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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9)화 (79/348)

#79

“여튼, 내 추측은 꽃이 적게 보이면 탈락인 것 같아.”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탈색남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어느덧 순서가 돌아서 시험은 30번대까지 진행이 되어 있었다. 빨간색을 받은 응시생들은 하나같이 탈락을 예감하고 절망적인 낯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파란색을 받은 응시생들은 미소가 가득했다.

“다음. 38번 애기, 몇 송이?”

38번 응시생은 하얗게 질려 말이 없었다. 초조한 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심기정이 시니컬하게 물었다.

“혹시 꽃이 너무 많이 보여서, 아직까지 세고 있는 거니?”

38번 응시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일곱, 일곱 송이가 보입니다….”

심기정이 팔짱을 낀 채 응시생을 뚫어져라 바라볼 때였다. 차렷 자세로 서 있던 38번 응시생이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난데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지? 재겸과 탈색남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때였다.

“간지러워, 으윽, 너무 간지러워요!”

38번 응시생의 소리를 지르며 회의실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온몸에 붉은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다. 너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는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몸을 벅벅 긁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기정이 몸을 일으켰다.

보라색 입술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기야, 뻥 치면 혼난다고 했지.”

심기정이 손가락을 딱, 부딪쳤다. 그러자 38번 응시생의 번호표가 새까맣게 변했다.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검은색이었다. 번호표가 검은색으로 변하자마자 회의실이 앞문이 열리더니 피곤한 나자가 들어왔다. 나자는 후아암, 하품을 하며 회의실 안을 뛰어다니던 38번 응시생을 붙잡았다.

“38번 응시생, 1단계 실격입니다.”

나자가 피곤해하는 얼굴로 응시생을 질질 끌고 나갔다.

“…….”

“…….”

“…….”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봤지? 애기들, 뻥 치면 저렇게 된다.”

심기정이 다시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까 원샷한 물 있지? 그거 마셔서 그래. 대충 거짓말 탐지기랑 비슷한 원리라고 보면 돼. 땀, 맥박, 호흡, 혈압. 생리적인 변화가 일시에 급격하게 일어나면 두드러기가 올라오게 되어 있어. 물론, 오줌 싸면 끝이지만.”

정화부에서 공수한 액체는 각종 약초와 버섯을 우려서 만든 것이었다. 심기정의 설명에 재겸이 눈가를 구겼다. 38번 응시생은 꽃이 적게 보이자 빨간색을 받을 것을 예감하고 탈락을 피하려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시험 결과를 떠나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애기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애기들아, 너네는 지금껏 눈에 보이는 걸 보이지 않는다고 속이며 살아오지 않았니. 여기선 그러지 마라. 나자라면 배짱이 있어야지.”

심기정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자, 다음!” 시험이 재개되었다. 그에 상황을 주시하던 탈색남이 고개를 젓더니, 재겸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쩐지, 대체 뭘 믿고서 보이는 대로 말하도록 두는가 했어.”

탈색남이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응시생들 모두가 지켜보는데 훤히 결과를 보여 주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마음만 먹으면 가짜로 꾸며 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허술하진 않을 것 같았지. 이미 나름의 장치를 해 둔 거였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니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재겸이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하여튼, 나자들은….

그럴 거면 미리 말을 해 주든가. 역시 음침하다. 무슨 사람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아, 시험하는 거 맞구나… 아무튼.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재겸은 38번 응시생이 여러모로 안 됐다고 생각했다.

이후 시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번호표에 각각 다른 색깔을 받은 비율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1단계 시험에서 응시생 절반이 탈락하게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윤태희는 ‘통과 의례’라고 쉽게 단언했으나, 서툰 귀재들에겐 문턱이 꽤 높게 느껴졌다.

어느덧 순서는 돌고 돌아 재겸의 차례였다.

“자, 다음! 맨 마지막 줄 나와.”

으아. 개떨리네…. 탈색남이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끝 번호인 재겸은 탈색남의 뒤를 졸졸 따랐다. “꼭 붙자.” 정렬하던 탈색남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속삭였다. 재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77번 애기가 끝이니? 마지막 줄은 7명이네.”

