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31)화 (131/348)

#131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너희들이 뭔데 날 병원에 데려가! 난 멀쩡해! 멀쩡하다고!”

그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윤 노인은 아침 댓바람부터 대문에 서서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 댔고, 오늘도 복지관 사람들은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호된 감기에 시달리던 선오는 윤 노인이 구해 온 약을 먹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금세 평소처럼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나 윤 노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 어느새 윤 노인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오는 손수레를 끌고 집을 나서려는 윤 노인을 붙잡았다. 오늘은 하루만 집에서 쉬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자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다. 그런 윤 노인은 들은 척도 않고 화를 내며, 선오를 신방에 가둬 놓고 집을 나섰다.

“…….”

또다시 신방에 갇힌 선오는 무릎을 세워 안은 채 입술을 질겅거렸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시시.”

선오는 옷 소매를 걷고 시시를 깨웠다.

“부적을 없애는 방법 있어?”

“응. 있지.”

“알려 줘.”

시시가 눈을 반짝 뜨고 선오를 바라보았다.

“그때 알려 줬잖아? 크크.”

저번과 같은 방식이지만 부적을 파훼할 때는 피를 낼 필요가 없다고, 시시가 말했다. 그저 손에 기운을 집중하면 된다고 했다. 선오는 문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았다. 깨트릴 파破의 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자 문이 쉽게 열렸다.

이렇게까지 쉽게 열리다니, 그간 얌전히 갇혀 있던 게 허탈할 지경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문에 붙어 있던 부적들이 후루룩 불타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선오는 그대로 마당으로 나와 대문으로 달려갔다. 대문에 붙은 부적도 똑같이 선오의 손에 스러졌다. 잡귀들이 창가에 모여 웅성거렸다.

처음으로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선오는 산맥 줄기를 따라 무작정 달리고 달렸다. 하늘은 흐리고 어두운 하얀색이었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단 집을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는 선오는 되는 대로 산속을 헤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 땀이 맺힐수록 짜릿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으으. 너무 춥다. 너무 추워. 슬슬 돌아가자.”

어느 순간, 시시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러다 얼어 죽는다. 얼어 죽는다고!”

선오는 옷 소매를 잡아당겨 손목을 덮었다. 그러자 시시가 “좀 낫네.” 했다. 안 그래도 선오의 몸도 잔뜩 얼어붙은 상태였다. 땀을 흘리면 따뜻해지는가 싶다가도, 금세 다시 추워졌다. 다시 집에 돌아가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저쪽으로 가면 몸 녹일 만한 곳이 있을 것 같아. 크크.”

시시의 말에 선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저 멀리서 웬 집 하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아주 오래된 오두막이었다. 한쪽에는 잿더미가 쌓여 있는, 불에 그을린 아궁이가 보였다. 집에선 성냥으로 불을 켰는데, 여기선 딱히 불을 지필 만한 것이 없었다.

선오가 쪼그려 앉아 아궁이 속을 들여다볼 때였다.

“어?…”

시꺼먼 아궁이 속에서, 웬 안광과 눈이 마주쳤다.

“너는… 지귀구나.”

지귀는 불귀신으로, 가끔 땔감이 있는 곳이나 버려진 아궁이에 들어가 터를 잡고는 했다. 집에도 몇 번 들어온 적이 있었다.

“추워서 그러는데 불 좀 켜 줘.”

선오가 말을 탁 뱉으니, 지귀가 소심하게 중얼중얼 뭐라고 말을 했다. 태울 만한 땔감이라도 줘야 불을 켜든가 말든가 하지. 선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땔감으로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밖에는 눈이 퍽퍽 내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선오는 입고 있던 옷을 벗으려고 했다.

“얘, 얘. 선오야.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갑자기 손목에서 시시가 반짝 눈을 떴다.

“옷은 아까우니까, 네 머리카락을 잘라서 주는 건 어때?”

“내 머리카락?”

선오는 길게 묶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옷보다는 머리카락이 나을 것 같긴 했다. 아궁이 근처를 살펴보니, 잿더미 속에 가위 같은 것이 파묻혀 있었다. 끄집어냈다. 날이 무딘 탓에 자르는 데 애를 먹었지만, 대충 머리카락을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선오가 아궁이 속으로 머리카락 뭉치를 휙 던져 줄 때였다.

“하하하! 하하하!”

그러자 지귀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이냐! 이게 얼마 만이야!”

쾅---!!!

그 순간, 엄청난 힘이 폭발하며 선오를 밀어 냈다. 확 치솟는 불길에 놀라 뒤로 튕겨 나갔다.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선오의 눈의 크게 뜨였다.

