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귀신을 물리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강제로 사멸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을 풀어 주어 제 발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원을 풀어 준다는 것은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나자들은 당연히 전자를 선호하였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대부분의 나자들은 귀신을 혐오하고 적개심을 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귀신이 가진 원한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굳이 수고롭게 귀신의 입장을 헤아리고 위해 줄 이유가 없었다.
“왜 여기에 있어?”
그러나 윤태희는 여느 나자들과는 다른 면이 있어서, 귀신과 충돌하기에 앞서 넌지시 사연을 묻고는 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들을 윤태희는 곧잘 궁금해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고 해원(解寃)을 해 줄 수 있는 성질의 사연이라는 판단이 들 때는 사멸을 잠시 미뤄 줄 때도 있었다.
“…….”
바닥에서 솟아난 지박령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지박령은 귀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윤태희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시멘트벽에 몸을 쿵, 쿵, 부딪치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란 말이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벽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건물이 흔들렸다. 한곳에 붙박인 지박령의 특징은 습관적으로 한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작업 중이던 인부들을 저런 식으로 밀쳐 버린 듯했다.
지박령에게서 악의 서린 귀기가 위협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지박령은 대화에 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침입자의 출현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무겁고 찐득한 기운을 느낀 나자들이 얼굴 근처로 팔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구길 때였다.
한쪽에 쌓여 있던 벽돌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지박령의 소행이었다. 벽돌 무더기가 윤태희를 향해 꽂히듯 날아들었다. 어, 어어, 아무래도 내가 막아 줘야…. 뒤쪽에 물러나 있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리던 순간이었다. 한발 빠르게 윤태희가 부채를 휘둘렀다. 그러자 투포환처럼 날아들던 벽돌들이 잘게 깨지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대로 굳었던 재겸은 허공에 내밀었던 손을 쭈뼛쭈뼛 거뒀다.
“얘기나 들어 줄까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윤태희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사람에게 해를 입힌 귀신은 사멸이 원칙이었다. 그래도 사연 정도는 들어 볼까 했으나, 원치 않는다면야 어쩔 수 없다.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지.”
윤태희가 착, 부채를 접더니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그러자 부채에 실려 있던 귀기가 둥근 부메랑의 형상으로 떨어져 나갔다. 살벌한 광풍이 몰아닥치며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식간에 벽 한 면이 싹 날아갔다.
휑하니 떨어져 나간 벽을 등지고 서 있던 지박령은 망부석처럼 쿵, 쓰러졌다. 바들바들 경련하며 기이한 신음을 냈다. 지박령은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재겸은 의아해졌다. 옆에 선 강이빈에게 슬쩍 물었다.
“저 부채요, 특별한 힘이 있는 무기예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강이빈이 재겸을 돌아보았다.
“응? 저거? 저 부채는 원귀를 포획할 때 쓰는 제구야. 저 부채 안에 원귀를 가둘 수 있거든. 그밖에 특별한 용도는 없어. 근데 수, 아니. 이매 쒸는 따로 무기 들고 다니기 귀찮으시다고, 웬만하면 저걸로 해결 보시더라구.”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겼다.
“그럼 저 귀신은 왜 저렇게….”
“아, 저건 귀기에 맞아서 그래.”
귀기를 다룬다는 것은 대체로 무기나 도구에 귀기를 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귀기를 실어서 그 효과를 끌어내고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순수하게 귀기 그 자체만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 아주 어려웠다.
재겸은 그것이 가능했다. 언젠가 귀기만으로 서점 유리창을 깨부수고, 귀기로 윤태희의 목을 겨눴던 것이 그랬다. 그리고 귀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건 재겸뿐만이 아니었다. 윤태희는 귀기만으로 지박령을 제압했다.
귀기의 여파로 건물 외벽까지 통째로 뚫려 나가 바깥이 훤히 내다보였다. 일전에 산에서 제구부 나자들이 그러했듯이 잔재주를 부린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저 부채로 무언가 꼼수를 부렸겠거니 했는데, 부채 선 모양을 본떠서 순수하게 귀기만 날렸을 뿐이란다.
단순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부치는 방식이 아주 의외였다.
“이매 쒸처럼 귀기가 강하면, 귀기 그 자체가 무기인 셈이야.”
강이빈이 막내를 위해 세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매 쒸는 귀기만으로도 물리적인 힘을 쓸 수 있으니까. 손은 안 댔어도 졸라 쎄게 한 대 때린 거라고 생각하면 돼. 뭐, 저런 지박령 정도야 완전히, 그냥 껌이라고 봐야지! 이해했어?”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긴 했다.
