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윤태희의 손등에 앉아 있던 흑망조가 훌쩍 날아오르는 순간, 그와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화살이 튀어 나갔다. 귀기가 일시에 폭주하며 재겸을 속박하던 모든 주술이 깨진 것이었다. 흑망조가 목표물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으나 아무렴 화살의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윽!”
날아든 화살에 맞은 윤태희는 떠밀리듯 나무에 부딪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윤태희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이 삐뚤어져서 우스꽝스러웠다.
“윤. 수석, 너, 왜….”
잔기침을 내뱉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흑망조를 쳐다보았다. 흑망조는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이영신의 정수리를 부리로 쪼아 대고 있었다. 흙바닥에 엎드려 있던 이영신은 멍한 얼굴로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랗게 뜬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재겸이 주술을 깨 버린 탓에 이영신 또한 속박이 풀린 상태였으나, 이영신은 흑망조를 떨쳐 내지 못했다. 흉이 든 탓에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영신은 저항할 겨를도 없이 결국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모든 나자가 화살에 쓰러졌다. 그중에서 깨어있는 것은 오직 윤태희뿐이었다.
이영신의 기억을 쪼아 낸 흑망조가 윤태희를 향해 무사히 되돌아왔다. 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윤태희가 느리게 손바닥을 펼치자, 흑망조가 부리를 벌려 기억이 담긴 검은 구슬을 토해 냈다. 윤태희는 종이 새와 구슬을 무성의한 손길로 한데 구겨 쥐었다가, 이내 대충 손을 탈탈 털어냈다.
마침내 산중에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리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귀기가 소년의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소년은 손을 들어 눈가에 고인 피를 닦아 냈다.
“메산아, 이리 와.”
땅바닥에 엎드려 숨죽여 절망하던 메산이가 몸을 일으켰다. 휘청이는 불안한 걸음으로 재겸을 향해서 허둥지둥 뛰어오기 시작했다.
“나리, 귀기가, 으허엉….”
메산이는 차마 치유하겠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을 뻗고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겸은 일단 메산이의 손목에 묶여 있는 가느다란 끈부터 끊어 냈다. 그리고는 짧게 덧붙였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피를 멎게 만든다고 해도 한번 시작된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 정신을 잃는 순간에야 폭주 또한 멈출 것이고, 저의 나리는 그렇게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맬 것이다.
메산이가 서둘러 치유에 돌입했다. 하지만 재겸은 메산이의 손을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 치유를 받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재겸은 떨어진 활을 주워들고는 나무에 앉아 있는 윤태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윤태희는 나무에 기댄 채 긴 다리를 쭉 뻗고 허술하게 앉아 있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윤태희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윤태희의 어깨에 꽂혀 있던 화살을 거칠게 잡아 뺐다. 그에 윤태희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재겸은 한 손으로 우악스레 멱살을 붙잡아 윤태희를 일으켜 세웠다.
“…….”
“…….”
윤태희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붉은색 귀기는 처음 봐. 예쁘네….”
종이 새가 공중으로 발돋움하던 순간에 재겸은 주술을 깨고 속박에서 풀려났다. 따라서 종이 새가 저를 향해 날아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종이 새는 윤태희와 같은 편인 동료 나자에게 날아갔다.
“말해.”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변명이든 유언이든.”
탈 너머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윤태희는 힘없이 늘어트렸던 팔을 들어 비뚤어진 탈을 바르게 고쳐 썼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방금 뭐 한 거냐고.”
“그냥. 개수작.”
성의 없는 대답에, 재겸의 낯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내 편이 되어 주면 나도 네 편이 되겠다고 했잖아. 반대로 내가 먼저 네 편이 되면… 그럼 너도 내 편이 되어 줄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해서…. 마지막으로 수작 좀 부려 봤어.”
윤태희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좀 통했나?”
“아니. 전혀.”
재겸이 흔들림 없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럼….”
윤태희가 덤덤하게 말을 흐렸다.
“그냥. 실수.”
“…….”
“실수한 거라고 치자.”
“…….”
재겸이 설핏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윤태희는 슈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아까처럼 사각 케이스를 꺼냈다. 그러자 재겸의 붉은 귀기가 흉흉하게 일렁거렸다. 멱살을 잡고 있던 악력이 한결 강해졌음에도 윤태희는 묵묵히 메모지 네 장을 떼어 냈다.
후, 숨을 불어넣자 흑망조 네 마리가 태어났다.
“나자의 이름으로 밤을 몰수합니다.”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이자 흑망조 네 마리는 재겸의 곁을 지나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각각의 종이 새가 향한 곳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나자들의 머리 위였다. 나자들은 얌전히 기억을 갉아 먹혔다. 말없이 그 광경을 주시하다가, 재겸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
탈 너머로 보이는 눈매를 사납게 노려볼 때였다.
“아, 또 실수해 버렸네.”
