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5)화 (85/348)

#85

텅 빈 복도에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가?”

윤태희는 얼빠진 표정으로 굳어 버린 도나영과 합격자들을 뒤로 한 채, 재겸의 손목을 잡고 제1회의실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재겸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 윤태희가 이끄는 대로 졸졸 끌려가고 있었다.

별관 복도를 오가던 나자들이 의아한 눈으로 윤태희와 재겸을 힐끔거렸지만 별다른 아는 척은 해 오지 않았다. 윤태희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다. 탈을 쓰고 오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 일일이 붙들리며 귀찮게 인사를 받았다간 걸음이 늦어질 것 같아서 맨얼굴로 입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윤태희는 대꾸도 없이 시원스레 보폭을 유지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재겸은 혹여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다시 물었다.

“야, 묻잖아. 어디 가냐니까….”

“단둘이 있을 곳이라면 어디든?”

윤태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는 거야. 영양가 없는 대답에 재겸이 슬쩍 눈을 찡그릴 때였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윤태희는 빈 소회의실을 찾아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재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불 꺼진 소회의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마주 선 둘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끝에 윤태희가 긴 팔을 뻗어 벽을 느리게 더듬었다. 달칵, 스위치를 켜자 아담한 회의실 내부가 환해졌다. 윤태희가 길쭉한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앉더니, 손바닥으로 제 옆을 가볍게 두드렸다.

“앉으세요.”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멀뚱히 선 재겸에게 고갯짓을 했다. 장난스러운 존대에 재겸이 샐쭉 눈을 흘겼다. 잠시 크로스 백의 끈을 만지작거리던 재겸이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라앉았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얼굴 보는 거.”

윤태희가 몸을 틀어 시선을 빤히 부딪쳐 왔다. 머리를 올려서 그런가? 뭔가 오늘따라 느낌이 좀 다른데.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재겸은 괜히 정면을 응시했다.

“오랭테이션인가 뭔가, 그거 한다고 했잖아. 근데 이렇게 나와도 돼?”

“아, 오랭테이션…. 그건 수석님이 직접 일대일로 해 드릴 예정입니다.”

윤태희가 작게 웃으며 대꾸하자, 재겸이 눈가를 구기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했다. 윤태희는 ‘쑤석님’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윤태희는 평소 직급에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고, 자신의 위치를 크게 의식하고 있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신경한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굳이 재겸의 입을 빌어 대리로 소개를 맡긴 것은 노골적인 메시지가 포함된 행동이었다.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내가 이 사람의 뒷배이며, 이 사람은 나의 후임이라는 것을 포고한 셈이다. 이후 얘기가 퍼져 나간다면 그 누구라도 재겸을 함부로 대할 리는 없을 것이므로.

오늘처럼 하찮은 날파리가 맴도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팠어?”

윤태희가 불쑥 손을 뻗어 재겸의 머리를 건드렸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재겸이 작게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얼얼하긴 했지만 통증은 거의 가라앉은 참이었다. 황승수의 귀기는 투박하고 서툴렀기에 내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약간 부어오른 정도였다.

“치료실 가서 얼음찜질이라도 하는 게 좋겠어.”

재겸이 고개를 옆으로 훽, 기울여 윤태희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됐어. 이제 안 아파.”

“왜 가만히 있었어?”

윤태희가 군말 없이 손을 거두며 물었다.

“네가 첫날이니까 튀지 말라고 했잖아.”

“옷부터 엄청 튀는데?”

윤태희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옷이 튄다고? 이게 왜 튀어? 뜬금없는 말에 재겸이 멀뚱히 시선을 내려 노란색 맨투맨을 잡아당겨 보았다.

“옷이 왜? 정주가 이렇게 입으랬어.”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옷까지 골라 줄 정도면 아주 돈독한 사이인가 봐.”

“난 밖에 잘 안 나가니까. 정주가 많이 도와줘.”

그래…? 윤태희가 곰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옷 이상한 거야?”

“아니, 개나리 같고 좋은데.”

개나리? 어감이 왠지 욕 같은데… 재겸이 눈꼬리를 세우고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의외야.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분인 줄 몰랐네.”

윤태희는 걷어붙인 소매를 정리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개소리만 아니면 난 원래부터 말 잘 들었어.”

“…….”

윤태희가 조용히 눈썹 끝을 매만졌다. 왠지 내가 여태껏 개소리를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무튼, 오늘 잘 참았어.”

