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윤태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재겸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만난 재겸은 생각보다 침착하고 무덤덤해 보였으나, 윤태희는 알 수 있었다. 재겸은 지금 아주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
윤태희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시선은 여전히 재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윤태희는 팔을 뒤로 움직이더니 뒷짐을 지어 보였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열중쉬어 자세였다. 몸을 감싸고 있던 슈트 재킷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때려.”
윤태희가 조용히 덧붙였다.
“기분 풀릴 때까지.”
“…….”
재겸이 눈을 치켜뜨고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왜 그래야 되는데?”
“너를 화나게 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재겸은 화가 나 있었고,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재겸은 지금 진창에 처박혀 있었다. 집에 가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진흙을 뒤집어쓴 상태로 집에 간다면 그 따듯한 집이 더러워질 테니까. 저를 진창에 처박아 놓은 것은 눈앞에 있는 윤태희였다.
물론, 윤태희가 사과를 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늘 당당하고 여유롭던 녀석이 물러서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고, 내심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과를 들었다고 해서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윤태희가 정곡을 후벼 판 만큼 마음속에 남은 상흔은 깊기만 했다.
하지만 윤태희와는 좋든 싫든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이 이상의 충돌은 피해야 했다. 재겸은 윤태희가 얌전히 눈앞에서 꺼져 주길 바랐다. 윤태희를 본 순간부터 재겸은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재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윤태희는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때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야, 너 지금 나 약 올리냐?”
재겸이 낮게 물었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음산했다. 예전처럼 손이 가는 대로 때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건 재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진심이야. 화 풀릴 때까지 쳐.”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태도였다. 그에 재겸이 입을 다물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윤태희는 뭐든지 받아 줄 용의가 있다는 듯이 순순한 모습을 보였다. 때리는 대로 맞겠다는 식의 태도에, 재겸은 어째선지 모르게 화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열이 뻗쳐 오르기 시작했다.
기분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재겸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수석실에서는 홧김에 한 대 때리긴 했지만, 분이 풀릴 때까지 성질대로 녀석을 두들겨 팬다면 아마 윤태희는 반송장이 되고 말 거다. 윤태희는 내가 자기를 얼마나 봐주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잘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거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참아 주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
치밀어 오르는 불덩이를 삼키며, 재겸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간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가 울었다. 가로등 불빛이 재겸의 얼굴에 음울한 역광을 만들어 냈다. 한참 만에 재겸이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벤치에 앉아 있던 재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윤태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윤태희와 마주 보고 선 재겸은 풀어 헤친 넥타이를 땅바닥에 던졌다. 내친 김에 슈트 재킷도 벗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휙 내팽개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재겸의 행동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윤태희가 눈을 좁혀 뜰 때였다.
“그냥 한 판 붙자.”
뭐? 윤태희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어.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한테 이러는 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그래서, 결론은 너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라는 거야. 너는 사람을 가만히 놔두질 못해서 안달이 난 새끼야.”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한쪽만 억지로 참아 주고 맞춰 주는 건 불공평하잖아. 더는 애쓸 필요 없어. 일일이 받아 주기 짜증 나니까 그냥 한 판 붙어. 네 계획에서 발을 빼는 일은 없으니 걱정하진 말고.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성질대로 윤태희를 두들겨 팬다면 이 서럽고 억울한 기분이 나아질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재겸은 차라리 윤태희와 시원하게 치고받고 싸우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재겸이 윤태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제대로 판 깔아 줄 테니까, 불만 있으면 덤비라고, 이 씹새끼야.”
멈칫 굳었던 윤태희는 별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재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윤태희는 고개를 내리며 픽,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그건 안 되겠는데….”
윤태희는 뒷짐을 푸는가 싶더니, 눈썹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일단… 맨주먹으로는 널 이길 자신이 없어. 나는 애초에 지는 싸움은 안 하는 편이라. 승산이 확실하지 않은 싸움은 가능한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그리고….”
잠시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너랑 나, 둘 다 다치면 손해가 너무 커.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네가 다치는 건 싫거든. 누구 하나 다쳐야 한다면 내가 다칠게. 맞을 테니까, 그냥 때려.”
“…….”
재겸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또다. 너는 또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이미 여러 번 다쳤다. 잠시 낯을 굳혔던 재겸이 조그맣게 실소를 흘렸다.
‘그럼 내 생일은 오늘로 해야겠다. 네가 나랑 외식해 주니까.’
‘누구는 감히 손도 못 대는데.’
‘너 신경 쓰는 일이 내가 할 일이야.’
‘귀하게 모신 분이니 귀하게 대해 주세요.’