심기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스크린 앞에 일렬로 선 70번대 응시자들이 한 보 전진하며 바닥에 붙여놓은 마스킹 테이프를 동시에 밟았다. 금을 제대로 밟았는지 발치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시선이 스크린에 닿는 순간이었다. 재겸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뒤에 앉아 있을 땐 하얗게만 보이던 스크린에 선명한 화질이 떠올랐다. 놀란 건 옆에 서 있던 탈색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태평하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탈색남이 빠르게 스크린을 훑기 시작했다.

“그럼, 71번 애기부터 차례대로 간다.”

심기정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턱짓을 했다.

“다 셌어? 몇 송이?”

응시생들이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송이가 보입니다.”

71번 응시생이 웃으며 말했다.

“…세 송이가 보입니다.”

72번 응시생은 고개를 숙였다.

“일곱 송이가 보입니다.”

73번 응시생은 어깨를 폈다.

심기정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번호표의 색깔이 하나둘씩 바뀌어 나갔고, 그때마다 희비가 교차했다. 마침내 76번 탈색남의 차례가 왔다. 탈색남은 벌써부터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탈색남은 대답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한, 한 송이….”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심기정이 자비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탈색남의 번호표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그에 재겸이 당황한 표정으로 탈색남을 쳐다볼 때였다. 심기정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마지막. 77번 애기.”

재겸이 흠칫하며 황급히 스크린에 시선을 던졌다. 재겸의 눈동자가 사진 속의 푸른 초원을 빠르게 스캔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똑같을 뿐이다. 눈을 비벼 보기도 하고, 꾹 감았다 떠 보기도 했지만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

재겸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가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탈색남도 눈을 들어 힐끔, 재겸을 바라보았다.

“애기야. 너도 꽃이 너무 많아서, 아직 세는 중이니?”

38번 응시생에게 농담처럼 했던 질문이, 이번엔 재겸을 향해 날아들었다.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왜 38번 응시생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살짝 알 것도 같다. 이어지는 침묵에 심기정이 손목시계를 확인할 때였다.

“꽃… 한 송이도 안 보이는데요….”

결국 재겸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꽃이 많아서 세는 중이냐고?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꽃이라고는 단 한 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봐도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들 짜고 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재겸의 대답에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여태껏 꽃이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재겸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모든 대답은 한 송이에서 여덟 송이 안에서 나왔다.

재겸은 당연히 제 눈에 여덟 송이가 보일 줄 알고 있었다. 아니면 그보다 더 많거나. 내가 눈이 트이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설마 꽃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탈색남도 한 송이는 찾아냈다.

“한 송이도 안 보인다?”

심기정이 재겸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딱 부딪쳤다. 그러자 재겸의 번호표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색깔을 확인한 재겸은 기가 막혔다.

내가 탈락이라고? 너네가 뭔데? 찌끄래기 나부랭이 새끼들이….

재겸은 주먹을 부들거리며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오케이, 1단계 끝. 다들 자리로 돌아가.”

일렬로 서 있던 마지막 응시생들이 하나둘씩 대열을 이탈했다. 그러나 재겸은 하도 기가 막혀서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례청을 부수려면 나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떨어질 리도 없고, 떨어져서도 안 됐다. 재겸은 갑자기 윤태희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냥 통과 의례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또 속은 건가? 또 날 농락했구나. 이 씹새끼를 그냥….

“가자, 칠칠아….”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재겸을, 탈색남이 기운 없이 이끌었다. 재겸이 씨근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탈색남이 한숨을 푹 쉬며 속삭였다. “재시험 치면 되지. 괜찮아.” 재겸이 쏘아붙였다. “너나 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자가 되는 걸 싫어했는데…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설마 나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입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칠칠아. 근데 너, 이 정도면 그냥 범인 아닐까.”

그때, 탈색남이 조그만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니까, 내 말은… 범인이나 다름없으면 굳이 이렇게 험한 바닥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꽃 한 송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면 눈이 닫힌….”

탈색남을 따라 자리로 돌아가던 재겸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야,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살다 살다 그런 소린 처음 듣는다. 탈색남은 나름 속 깊은 조언이랍시고 꺼낸 말이었지만, 재겸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범인이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겠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 내 꽃은 사슴이 다 뜯어 먹었나 보다.”

재겸이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에 탈색남이 이해한다는 듯이 재겸을 달래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재겸이 탈색남의 손을 치울 때였다.

“잠깐, 거기 노란 옷 애기야.”

심기정이 자리로 돌아가는 재겸을 멈춰 세웠다. 재겸과 탈색남이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심기정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너 방금 뭐라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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