나직한 칭찬에 재겸이 대꾸 없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속삭이는 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몹시도 다정했다.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황승수의 뺨을 후려갈기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나기만 하면 날을 세우고 싸우기 바빴다. 하지만 여태 만난 이래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평화로운 대화를 주고 받은 적이 있나 싶다.

“골드 패스 받았다면서?”

“응… 별거 아니던데.”

“역시 우리 나으리세요.”

재겸은 시선을 내린 채, 말없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누구는 감히 손도 못 대는데 남이 손대니까.’

‘그나저나 어쩌죠. 나 아직 화가 덜 풀렸는데.’

윤태희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데… 오늘따라 헷갈리는 느낌이었다. 자꾸 저 미소가 진짜처럼 보이려고 한다. 왜지? 앞머리를 올려서 그런가? 이상하게 적응이 되질 않는다. 재겸은 정면을 응시하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근데 너 왜 나섰어?”

“응?”

“왜 끼어들었냐고.”

눈을 굴리던 윤태희가 장난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나으리께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어서?”

재겸이 여전히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내가 해도 됐거든. 씨발 뒤지게 패 줄라고 했어.”

“그래, 그럴까 봐 그랬어. 누구 하나 실려 나갈까 봐.”

윤태희가 픽 웃으며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에 재겸은 어째선지, 살짝 김이 빠졌다. 뭐냐. 결국은 일이 크게 번질까 봐 나섰다는 말처럼 들렸다. 황승수는 윤태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아주 반 죽여 놓으려고 했는데….

“앞으로 또 누가 건들면 나한테 일러.”

윤태희의 말에 재겸은 눈을 흘겼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이르긴 뭘 일러. 그랬다간 황승수랑 똑같은 그릇이 되는 꼴이다. 윤태희가 제법 좋은 감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다. 아까 전에 ‘윤태희 수석님’의 정체를 알렸을 때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했으니까. 얼굴은 모를지언정 그 이름이 가진 명성이 드높다는 건 대충 체감했다.

“너 신경 쓰는 일이 내가 할 일이야.”

작게 웃던 윤태희가 걷어붙인 소매를 정리하며 여상히 대꾸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서 어렵게 모신 분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지? 게다가 역모의 첫 단추까지 성공적으로 끼워 주신 마당에. 이제 시작인데.”

나례청에서 윤태희는 꽤나 평판이 좋았다. 여태껏 윤태희를 언급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부 윤태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회의실에서 보여 주었던 살벌한 면모에 대해 합격자들이 말을 옮긴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쉬이 믿지 않을 것이었다. 윤 수석은 다정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

재겸은 말없이 크로스 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역모의 첫 단추.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현실감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맞다. 나는 윤태희의 역모에 가담하여 나례청을 부수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온 거다. 나는 윤태희를 이용하고, 윤태희는 나를 이용한다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익숙해져야 한다.

정면을 향하던 재겸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와 눈을 마주쳤다.

“알았으니까, 오랭테이션인가 뭔가, 그거나 해.”

무뚝뚝하게 흘러나온 말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쑥 들어 올렸다. 대화에 서려 있던 온기가 갑자기 미지근해진 느낌이었다. 우리의 목적 의식에 충실해지자는 듯이. 물끄러미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느리게 말했다.

“그건 딱히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당장 그거 말고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는데?”

쌀쌀맞은 대꾸에 윤태희가 웃었다.

“많지. 우리 할 일이 태산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우선은….”

잠시 고민하던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쇼핑?”

***

“여기가 어디야?”

재겸은 뾰로통한 얼굴로 조수석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이곳은 시동이 멈춘 윤태희의 차 안이었다. 본청을 빠져나온 것은 약 30분 전이었다.

“백화점이에요.”

윤태희가 정중하게 대꾸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윤태희는 필요한 물건부터 사자며 자신의 검은색 세단으로 재겸을 안내했다.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한 재겸을 조수석에 앉히고 곧바로 차를 몰았다. 차는 미끄러지듯 달려 어느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실까요.”

재겸은 안전벨트를 풀고 곧바로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으니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윤태희는 뒷좌석에 벗어 둔 슈트 재킷을 걸치고 차에서 내렸다. “나리야, 이쪽으로 와.” 쿱쿱한 지하의 냄새를 킁킁거리던 재겸이 딴청을 피우듯 어슬렁거리며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와 본 적 있어? 백화점.”

“아니….”

윤태희는 건물로 들어서는 유리문을 열고, 신사처럼 예의 바르게 손짓을 해 보였다. 재겸은 시큰둥한 얼굴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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