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5)화 (115/348)

#115

대학 전공이 직업 선택에 끼치는 실질적 영향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임효문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 맞다! 음료수!”

음료 자판기 앞으로 후다닥 달려간 임효문은 지폐 몇 장 집어넣다가 재겸이 앉은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칠칠아, 너도 뭐 마실래?”

“아니. 안 마셔.”

임효문이 자판기 버튼을 누르자 쿠당탕, 음료 캔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마침내 휴게실에 온 용건을 해결한 임효문이 품에 안고 있던 음료 캔 네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턱을 괴고 있던 재겸이 멀뚱멀뚱 음료 캔 네 개를 바라보았다.

“목구멍에 가뭄 들었냐?”

가뭄…? 뭔 소린가 하다가, 임효문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뭐? 이걸 내가 다 어떻게 마셔? 나머지는 선배들이 시킨 거야.”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네 선배들은 땅에 발이 붙었대? 왜 너한테 시켜?”

“아냐! 프렌즈팡으로 음료 내기했는데 내가 져서 그래.”

신입을 부려먹는 악덕한 선배들이라고 혹여 오해할세라, 임효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프랭주판? 그게 뭔데….”

“엥? 프렌즈팡을 몰라?”

임효문이 말한 게임은 요새 한창 유행이라는 스마트폰 게임이었다. 똑같은 캐릭터를 줄줄이 연결하여 점수를 얻는 방식으로,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느냐가 관건이었다. 금세 질릴 법한 단순한 게임이지만 자투리 시간을 때우기엔 제격인 데다, 휴대폰 메신저와 연동이 되어 있어 친구들과 순위를 겨룰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승부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르지? 칠칠아. 너 10대 맞아?”

재겸이 살벌하게 정색을 하자 임효문이 코를 긁적거렸다.

“그으래… 뭐, 공부하느라 잘 모를 수도 있지. 요즘 10대들은 이런 게임 안 하나? 내 동년배들은 다 이거 하는데. 이거 한번 빠지면 답도 없어.”

임효문이 멋쩍은 얼굴로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다 휴대폰을 꺼냈다.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볼래?”

임효문은 곧바로 어플을 실행시키고, 게임 스타트를 눌렀다.

레디! 고!

게임 시작과 동시에 아기자기한 배경음이 뚱땅뚱땅 흘러나왔다. 평소 게임을 좋아하는 재겸은 어느새 자라처럼 고개를 쭉 빼고 임효문의 플레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게임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시범 삼아 보여 준다는 것치고 임효문은 꽤나 전투적으로 게임에 임했다. 게임에 집중한 임효문은 입술이 새 부리처럼 튀어나와서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집중한 것에 비해 실력이 영 형편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퍼즐은 눈에 띄질 않으니, 임효문의 손이 안절부절못했다.

“…거기 아래, 아래.”

대충 게임 룰을 파악한 재겸이 저도 모르게 훈수를 뒀다.

“어디 어디? 어디?”

“한 칸 밑에 있잖아.”

“어디?! 안 보여!”

그냥 똑같은 모양으로 세 개 이어 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 바로 눈에 보이는데 임효문은 말해 줘도 몰랐다. 재겸은 결국 답답해진 나머지 손가락을 들이밀어 직접 블록을 이동시켰다.

“멍청아, 여기 있잖아!”

팡, 소리와 함께 점수가 올라가자마자 깜찍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게임 오버!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60초의 분투 끝에 임효문이 얻은 점수는 21만 점이었다.

“끼야악! 폭탄 아껴놓지 말고 그냥 누를걸!”

임효문이 아쉬움에 몸부림치며 샛노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야, 너 진짜 못한다. 몇 번을 알려 줘도 그걸 못 찾냐.”

재겸이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이게 옆에서 볼 땐 쉬워도 막상 해 보면 어렵거든? 너 해 봐.”

임효문이 발끈하더니 휴대폰을 건넸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얼떨결에 휴대폰을 받아 든 재겸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여태껏 빠개 먹은 게임기가 몇 개인 줄 아냐? 이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 식은 죽 먹기다….

