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윤태희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백화점은 처음이라, 재겸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이며 바닥이며 온통 빤딱빤딱한 광택이 흘렀다.
“야. 뭐 사러 온 건데?”
“응, 슈트. 너 입을 거.”
슈트가 머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윤태희는 아주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행선지를 익숙하게 꿰고 있는 것을 봐서는 백화점에 자주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하자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귀를 움켜쥐었다. 웅,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귓속이 멍멍해졌던 것이다.
“뭐야….”
재겸이 당황하며 벽에 붙은 봉을 붙잡았다. 티비에서 자주 보긴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직접 타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고 소리없이 웃었다.
“침 삼켜 봐.”
윤태희가 입가를 톡톡 가리켰다. 윤태희의 말대로 침을 삼키자 갑자기 귓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와… 신통하네…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일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뒷면이 투명한 창이라 건물 바깥이 훤히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으아 씨, 깜짝아!”
그냥 벽인 줄 알고 뒤쪽에 붙어 서 있던 재겸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펼쳐지니 기절초풍이었다. 마치 벌레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던 재겸이 후다닥 윤태희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도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윤태희가 웃으며 재겸의 팔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놀랐어?”
눈을 댕그랗게 떴던 재겸이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야. 나도 티비에서 다 봤어.”
“응?”
“촌뜨기라고 무시하지 말어라.”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때, 지상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어느 한 층에서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오자 재겸이 움찔하며 벽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을 잡아 당겼다.
“이리로….”
밀려드는 인파에 뒤쪽으로 휩쓸릴 뻔했던 재겸이 엉겁결에 윤태희의 품으로 끌려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은 흡사 콩나물시루와도 같았다. 어느새 서로의 몸이 바짝 붙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윤태희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향수의 잔향이 뒤섞인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재겸의 낯이 살짝 굳었다. 잡힌 손목을 빼내고 상체를 뒤로 물릴 때였다. 뒤쪽에서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잠시만요.” 원하는 층 버튼을 누르지 못한 모양인지, 누군가가 양해를 구하며 몸을 기울였다. 낑긴 사람들이 덩달아 떠밀렸다.
간신히 윤태희와 거리를 벌려 놓은 참이었다. 뒤에서 밀어 대니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아졌다.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있던 윤태희가 손을 들어 재겸의 뒷뒤통수를 감싸더니 그대로 제 쪽으로 당겼다. 재겸은 결국 윤태희에게 제 어깨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머리 만지지 마.”
내내 말이 없던 윤태희가 물었다.
“샴푸 뭐 써?”
귓가가 간지러워서, 재겸이 눈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몰라.”
“그래.”
윤태희는 고개를 숙여 코끝으로 재겸의 머리칼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물론 재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빨리 내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윤태희와 재겸은 남성 정장이 모여 있는 명품관에서 내렸다. 브랜드별로 매장이 나뉘어있고, 각잡힌 슈트를 입은 마네킹들이 눈에 띄었다. 넓은 층을 가볍게 훑어보던 윤태희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윤태희와 나란히 걸으며, 재겸은 곁눈질로 주변을 구경했다. 복작하던 엘리베이터 안과는 달리 정제된 듯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일단 한적해서 좋았다.
원하는 매장을 찾아낸 윤태희가 재겸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옷 좀 보려는데….”
직원이 다가오자 윤태희가 예의 바르게 묵례를 했다. 둘이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동안 재겸은 입구에 선 마네킹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태희가 손짓을 했다.
“나리야.”
재겸이 샐쭉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지 마.”
재겸의 사이즈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오던 남직원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생 분이신가 봐요, 별명이 귀엽네요.”
직원의 말에 재겸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저 동생 아닌데요.”
“네, 네…?”
직원은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닮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재겸이 앳되어 보이기도 하고 남성 둘이 왔으니 직원 입장에선 나름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게다가 윤태희가 입에 담은 별명이 막내야, 애기야, 처럼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 다정하게 들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겸은 단칼에 반박하며 질색을 했다.
“아, 형제분인가 해서….”
곁에 서 있던 윤태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소년은 요령이 없었다. 윤태희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직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그러시군요….” 할 때였다.
“제 쪽이요.”
윤태희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윤태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직원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네?” 그에 윤태희가 말했다.
“제가 더 어려요.”
제 쪽이 동생이라고, 윤태희는 말했다. 그에 살짝 당황한 재겸이 뭐라 입술을 달싹이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윤태희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재겸을 돌아보았다.
