어넣은 꼴이었다. 재겸은 곁눈질로 윤태희를 슬쩍 훔쳐보았다.

“…….”

윤태희는 방금 전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별 반응 없이 식사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재겸은 재빨리 말을 돌려 임효문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게 했다. 그렇게 화제를 흘려보내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갑자기 챙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아.”

윤태희가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상체를 기울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윤태희가 허리를 숙여 주우려고 하는데,

“수석님, 놔두세요. 제가 새 걸로 가져다드릴게요!”

임효문이 잰 몸짓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후다닥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재겸은 슬쩍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윤태희보다는 저에게서 더 가까운 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임효문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좀 그랬다. 재겸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포크를 주워들 때였다.

머리 위에서, 윤태희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렸다.

“연상의 누님 누구?”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던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

윤태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재겸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겸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윤태희가 방금 포크를 일부러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재겸은 임효문이 사라진 주방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네가 알 거 없잖아.”

윤태희의 접시 옆에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러네….”

윤태희가 시선을 내려 제 몫의 접시를 내려다볼 때였다. “여기요!” 때마침 임효문이 포크를 들고 왔다. 윤태희가 포크를 건네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효문 씨.”

“아이, 별말씀을요.”

윤태희는 접시로 시선을 옮기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잘해 봐요.”

“네? 뭐를요?”

저한테 한 얘기인가 해서 임효문이 되물었으나,

“…….”

윤태희는 그때부터 말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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