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67)화 (67/348)

#67

삿갓을 벗어 던진 객이 환하게 웃으며 묘정을 돌아보았다. 삿갓 속에 감춰져 있던 용모는 아주 수려했다. 객의 입에서 스승의 이름이 나오자, 신들린 듯 살벌한 저주와 욕설을 줄줄 쏟아 내던 소년이 말을 뚝 그쳤다.

“묘정? 둘이, 둘이 아는 사이야?”

소년의 질문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묘정이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마주 선 객과 묘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소년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묘정이 객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이지요….”

반갑게 포옹하는 둘의 모습에 소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는데 둘이 아는 사이였다니…. 소년이 놀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삿갓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낸 객은 머리가 무척 짧았다. 귀밑에 닿을 정도로 짧게 친 길이였다. 저렇게 두발을 자른 이는 처음이었다.

“하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객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미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맑고 따스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에 객의 짧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나야 언제나 무탈하지요.” 묘정이 상냥히 대답했다. 객이 묘정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근데 묘정. 이러다 뼈가 부러지든, 숨이 막혀 죽든, 둘 중 하나일 것 같으니 만약 송장 치를 생각이 없다면 일단은 좀 놔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객의 말에 소년이 얼떨떨한 눈을 했다. 분명 다정한 말씨인데 묘하게 신랄하다. 서로 마주 안은 자세였음에도 묘정의 품에 객이 파묻혀 있는 꼴이었다. 묘정의 키가 큰 탓이었다.

묘정의 품에서 빠져나온 객이 소년을 쳐다보았다. 흠칫한 소년은 그대로 눈을 치켜뜨고 객을 빤히 노려보았다.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입니까?’

아까 전, 객이 묘정의 귓가에 속삭인 내용은 이러했다. 서로 시치미를 떼며 주먹을 섞던 와중에 묘정은 대뜸 소년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묘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객은 단번에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챘다.

우리 제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묘정은 짓궂은 스승이었다. 객은 소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전에 묘정이 몇 번이고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다’고. 글로만 전해 듣던 소년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이 겸이라 하였던가요?”

객이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묘정은 대답 대신 눈을 까딱였다. 그러자 객이 짧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앉아 있던 소년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객이 말을 건넸다.

“네가 말로만 듣던 묘정의 제자구나.”

“너 누군데? 나 알아?”

소년이 쏘아붙이자 객이 몸을 뒤로 젖히며 하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이윽고 묘정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들었냐는 듯 손가락을 들어 소년을 가리켰다. “성질머리 한번 유별난 제자를 두셨습니다?” 흡사 놀리는 투로 날아든 질문에 묘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볍게 받아쳤다.

“반갑다. 나는 휘림이라 한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객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었다. 소년은 불퉁한 낯으로 휘림의 손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에 휘림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어쭈? 요놈.” 신경전이 이어지자, 휘림이 슬쩍 손을 뻗어 허락도 없이 소년의 볼을 주물렀다. 소년이 움찔하며 휘림의 손을 떼어 냈다.

“이야, 어려서 그런가? 찹쌀떡 같으다.”

휘림이 큭큭 웃으며 다시 손을 뻗으려고 했다. 소년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묘정에게 달려갔다. 소년은 묘정의 옷소매를 꽉 움켜쥐고 물었다.

“뭐, 뭐, 뭐 하는 사람인데…….”

묘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휘림은 나의 오랜 지우(知友)다.”

뭐? 친구였어? 소년은 깜짝 놀랐다. 묘정에게 벗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소년은 새삼 제 스승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묘정은 과거를 비롯해 본인과 관련된 화두를 꺼리는 눈치였다. 어쩌다 얘기가 나와도 자연스럽게 피해 가곤 했다. 그러니 이렇게 몇 년을 함께 살았어도 오랜 지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거다.

스승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데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살짝 섭섭하려고 했다. 또 내심 부럽기도 했다. 나만 친구 없어. 묘정은 친구 있어서 좋겠다. 제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묘정은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머리통에 손을 얹는가 싶더니, 휘림을 향하여 질문을 던졌다.

“휘림, 내 제자와 검을 섞어 보니 어떻더이까? 쓸 만합니까?”

그 말에 휘림이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순간 소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대답을 기다리는데 희한하게 긴장이 되었다.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휘림이 이내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무렴,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였지요.”

차분한 칭찬에 소년의 눈이 살짝 빛날 때였다.

“스승을 닮았는지 검술은 영. 둔치요, 둔치.”

휘림이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

“…….”

소년이 가만히 묘정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잘못 들은 것 같아. 그러자 묘정이 태연한 표정으로 살포시 뒷짐을 지었다. 아니, 네가 들은 게 맞다….