레디! 고!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재겸의 낯이 싹 굳었다. 옆에서 구경할 땐 잘만 보이던 게 갑자기 뒤죽박죽 엉켰다. 마음이 조급해진 탓인지 마음과 달리 손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임효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블록을 몇 번 옮기지도 않은 것 같은데 게임 오버가 떠올랐다.

“뭐, 뭐야. 벌써 끝났어?”

재겸이 당황한 얼굴로 액정을 톡톡 건드렸다.

7만 점….

“…….”

“…….”

빈약한 점수에 임효문이 푸풉, 하며 입을 가렸다.

“칠칠아, 넌 정말… ‘7’을 좋아하는구나.”

임효문이 배를 잡고 걀걀걀 웃어 댔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요, 역지사지의 실천이었다. 얄미운 꼬락서니에 재겸의 표정이 몹시 험악해졌다.

저 노락깽이 자식이…!

“야. 다시 해. 방금 건 무효야.”

“왜! 뭐가 무효야! 정정당당하게 승복할 줄을 알아야지, 칠칠아.”

“나는 이거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몰랐어. 제대로 정확히 알려 주고, 정정당당하게 다시 해. 제대로 숙지하고 해야 공평한 거야.”

재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탈색남을 노려보았다.

“빨리 다시 해.”

“그냥 하면 재미없지. 내기라도 걸면 생각해 볼게.”

“내기? 뭔 내기.”

“음… 점수 낮은 사람이 영화 보여 주는 거 어때?”

승부욕을 자극당한 재겸이 짜증스레 말했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시작이나 하라고.”

재겸이 게임에 재미를 붙인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재겸이 게임에 몰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생에는 목표가 없지만, 게임 속에는 목표가 있다. 높은 점수를 달성하여 과거의 기록을 뛰어넘고, 보스 몬스터를 물리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방구석 안에서 행할 수 있는 훌륭한 진전이요,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성취였다. 게임에 몰입한 순간만큼은 상념이 사라졌다. 이 삶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레디 고!

임효문과 함께 뒤죽박죽 섞인 퍼즐을 풀어 나가며, 재겸은 오늘 아침 7212번을 떠나 보내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7212번 버스를 놔두고 굳이 다른 버스를 타고 출근한 보람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

정탁아. 너 혹시 벽사단에 대해 들어 봤냐?

그래. 여혜 선사가 부린다는 그 귀신 집단. 내가 얼마 전에 벽사단에 관해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벽사단의 단주는 어마어마한 악귀라잖아. 소문에 의하면 단주에겐 신묘한 능력이 있어서 겉모습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해.

언제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되었다가, 또 어느 날에는 장성한 청년이 되고, 하다 하다 걸음마도 못 뗀 갓난쟁이 노릇까지 한다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고, 믿고 말고는 본인 자유겠지만 말이야. 난 믿는다. 왜냐면 들은 얘기가 있거든.

아,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단주의 외양 같은 건 중요치 않아. 어차피 단주가 누군지 그 정체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니까. 근데 딱 하나, 특이점이 있다면 벽사단의 단주는 바깥에 모습을 드러낼 적이면 항상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타난다는 거야.

나는 단주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

다만, 그 두루마기에 관해선 관심이 좀 있지.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적색 두루마기에는 아주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모양이거든. 그저 손을 대는 것만으로 닫혔던 귀감이 활짝 열리고, 깜깜하던 눈까지 번쩍 뜨인다는 거지. 일개 범인에 불과한 인간이라도 말이야.

어때, 정탁아. 정말 신기하지 않냐?

“뭐, 신기하긴 한데…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시는 건데요?”

장황한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서정탁이 눈을 끔뻑거리며 산통을 깼다. 덕분에 잔뜩 몰입하여 말을 이어 나가던 김석철은 김이 팍 샜다.

“하여간, 이 눈치라곤 개 코도 없는 자식.”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김석철은 운전대를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단주의 적색 두루마기를 만지면 귀감이 열리고 눈이 번쩍 뜨인다니까! 정탁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김석철과 서정탁, 둘을 태운 검은색 자동차는 현재 논밭을 낀 채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출발한 지 두 시간이 흘렀고, 서정탁은 조수석에 앉아 해맑은 낯으로 창밖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서정탁은 좀처럼 감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답을 기다리던 김석철은 결국 답답한 마음에 핸들을 탁탁 두드렸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에, 바로 벽사단의 본거지가 있다고!”