“그쵸, 형?”
직원이 벙 찐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
뒤늦게 재겸이 낯을 살벌하게 굳혔다. 이젠 하다 하다, 뭐? 형? 재겸이 미간에 힘을 주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재겸은 눈으로 욕을 하는 중이었다. 윤태희의 얼굴은 진지했지만 눈매에선 장난기가 꿀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직원이 황급히 미소를 장착했다.
“에이, 농, 농담이시죠?”
윤태희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뇨. 형이 좀 동안이에요. 아니, 좀이 아니라 심각하게….”
참다못한 재겸이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은밀히 팔꿈치로 찍었다. 살벌하게 얻어맞은 윤태희가 옆구리를 감쌌다. 그러면서도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윤태희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혹시 맞는 걸 좋아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대체 뭘 처먹길래 패고 싶은 짓만 골라서 하나.
“미쳤냐? 누가 네 형이야? 까불지, 또.”
재겸이 씨근덕거리며 낮게 속삭였다.
“틀린 말 했나? 내가 더 어리잖아.”
윤태희가 능청스레 대꾸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저렇게 덩치 크고 키 크고 주둥이만 살아서 약 올리는 동생은 둔 적도 없고, 두기도 싫다. 작고 소중한 메산이라면 모를까. 윤태희가 형이라고 부르니 소름이 쫙 돋는다. 언제는 친구에, 나으리에, 이번엔 형이란다. 윤태희는 순 제멋대로 호칭을 바꿔 댔다. 생각해 보면 저 녀석은 처음부터 항상 늘 자기 멋대로 굴었다.
“그만하랬지. 이번엔 진짜로 맞는다.”
“나 방금 여기 진짜로 맞았는데….”
“갈비뼈 나가기 싫으면 조용히 하라고.”
“…….”
윤태희가 갑자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뺨 한쪽에는 여전히 옅은 볼우물이 남아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윤태희는 능숙한 손길로 옷을 골랐다.
“별로.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여.”
재겸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쇼핑에 큰 관심도 없거니와, 옷이나 신발은 항상 정주가 알아서 사다 줬기 때문에 직접 봐도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게다가 정장이라면 더더욱. 일평생 입어 본 적도 없는 종류의 옷이었다.
윤태희는 이따금 옷걸이를 꺼내서 그대로 재겸의 몸에 받쳐 보기도 했다. “아무거나 갖다 대도 다 잘 받으시네.” 그건 정주도 가끔 하는 얘기였다. 재겸은 단정하고 곧은 체격에 어깨가 일직선으로 뻗어서 눈대중으로 대충 주워 입혀도 옷태가 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겸은 따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굳이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때, 재겸이 불쑥 물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나랏일 한다는 곳은 대개 융통성이 없고 보수적이거든.”
되도 않는 격식 차리는 거지. 윤태희가 옷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태평한 투로 말했다. 나자가 된다는 것은 업무만 다를 뿐, 크게 보면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무 수행을 표방하는 국가 기관인만큼 수직적인 분위기에 형식과 절차를 중요시했고, 당연히 복장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게 따지면 갓 쓰고 한복을 입는 게 맞지 않냐?”
재겸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에 윤태희가 작게 웃었다. 엉뚱하긴 하지만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옷을 고르던 윤태희가 재겸을 바라보며 넉살 좋게 한 수 거들었다.
“그럼 구두 대신에 짚신 신고 다녀야겠네.”
짚신… 재겸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응. 비 올 땐 나막신.”
“자동차 대신에 가마 타고 다니고.”
“아니면 말 타거나.”
윤태희가 장난스레 이어받았다.
“가방 대신에 지게 메고 다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던 재겸이 피식 웃었다.
“지게? 지게를 왜 메냐, 멍청아.”
요즘 사람들이 지게를 메고 다니는 상상을 하니까 아주 웃겼다.
“그건 농사하고 나무 할 때나 메는 거고, 보통은 봇짐을 메겠지.”
“아. 그렇네.”
윤태희가 흐트러진 웃음을 흘렸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그렇게 잠시 웃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웃음기가 다 떨어졌다. 문득 침묵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웃다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분위기가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그때, 때마침 직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고개를 까딱하더니 “네. 이걸로.” 하며 미리 골라 둔 옷을 가리켰다. 적절한 때에 끼어들어 준 덕분에 어색한 기류를 떨쳐 낼 수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재겸은 떠밀리듯 탈의실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