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2)화 (82/348)

#82

합격자들은 앞쪽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시험에 지쳤을 합격자들을 위해 일부러 쉴 틈을 만들어 준 듯 했다. 합격자들은 비로소 숨을 돌리고 휴식을 취했다.

모두들 긴장이 싹 풀린 상태였다. 이어지는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나름 안면이 생겼는지라, 1단계 때만 해도 딱딱하고 서먹했던 분위기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합격자들은 개별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했다.

그때, 눈이 길게 찢어진 남자가 일어나더니 목소리를 냈다.

“어, 여러분들? 시간도 남는데 서로 인사나 할까요?”

그의 이름은 황승수였다. 황승수는 마치 사회자라도 되는 것처럼 스크린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 앞에 나서고 상황을 주도하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황승수가 미소를 지으며 합격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자주 볼 사이잖아요. 각자 돌아가면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라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다들 괜찮으시죠?”

황승수는 회의실 안의 기류를 단숨에 휘어잡았다. 합격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판을 벌여 준다면 얹혀 가는 입장에서야 편했다. 친화력이 좋은 탈색남은 “좋아요우!” 하며 크게 호응까지 했으나 딱 한 명, 재겸만은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표정으로 무관심하게 앉아 있었다. 황승수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저부터 할게요. 저는 황승수라고 하고요. 추천 입청자예요. 제 친형이 축역부 선임으로 있어요. 뭐, 그래서 저도 당연히 축역부 지망하고 있네요.”

황승수는 첫 타자를 자처하여 자기소개를 끝낸 뒤 손짓을 했다. “시계방향으로 쭉 돌죠.” 황승수의 리드에 따라, 옆에 앉아 있던 합격자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제 이름은 노병준입니다.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정화부 지망이에요.”

노병준이 소개를 끝내자, 누군가 눈치를 보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다른 합격자들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노병준이 자리에 앉았다. 그에 다음 사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저기, 병준 씨!”

황승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 저요?”

“초라니 출신이세요?”

“아, 네. 맞아요.”

“아아, 그렇구나.”

황승수가 우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황승수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합격자들은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이어 나갔다. 어떤 이는 황승수처럼 제 입으로 출신을 밝히는가 하면, 노병준처럼 출신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출신을 언급하는 건 그저 선택 사항일 뿐이었다. 그러나 황승수는 누군가 출신을 말하지 않고 소개를 끝내면 그때마다 토를 달듯이 질문을 던졌다.

“세민씨. 추천받아서 입청하셨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2단계에서 쇠공 뽑으시길래.”

“아. 네.....”

“현송 씨는요? 초라니? 추천 입청자?”

“음. 저는 초라니 출신이에요.”

“아, 맞다. 3단계에서 살짝 위험했죠?”

화기애애하던 점차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일일이 출신을 확인하는 의도가 어딘지 속물적이었다. 마치 편을 가르고 등급을 매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이 학연이나 지연을 걸고넘어지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추천 입청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황승수와 마찬가지로 나자들과 혈연인 경우가 많았다. 피를 물려받아 재능이 탁월하기도 했고, 가족 중에 나자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귀기 다루는 법을 익혔다든가, 이쪽 바닥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능통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으로, 쌩판 남남인 경우도 있었다. 재겸이 그렇듯이.

황승수는 저와 같은 추천 입청자를 보면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혹시 누구 추천이에요?”, “아, 제구부 신 주임님? 저희 형이랑 동기예요.” 하며 노골적으로 아는 척을 해 댔고, 초라니 출신자에게는 “귀기를 다룰 땐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해요.”, “귀감을 열려면 명상을 해 보세요.” 하며 한마디씩 조언을 덧붙였다.

초라니 출신들은 서서히 불쾌함을 느꼈다.

어느덧 탈색남이 인사할 차례가 되었다. 황승수는 탈색남 앞에 멈춰 서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탈색남이 마지못해 몸을 어정쩡하게 일으켰다.

“저는 임효문이고요, 암행부 지망입니다.”

“효문 씨, 혹시 초라니 출신이신가?”

어김없이 황승수의 질문이 따라붙었다. 탈색남은 짝다리를 짚은 채,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황승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돌적인 눈빛이었다.

“저기요, 그거 대체 왜 물어보는 거예요?”

탈색남은 못마땅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네? 그냥요, 궁금해서 그렇죠.”

“그러니까 왜 궁금하냐고요. 출발선만 다르지, 어차피 다 같은 1차 합격생인데 굳이 따져 대는 저의가 뭔데요? 유치하게 진짜. 나잇값 좀 합시다.”

탈색남이 짜증스러운 투로 받아쳤다. 탈색남은 평소엔 유순하고 활달했지만, 약간의 다혈질 기질이 있는 편이었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졌다. 내내 빙글빙글 미소를 머금고 있던 황승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황승수가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는데….”