김석철의 호통에, 서정탁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김석철은 비장한 얼굴로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믿을 만한 소식통이 전해 준 정보야. 우리도 슬슬 신당 차려서 나가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너나 나나 이제까지 할 만큼 하지 않았어?”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던 김석철은, 수년 전 지역에서 용하다는 만신을 찾아가 내림굿을 받으면서 병을 털고 무업(巫業)의 길에 들어섰다.

신내림을 받았다고는 해도 갓 태어난 애동, 새끼 무당에 불과했다. 어엿한 무당이 되기 위해선 신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일을 배우는 애동 생활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기도를 올리고 공부에 매진하여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아기 새가 둥지에서 떠나듯 자신의 신당을 차려서 나가는 것이다.

나이와는 무관한 영역이기 때문에, 신내림을 받을 때 이미 사십 대 중반이었던 김석철 또한 애동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당연하였다. 김석철의 신부모는 김석철을 제외하고도 몇 명의 애동 제자를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서정탁이었다. 살갑고 정이 많은 서정탁은 김석철을 ‘형’이라고 부르며 김석철을 잘 따랐다. 서정탁은 김석철의 조카뻘인 나이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소질’이 없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으레 신자식이라면 마땅히 홀로 서는 순간을 꿈꾸기 마련이다. 다른 신자식들은 신당을 차려 나가는데 김석철과 서정탁만은 미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연배가 있는 김석철은 해가 갈수록 점점 조급증에 시달렸다.

“정탁아, 들어 봐. 내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단주의 두루마기를 만지면 온몸의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 들면서 그날부로 신령님 목소리가 옆에서 말해 주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린다고 해.”

서정탁은 그제야 김석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형, 설마….”

분명 처음엔 바람도 쐴 겸 드라이브나 하자는 김석철의 제안을 따라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단주 두루마기를 만져서 신빨을 올리겠다, 뭐 이런 소리예요?”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차는 어느덧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곡면 주왕2리. 이정표를 세워 놓은 커다란 비석을 지나자 다리 하나가 나왔다. 다리 밑으로 보이는 하천은 물이 바싹 말라 있었는데도 물비린내가 났다. 어떻게 봐도 드라이브를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서정탁이 애원하듯 소리쳤다.

“형! 당장 차 돌려요, 형 진짜 미쳤어요?”

그러나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누가 그 두루마기를 훔치자고 했어, 뭐 했어? 그냥 만나서 말이나 주고받으면서 슬쩍 만져나 보자는 거지. 나 혼자 오려다가 네가 눈에 밟혀서, 다 너 생각해서 데리고 온 거다.”

“형! 제정신이에요? 그 말을 믿어요? 그게 진짠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설사 헛소문이더라도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하기사 너야 나이가 젊으니 무슨 걱정이겠어, 근데 나는 이게 동아줄이다.”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차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달리던 차가 멈춰 선 곳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시골의 한 야산이었다. 인적 없는 산 입구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장승 하나가 서 있었다. 김석철과 서정탁을 쏘아보는 장승의 눈매가 부리부리했다.

서정탁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제법 울창한 산이었다. 산맥 줄기에서 벗어나 벽지에 덩그러니 위치한 산은 딱 봐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산에서 느껴지는 정기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싸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산이다.

“형. 부탁이에요. 그냥 돌아가요, 네? 열심히 기도 올리면 신령님이 응답을 주실 거예요. 잡신들 잘못 상대했다가 허주로 몸에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게다가 어마어마한 악귀라면서요…!”

결국, 서정탁이 울먹거리며 운전대를 잡은 김석철의 팔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나 김석철은 서정탁의 부탁에도 아랑곳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여기까지 와 놓고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정 그렇게 미덥잖으면 정탁이 너는 그냥 여기 차에 있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말을 마친 김석철은 차에서 내렸다. 서정탁은 안절부절못하며 김석철의 뒷모습을 보다가, 결국 조수석 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산에 올라갈 확신은 서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김석철을 혼자서 보낼 수도 없었다.

“아, 형! 같이 가요!”

서정탁은 하는 수없이 김석철의 뒤를 쫓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