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9)화 (119/348)

#119

“단주님, 왜 그러십니까?”

묵묵히 휴대폰을 바라보는 윤태희를 향해 귀신, 패현이 물었다. 그제서야 윤태희는 액정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 사람도 같이 데려가 줘.”

패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정탁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귀신이 다가오자 서정탁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흐, 으으… 저, 저리 가! 이 악귀야….”

패현이 경멸하는 눈으로 서정탁을 응시했다. 이래서 인간을 상대하기가 싫은 것이다. 마음만 같아서는 손 가는 대로 험하게 다루고 싶었으나, 패현은 단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는지, 단주가 저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지요.”

패현은 손날에 귀기를 싣고 서정탁의 목뒤를 후려쳤다. 서정탁이 컥,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겁에 질려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이를 진정시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패현은 의식을 잃은 김석철과 서정탁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덧 방 안에 남은 사람은 장 회장과 김 실장 그리고 단주, 세 명뿐이었다. 소란이 그친 방 안은 놀랍도록 적막했다. 저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 있던 단주는 주렴을 쳐 둔 공간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단주는 주렴을 슥 걷다가 장 회장과 김 실장을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얼어붙어 있던 장 회장과 김 실장이 시선을 교환했다. 김 실장이 먼저 후들후들 떨리는 걸음으로 단주의 뒤를 따랐다.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니 응접실처럼 꾸며진 아늑한 공간이 나왔다.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뒤쪽으로는 수묵화가 그려진 커다란 병풍과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장검이 수평으로 걸려 있었다.

대자로 반듯하게 걸려 있던 적색 두루마기는 김석철이 건드린 탓에 바닥에 풀썩 떨어져 있었다. 단주는 두루마기를 집어 들었다. 대충 먼지를 툭툭 털어 낸 뒤, 가운처럼 휙 걸쳐 입었다.

“뭐 해요? 앉아요.”

단주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장 회장과 김 실장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단주는 볼 캡을 벗어 탁자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더니,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며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걸쳤다. 모자에 눌렸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단주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긴장들 푸세요.”

김 실장은 손에 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선객은 단주의 두루마기를 만진 뒤 손이 떨어져 나갔고, 산 중턱에서 만났던 젊은 청년이 그 두루마기를 입고서 눈앞에 마주 앉아 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사고가 뒤죽박죽 엉켜 혼란스러웠다.

김 실장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선, 선생님께서… 벽사단의….”

갑작스러운 존칭에 청년이 씩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청년은 질문을 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김 실장은 곤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장 회장 역시 아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저는 비서 김선재라고 합니다. 이쪽은 세, 세강 기업의 장, 장필영 회장님이십니다….”

사람 잘못 봤다며 잡아뗀 것이 아까 전의 일이다. 인제 와서 사실대로 말하려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단주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 그리고 이건 명함….”

김 실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 회장을 대신하여 명함을 건넸다. 단주가 명함을 받으려 손을 들어 올리자, 명함을 쥔 김 실장의 손끝이 짧게 흔들렸다. 단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단주는 김 실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별안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사람 맞아요.”

“…예, 예?”

“귀신 아니니까 너무 쫄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며, 김 실장의 손에서 명함을 휙 채 갔다. 단주는 명함을 앞뒤로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보았다. 의자에 등을 푹 기대고 앉은 단주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오… 체어맨 장 필 영….”

명함에 쓰인 글자를 또박또박 읽는 목소리가 묘하게 불손했다.

“우리 짱 회장님은 누구 소개받고 왔어요?”

단주의 물음에 김 실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선, 선사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뇨, 아뇨. 원래 선사님 고객은 아니잖아요. 내 말은 누가 다리 놔 줬느냐고요.”

단주는 장 회장과 선사 사이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허, 허용식 장관과 막역한 사이입니다.”

“아, 허 장관님….”

단주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주가 탁자 위에 명함을 내려놓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김석철과 서정탁을 데리고 나갔던 귀신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은 사기로 만든 찻잔과 찻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귀신은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셋 중에 제일 먼저 단주의 앞에 놔 주었다.

귀신이 인간의 차 시중을 드는 광경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고마워.”

단주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귀신의 시중을 받았다. 귀신은 나머지 둘에게도 차를 따라 준 뒤, 단주를 보좌하듯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정자세로 섰다. 명백히 윗사람을 모시는 태도였다.

김 실장은 두려운 와중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단주’라 불리는 저 청년의 정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발밑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는 데다, 제 입으로 직접 자신이 인간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뭐 하는 인물이기에… 어떻게 사람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떠올랐지만, 김 실장은 청년을 향해 그 무엇도 질문할 수 없었다. 이 공간 안에서, 모든 주도권은 저 젊은 청년이 쥐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단주가 태평하게 차를 홀짝이며 용건을 물었다.

“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내내 장 회장을 대리하여 입을 열던 김 실장이 머뭇거리며 장 회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에 장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들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산 중턱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툭툭 반말을 쓰던 장 회장은 어느새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장 회장은 침중한 얼굴로 이곳까지 오게 된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우리 짱 회장님 말씀은 이런 거네요. 누가 아들에게 살을 날리고 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날아오는 살을 막아 달라. 이 얘기인 거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주가 요약했다. 장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사님이 거절할 만한 일이긴 하네요….”

단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래 무당들 그런 일에 몸 사려요. 왜냐면 살 잘못 날렸다가 안 먹히면 날렸던 살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오거든요. 역살 맞을까 봐 무서워서 잘 안 해 주죠.”

그렇게 되면 육체적으로 큰 고통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요, 비참한 말년을 보내거나 업이 쌓여 후대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단주는 조곤조곤 세심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무튼… 잘 찾아오셨어요. 저 살 잘 날리거든요.”

부연을 끝낸 단주가 빙그레 웃었다. 선사가 소개한 대로 ‘적임자’라는 말에 걸맞은 흔쾌한 반응이었다. 장 회장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때, 단주는 뭐가 웃긴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데 우리 짱 회장님, 지금까지 몹쓸 짓 많이 하면서 사셨나 보다. 그쵸.”

단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불륜, 혼외자, 마약, 살인… 이 중에 몇 개나 해당 되세요?”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에, 장 회장과 김 실장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혹시 찔렸어요? 뭘 그렇게 놀라요. 그냥 눈치로 때려 맞힌 거예요.”

얼어붙은 두 사람을 보던 단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높은 분들이 나례청 안 찾아가고, 굳이 몇 달씩이나 기다려가면서 무당한테 부탁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야 너무 뻔하잖아요. 웬만한 허물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고.”

단주는 반쯤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은 제대로 지켜 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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