“뭐?! 누구더러 둔치래? 야! 네가 그렇게 잘났냐?”

결국 소년이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금방이라도 휘림을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어허.” 묘정이 난감하게 웃으며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묘정이 얼마나 강한데! 넌 한 주먹이야!” 백번 양보해서, 나야 그렇다 쳐도 묘정까지 깎아내리는 건 못 참는다.

“묘정, 뭐 해? 빨리 칼 가져와! 칼!”

소년이 아등바등 발을 굴렀다.

“겸아. 되었다, 진정하여라….”

묘정이 한숨을 쉬며 어린 제자를 뜯어말렸다.

“쟤가 무시하잖아! 한판 붙어서 이겨 버려!”

“겸아. 그랬다간 이 스승님 목이 날아간다.”

엉? 소년이 멈칫하며 묘정을 올려다보았다.

“나라도 검술로는 휘림을 당해 낼 재간이 없거든.”

스승은 제자에게 담담히 진실을 알려 주었다. 덧붙여 넌지시 사과도 했다. 미안하게 되었다…. 사실 미안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뭐? 진짜로?”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묘정이 소년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휘림은 천하 제일검이니라.”

천하 제일검.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휘림의 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크게 부풀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휘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휘림이 심술궂은 낯으로 씩, 웃어 보였다.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같은 하늘 아래 누구도 견줄 자가 없지. 그러니 실은 웬만한 준재라도 휘림의 눈엔 둔치로 보인단다. 허니 상심치 말거라.”

그럴 리야 없었다. 상심하거나 스승에게 실망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묘정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묘정의 벗이 되려면 저만치 강해야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눈이 묘하게 초롱초롱해지자, 묘정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휘림이 달리 보이는 모양이구나.”

소년은 딱히 별 대꾸는 하지 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괜히 휘림을 힐끔 훔쳐보았다. 사실이었다. 갑자기 휘림이 멋있어 보였다. 묘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은근슬쩍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휘림의 머리칼이 왜 저리 짧은 줄 아느냐?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모양이 흐트러지니 번거롭다는 까닭에서, 제 손으로 단발을 한 것이란다. 모름지기 천하 제일검이라 할 만한, 그 드높은 칭호를 얻기에 손색이 없는 기상이지.”

멋지다! 본인 손으로 단발을 하다니!

소년이 감탄했다. 묘정도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평소 묘정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걸 직접 말하거나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성정이 담백한 탓도 있겠으나 원체 스스로에 관해선 함구하는 묘정이었다.

그러나 제 벗인 휘림에 대해선 제법 말이 많았다. 본받으라 조언을 하는 건지, 내 벗 잘났다고 자랑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묘정은 휘림이 얼마나 강하고 멋진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적당히 딴청을 피우던 휘림은 이러다 끝도 없겠다 싶어서 헛기침을 했다.

“그 정도로 해 두시지요. 더 듣기 낯부끄럽습니다….”

휘림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묘정이 말을 멈추고 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휘림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아, 이건 묘정이 일전에 맡겨 둔 물건들인데….” 하며 어깨에 메고 있던 행낭을 통째로 건넸다. 천으로 된 행낭에는 웬 두꺼운 회초리 같은 것이 눈에 띄게 삐져나와 있었다. 행낭을 받아든 묘정이 긴 막대를 슥 끄집어냈다.

“오. 뭐야. 그거 뭐야.”

소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총총 다가왔다.

“아, 이건 묘정이 예전부터 쓰던 활이야.”

옆에 선 휘림이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활? 무슨 활대가 이렇게 곧아? 게다가 시위도 없고….”

묘정이 빙그레 웃는가 싶더니 “잘 보렴.” 막대 양 끝을 잡고는 부러트릴 기세로 확 꺾어 보였다. 소년이 토끼 눈을 떴다. 뚝 부러졌어야 할 막대는 멀쩡하기만 했다. 힘을 준 그대로 유연하게 휘었다. 말도 안 되는 탄성이다.

“보기엔 이래도, 그 어떤 활보다도 값지고 쓸 만하단다.”

묘정이 활대를 이리저리 살펴볼 때였다. 휘림이 대뜸 손을 뻗더니 아까처럼 소년의 뺨을 주물럭거렸다. “둔치야. 활은 좀 쏘냐?” 또 둔치래. 소년이 얌전히 뺨을 내어놓은 채로 불퉁하게 꿍얼거리자 묘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겸이가 검은 다소 서툴러도 활에는 아주 능합니다. 활 쏘는 데 유달리 재주가 뛰어나니, 이 역시 부덕한 스승을 닮아서 그런 모양이지요.”

말을 마친 묘정이 소년의 손에 활대를 쥐여 주었다.

“그러니 나를 닮은 내 제자에게 이것을 물려주마.”

소년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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