푸른 불이 확 번지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푸른 화마는 금세라도 선오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에 놀란 선오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실로 엄청난 화마였다. 푸른 겁화는 버려진 오두막을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푸른 불은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재마저 삼키는 불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선오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나… 나도 모르겠네.”

시시도 당황한 듯했다. 선오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

푸른 불은 하루가 지나서야 꺼졌다. 정체 모를 푸른 겁화는 일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그 주변을 흔적도 없이 태운 뒤에야 사그라들었는데, 그 일대는 꼭 누가 도려낸 것처럼 나무고 뭐고 전부 기화하고 말았다.

선오는 이틀 가까이 산을 헤맨 끝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중에 산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선오는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지저분한 몰골로 터덜터덜 돌아온 선오는 집 근처에 이르러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닫힌 대문을 보는데, 기묘한 적막 내지는 폭풍전야에 느낄 법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집 안에 들어서자 그 예감은 확신이 섰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집 안은 놀라울 만큼 깨끗했고, 물건이 이상하리만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방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 선오 왔느냐.”

윤 노인은 신방 한가운데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윤 노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선오가 기어코 사고를 친 게야.”

산중을 불태운 푸른 불을, 윤 노인은 보았다. 선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 노인은 그게 선오의 짓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 역시 선오(宣悟)인 게야.”

“…….”

“그래, 밖에 나가니 좋더냐?”

“…….”

묘한 위화감을 느낀 선오는 왜인지 윤 노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문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윤 노인이 말없이 손짓했다. 쭈뼛쭈뼛 윤 노인에게 다가가니, 윤 노인은 쭈글한 손으로 선오의 옷을 탁탁 털어 주었다.

“북동쪽으로 산줄기를 따라서 가거라. 낙선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

“여기보단 지낼 만할 게야. 거기 주지승이 괴팍한데, 할애비 친구란다.”

“…….”

선오는 윤 노인이 드디어 저를 쫓아낸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갔고, 산에 불을 질렀으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선오는 아무 말 없이 윤 노인을 바라보았다. 윤 노인의 눈동자는 맑게 개어 있었다.

“…애들은 다 어디 갔어?”

그러다 불현듯, 선오는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주변에서 귀찮게 얼쩡거려야 할 잡귀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보냈지.”

“보내다니… 어디로?”

“혹시라도 아프게 갈까 봐, 할애비 손으로 편하게 보냈지.”

윤 노인이 주름지고 거친 손으로 선오의 뺨을 쓸었다.

“이제부터 뒤돌아보지 말고 달리거라. 알았느냐?”

선오는 윤 노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대문 말고 쪽문으로 가거라. 그럼, 잘 가거라.”

“어? 어… 응….”

윤 노인은 웃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무척이나 단호하였다. 그래서 선오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신방을 나섰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쪽문으로 걸어갔다.

“…….”

다시 산을 오르는데, 십 분 정도 갔을까. 얼마 못 가 선오의 걸음이 멈췄다.

선오는 머뭇거리며 등을 돌렸다. 다시 윤 노인에게로 되돌아갔다. 방으로 다시 들어서자, 아까와는 달리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윤 노인이 보였다.

“할아버지. 저 진짜로 가요?”

그제야 윤 노인이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장난을 치는 거였구나 싶어서, 선오의 얼굴에 그제야 살짝 미소가 돌았다. 선오는 윤 노인에 다가가서 어깨를 잡아 올렸다.

“할아버지! 장난….”

선오의 낯이 굳었다. 윤 노인은 소리 없이, 그리고 괴롭게 울고 있었다.

“이놈아… 어쩌자고 다시 돌아왔느냐… 선오야!”

“할, 할아버지. 왜….”

윤 노인은 선오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꽉 안았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무신도가 새겨진 병풍 뒤쪽으로 데려갔다. 병풍 뒤에는 커다란 반닫이가 놓여 있었다. 윤 노인은 반닫이를 열어 선오를 집어넣고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절대 나오지 말아라.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 부탁이다. 알겠느냐?”

선오가 뭐라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윤 노인이 함 뚜껑을 닫았다. 그대로 암흑이었다. 선오는 대체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손목을 내려다보았으나, 어두워서 손목에 새겨진 시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원중. 당신에게는 금술을 개발하고 도주한 죄….”

“그럼, 알고 있소.”

“하지만 오늘 일에 제대로 협조한다면, 정식적으로 징계 위원회에서….”

선오는 미세한 틈 사이로 귀를 기울였다. 머리 위로 이불까지 뒤집어쓴 상태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 내용은 오리무중이었다. 고민하던 선오는 아주 살짝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때, 상대가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윤원중. 불을 누가 질렀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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