재겸이 얼떨떨한 얼굴로 윤태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법 쓸 만하다고 자부하던 말이 영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 보니, 그때 산에서 내가 쏜 화살을 몇 번이고 튕겨 냈었지… 윤태희는 생각 이상으로 훨씬 괜찮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재겸은 안도하는 한편 내심 놀랐다. 게다가 평소엔 고상하게 굴면서, 이렇게 보니 손길이 과격한 편인 듯 하고….
“어후, 완공일 한참 늦춰야겠는데요.”
나자들은 그런 윤태희의 모습에 익숙한 듯했다. 나자들이 너스레를 떨자 윤태희가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건물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맞다. 건물을 망가트렸으니 뒷수습을 하려면 꽤나 골치가 아플 것이지만, 어차피 본청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었다.
“너무 세게 갔다. 피곤해서….”
윤태희가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복귀 이후 며칠째 눈만 붙이는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다. 밀린 일이 많아서였다. 짧게 토막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비해 귀기 컨트롤이 느슨해졌다.
윤태희가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지박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칠접선을 활짝 펼치더니 미리 받아 온 부적을 붙였다. 부적이 붙은 칠접선으로 지박령의 이마를 톡 쳤다. 그러자 지박령이 부채 안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새하얀 헝겊을 덧대어 만든 부채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윤태희는 부채를 탁 소리가 나도록 접었다. 그와 동시에 지박령의 기운이 뚝 끊겼다. 수선스럽던 건물 안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윤태희는 접힌 부채를 가볍게 잡아당겨 보았다. 여태껏 잘만 펼쳐지던 부채는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았다. 꽉 다물린 그대로였다. 귀신을 제대로 가뒀는지 확인한 윤태희는 칠접선을 표지호에게 넘겨주었다.
“상황 종결됐습니다.”
표지호가 부채를 처리하는 사이, 강이빈은 본청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다. 간단히 상황 보고를 한 뒤, 정화부에 흉신터의 정화와 현장 뒷수습을 부탁했다. 괜히 윤태희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던 재겸은 일부러 들으란 듯이 흠, 하고 목을 울렸다. 윤태희가 재겸을 돌아보았다.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흠?” 하고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러자 재겸이 마치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가, 마지못해 다시 소리를 냈다.
“흠…!”
잘은 모르겠지만 꽤 하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김 수습을 환영하는 면신례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나자들은 종로1가 인근의 번화가로 향했다. 면신례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뒤풀이야말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었다. 술집이며 밥집이며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은 퇴근한 직장인들로 저녁의 활기가 넘쳤다.
축역부 제1팀이 자리를 잡은 곳은 화로구이 고깃집이었다. 시끌벅적한 가게 안은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거의 만석이었다. 동그란 테이블마다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탈을 벗은 나자들은 일견 여느 테이블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직장인 무리처럼 보였다.
어쩌다 보니 재겸과 윤태희는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인원이 아홉 명이나 되는 관계로 나자들은 테이블 두 개를 붙여서 앉은 상태였다. 재겸은 윤태희의 옆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나마 편한 사람이 윤태희였으므로. 그러나 윤태희의 뒤를 졸레졸레 쫓아가는 도중에 강이빈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강이빈이 “재겸이! 이리 와, 누나 옆에 앉아.” 하며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앉게 되었다.
사실 재겸은, 당연히 윤태희가 먼저 제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강이빈의 손에 끌려가는 재겸을 봐 놓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안쪽 자리로 들어갔다.
“…….”
재겸은 이마를 긁적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왁자지껄한 가게 안, 고기가 익어 가는 자욱한 연기, 흥에 취한 얼굴들, 이따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
회식하는 풍경은 티비 드라마를 통해 자주 본 장면이어서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하는 것은 처음이라 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쩐지 눈앞의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둘러봐도 이상하고 신기한 것들투성이였다. 그러다 직원이 활활 불타는 화로를 들이밀어서 재겸은 화들짝 놀랐다. 불판 위에서 매달린 저 이상한 나팔은 또 뭔가 싶었다.
윤태희의 옆에 앉았으면 저 나팔은 뭐냐고 슬쩍 물어나 봤을 텐데….
그래서 나팔의 쓰임새는 무엇인고. 결국 재겸은 홀로 고민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