“그래요? 그럼, 뭐. 대답 안 합니다.”

탈색남이 껄렁하게 대꾸하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 앞에서 면박 아닌 면박을 입은 황승수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하, 불편하시면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모처럼 동기 간에 서로 알아 가자는 건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시지? 혹시 자격지심 있으신가?”

황승수는 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무념무상으로 앉아있던 재겸이 슬쩍 눈을 들었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때, 탈색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너 다시 말해 봐.”

“뭐요? 야아? 너어?”

황승수가 험악한 얼굴로 성큼 다가섰다.

“이 양아치 새끼가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존댓말 듣고 싶으면 나잇값을 처하시든가.”

황승수는 탈색남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탈색남도 지지 않고 손을 뻗어 황승수의 멱살을 잡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합격자들이 당황하여 숨을 들이켰다.

“너 초라니지? 정곡 찔렸나 보네?”

황승수는 조롱하듯이 말끝을 올리며 탈색남을 밀쳤다. 길쭉한 테이블이 사선으로 밀리며 우당탕, 소리가 났다. 탈색남의 눈빛이 일변했다.

“하, 이 새끼 봐라?”

탈색남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얼어붙어 있던 합격자들이 그만하라며 황급히 둘을 말리기 시작했다. 재겸은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상황을 관전 중이었다.

조용하던 회의실 내부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덕분에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기척 없이 들어왔는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의실 뒤쪽은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두웠다.

장신의 인영은 신입들의 소란을 말릴 생각은 없이, 맨뒷줄의 의자를 꺼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마치 누구를 찾는 듯하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우리 나리가 개나리 옷을 입었네.”

시끄러운 회의실 안, 웃음기 어린 혼잣말은 소리 없이 묻혔다.

***

“어어, 쳐 봐, 쳐. 쳐 보라고.”

“왜? 가서 형한테 이르게?”

황승수와 탈색남은 서로의 멱살을 붙들고 신경전을 벌여 댔다. 합격자들은 둘의 충돌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추천 입청자들은 황승수의 곁에, 초라니 출신들은 탈색남의 곁에 달라붙어서 싸움을 뜯어말렸다.

“저기, 진정들 좀 하세요. 네?”

“첫날부터 왜 이래요, 대체….”

황승수는 뇌까리듯 빈정거렸다.

“초라니 주제에 어디 건방지게 기어올라?”

재겸은 까칠한 눈으로 황승수를 바라보았다. 연령과 장소를 떠나서 어딜 가나 저런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무리를 나누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자신과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여기고 어떻게든 머리를 밟고 올라서려고 기를 써 댄다.

황승수의 작태를 보아하니 누군가와 겹쳐 보인다. 재겸은 태평하게 팔짱을 낀 채, 속엣말로 최상급의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주열 같은 놈일세….

재겸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고,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누구의 편을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탈색남이나 황승수나 재겸의 눈엔 나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자들의 일에 휘말리는 것도, 나자들과 필요 이상으로 엮이는 것도 사양이었다. 나는 내 할 일이나 잘하면 된다고, 재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진짜! 두 분 다 그만들 좀 하시라구요!”

그때, 합격자 중 한 명이 울컥 화를 냈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이러다가 첫날부터 문제 일으켰다고 저희까지 덤터기 쓰면 책임지실 거예요? 만약 전원 합격 취소라도 시키면!”

전원 합격 취소라도 시키면.

전원 합격 취소라도 시키면….

전원 합격 취소라도 시키면…….

귓가에 박혀 든 말이 메아리처럼 뇌리를 떠돌아다녔다. 마침내 재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아니, 이 잡놈의 새끼들이… 감히 누구 앞길을 가로막어!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의자에 퍼져있던 재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온몸에 열의가 솟구쳤다.

“그만. 야, 그만. 그만하라고.”

재겸이 탈색남의 옷을 후다닥 잡아당겼다. 그러나 나름 한 성깔 하는 탈색남은 들은 척도 않고 씩씩거렸다. 좋은 말로는 안 된다.

“야, 그만하라니까!”

재겸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탈색남의 발을 콱 짓밟았다.

“끼야악, 새끼발가락, 아악!”

탈색남이 비명을 지르며 풀썩 주저앉더니 발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황승수와 탈색남이 떨어졌다. 탈색남을 뜯어말리던 초라니 출신들이 당황한 얼굴로 “왜, 왜 그래요? 괜, 괜찮아요?” 하고 서둘러 부축을 했다.

문지방에 발을 찧은 것 같은 악랄한 고통이었다….

“칠칠아악, 왜 내 발….”

재겸이 탈색남의 등을 두어 번 톡톡 건드렸다. “됐어. 괜찮아.” 사과는커녕 의젓한 위로에, 탈색남은 아픔을 호소하는 와중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발을 밟힌 사람이 괜찮다고 해야지. 발을 밟아 놓고 괜찮다고 하면은….

일단은 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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