너는 항상 그런 식이다. 이상한 소리를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마치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방심을 하게 만들어 놓고는, 한순간에 더럽고 악취 나는 진창으로 처박아 버리는 것이 윤태희의 방식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뭐든지 받아 줄 것처럼 구는 건, 속내를 감추고 나를 생각하고 위해 주는 척을 하고 있는 거다. 전부 시늉이고 꾸며 낸 것이며, 나는 또 속은 거다. 이 이상 윤태희에게 휘둘릴 순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예 이김에 확실하게 갈피를 잡아야만 했다. 그러면 헷갈릴 일도, 기대하고, 실망할 일도 없을 테니까. 더는 너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네 눈에는 내가 등신으로 보이냐?”
재겸이 한 발자국 다가서며 윤태희의 멱살을 잡았다. 그대로 멱살을 끌어당기니 윤태희는 힘을 주는 대로 순순히 딸려 왔고, 향수 냄새도 따라왔다.
“덤벼.”
재겸이 경고하듯 낮게 말했다.
“…싫은데.”
윤태희가 조용히 대꾸했다.
“덤비라고.”
재차 쏘아붙이며 멱살을 강하게 쥐었으나, 재겸을 바라보는 윤태희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전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은 팽팽했다. 마치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재겸은 이상한 오기를 느꼈다. 멱살을 잡았던 손을 확 풀었다. 먼저 물러난 것은 재겸이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
재겸이 한 발짝 물러섰다. 저돌적인 눈빛이었다.
“같은 말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그 말과 동시에 재겸이 손을 들더니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그 순간 윤태희의 낯이 매섭게 굳어졌다. 귀기를 실어서 때린 탓에 입 안이 터졌다. 통증에 미간을 찡그렸던 재겸이 고개를 옆으로 틀더니 피인지 침인지 퉤, 뱉었다. 그걸 본 윤태희의 눈매에 단번에 힘이 들어갔다. 내내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던 윤태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재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재겸이 윤태희의 손을 뿌리쳤다.
“네가 덤비면 될 일이야.”
형형한 눈이었다. 윤태희는 순간 말을 잃었다. 다치게 하기 싫다는 이유로 싸움에 응하질 않으니 지금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오는 무모하고 대담한 기질. 당황한 윤태희가 그대로 멈춰 있으니, 재겸은 두 번 말하는 대신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제 자신을 향해서였다. 어떻게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엔 윤태희가 한발 빠르게 손목을 강한 힘으로 틀어쥐고 버티는 탓에, 재겸은 스스로를 때리지 못했다.
“…그만해.”
윤태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재겸은 들은 척도 않고 그대로 윤태희를 밀쳤다. 그러나 윤태희는 아까와 다르게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나머지 손까지 붙잡아 왔다.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악력이었다.
“놔!”
양쪽 손목을 붙잡힌 재겸이 거세게 몸부림치며 손목을 잡아빼려고 했다. 그러나 윤태희는 끈질겼다. “그만하라고 했어.” 화가 난 재겸이 있는 힘껏 윤태희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비틀대던 윤태희가 화단 안쪽으로 넘어졌다. 재겸의 손목은 여전히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 덕분에 재겸도 윤태희를 따라서 끌려가듯이 우당탕 화단으로 넘어졌다.
화단에 넘어진 후로도 둘의 힘겨루기는 이어졌다. 벗어나려는 힘과 붙잡으려는 힘이 과격하게 충돌했다. 풀밭을 구르며 엎치락뒤치락 과격하게 뒤엉켰다. 그사이, 잔디는 찌그러지고 꽃들이 등에 마구잡이로 짓이겨졌다.
“그러니까 덤벼, 쳐 보라고! 이 씨발 새끼야!”
둘은 마치 싸움에 서툰 소년들처럼 열에 달뜬 몸싸움을 벌였다. 어둑한 풀밭을 뒹구는 동안 반듯하던 슈트는 구겨졌고, 머리칼도 잔뜩 헝클어졌다. 간간이 돌부리에 스쳐 생채기도 생겼다. 주먹질만 안 한다 뿐이지, 개싸움 수준이었다. 부딪치고 넘어지며 조금씩 다치고 있었다.
“이거 놔!”
재겸은 마침내 윤태희의 손을 떨쳐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재겸은 곧바로 윤태희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윤태희를 향해 화풀이를 하듯 손에 잡히는 것들을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왜… 왜 못 때려, 왜! 네가 뭔데!”
쥐어 뜯긴 잔디와 흙, 쪼개진 나무 조각, 자잘한 돌멩이들이 윤태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헉헉거리던 재겸이 흐트러진 숨결로 소리쳤다.
“피하지 말고 덤비라고, 이 비겁한 새끼야!”
그 순간, 윤태희는 무언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윤태희는 재겸의 셔츠 깃을 확 잡아챘다가, 그대로 바닥에 냅다 패대기를 쳤다. 전에 없이 아주 과격하고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쿵!
거칠게 넘어졌던 재겸이 작게 신음하며 땅을 짚을 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다가온 윤태희가 그대로 재겸의 멱살을 단숨에 잡아 올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윽….”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강한 힘이 몸을 쑥 끌어당겼다.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 재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살갗에 귀기를 덧댔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가온 것은 주먹이 아니었다.
잡아먹을 듯한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