어떻게 들어도 부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나는 우리 나으리랑은 다르게 밤눈이 어두워서.”
천연덕스러운 변명에 재겸이 그대로 손을 풀어 윤태희를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엉덩방아를 찧은 윤태희가 얼굴을 찡그렸다.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지탱하는데, 날카로운 화살촉이 다가왔다. 재겸은 턱까지 팽팽하게 활을 끌어당기고 정확히 윤태희가 쓴 탈의 정중앙을 겨냥했다.
“이 씹새끼가, 너 내가 기어오르지 말랬지.”
붉게 변한 귀기는 아주 험악하고 위협적이었다. 윤태희는 무방비했다. 붉은 귀기에 휘감긴 화살은 금방이라도 탈을 뚫고 이마에 박힐 것 같았다. 귀기가 폭주한 상황에서 재겸이 화살을 쏘면 어차피 막아 낼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넌 여기서 내 손에 죽어.”
“그럴래? 마음대로 해.”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어차피 내 편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그릇이라면 여기서 죽어도 아쉽지 않아. 장차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윤태희가 자조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메산이가 황급히 달려와 재겸에게 달라붙었다.
“나리! 그만, 그만하셔요….”
재겸은 윤태희의 속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태희는 여지껏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싸움에 끼어드는 척을 하더니, 어느 순간엔 동료 나자들을 등지고 재겸에게 편승해 뻔뻔하게 손을 거들었다.
처음엔 종이 새를 잘못 날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심을 사기 위한 수작질이었다. 의중이야 어찌 됐든 재겸은 윤태희의 도움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고, 고맙지도 않았다. 일을 꾸민 것은 본인이면서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는 것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다.
“저리 비켜.”
“나, 나리….”
재겸이 매몰찬 손길로 메산이를 밀어냈다.
“그깟 기억을 지우든 말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날 협박한 것도 모자라서, 메산이 너까지 납치하고 이용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죽일 거야. 화내기 싫으니까, 비키라고.”
재겸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분노가 번들거렸다. 그에 메산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갈팡질팡하더니, 결심하듯 재겸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나, 나리, 이자는….”
주저하던 메산이가 울먹이며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탈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봐도 믿음이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귓속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었다.
“이 자는, 위험했던 순간에 저, 저를 막아 주었어요.”
이 자가 직접 나서서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다면 그새 발목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리가 늦지 않게 저를 데리러 올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공격에 가세하지도 않았고, 저의 나리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도움을 준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종이 새는 동료를 향해서 사용했다. 그 때문에 남자가 제게 해 줬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메산이가 꺼낸 뜻밖의 말에, 시위를 잡은 재겸의 손이 아주 살짝 풀렸다.
“그, 그러니까 저한테만, 은, 은밀히 말하기를….”
메산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짧으면 석 달 안에, 내가 동자님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할게요. 어쨌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거,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저 사람들은 동자님을 나례청이라는 곳으로 데려갈 거예요. 그리고 짧으면 석 달, 길면 일 년 안에 동자님을 비롯해 지금까지 붙잡힌 영물들, 신령들, 전부 풀려날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안전하게 잠깐만 버티고 있으면 돌아갈 수 있어요. 왜냐면….’
왜, 왜냐면… 말을 하다 말고 메산이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아차 싶었던 것이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해도 되나?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별말 없이 메산이가 전하는 자신의 귓속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뿐이었다.
“왜냐면. 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심스럽게 윤태희의 눈치를 살피던 메산이는 손을 꼬물락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곤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례청이 무너질 거라고….”
“뭐?”
재겸이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얌전히 앉아 있는 우스꽝스러운 전통 탈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활을 겨눈 채로, 재겸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례청이 왜 무너지는데.”
“…….”
“대답해.”
“…….”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윤태희는 재겸의 눈가에 눈물처럼 번진 핏자국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방에서 쥐새끼가 득실대고 있어.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고, 어딜 가도 따라붙어서 도망도 못 쳐. 이럴 때 쥐새끼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뭔지 알아?”
윤태희는 대답 대신 생뚱맞은 질문을 역으로 던졌다. 재겸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윤태희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윤태희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게 자답했다.
“나도 그 쥐새끼가 되면 돼.”
재겸의 낯에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렇게 싫어?”
자꾸 맥락을 튀어 나가는 말에 재겸의 낯이 험악해졌다.
“왜? 내가 나자라서?”
윤태희가 시선을 내리며 곰곰이 중얼거렸다.
“그럼, 나자 그만두면 나 좀 좋아해 주나?”
그렇게 물으며, 윤태희는 고개를 살짝 빼고는 뒤에 널브러진 나자들을 훑어보았다. 어둠이 내린 산중은 고요했다. 멀리서 희미하게 캥캥,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맞아, 나례청은 무너질 거야.”
윤태희가 재겸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내가 부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