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다.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재겸은 지켜야 할 것을 스스로 내버렸다. 윤태희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모한 재겸의 선택 앞에서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윤태희 한 명뿐이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나자들이 접근을 해 올 것이고, 이용하려 들 것이다. 자신의 정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해야 할 적수 또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재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메산이를 뺏긴 순간부터 이판사판이었다. 나만이 너를 안다고, 윤태희는 말했었다. 그 독점된 정보만으로 윤태희는 손쉽게 우위를 점했다. 그렇다면 거기서 끌어내려 주겠다. 모두가 날 알 수 있도록, 네가 손에 쥔 그 패의 가치를 없애 버릴 것이다. 윤태희가 움켜쥔 비밀을 재겸은 제 손으로 내던지기로 했다.
저를 이용하라는 윤태희의 제안에 혹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내부에 있는 윤태희라면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이렇게 메산이를 빼돌리려는 걸 몰랐다면, 윤태희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고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정주의 앞길에서 얼쩡거리는 녀석이 생기면 그때 가서 치울 것이다. 득실거리는 쥐새끼 떼를 따돌릴 수 없다면 한 마리씩 해치우면 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벌벌 떨어 가며 몸 사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지킬 수 없다면 버릴 것이다. 버린 뒤에 다시 되찾아 오겠다.
지금처럼.
윤태희가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례청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편이 되기는 싫다…?”
윤태희는 정확히 요점을 짚어 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이건 선전포고였다. 소년은 절대로 나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소년을 제약하던 족쇄는 사라진 셈이다.
“네가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랐어.”
빈대 하나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걸, 재겸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 과정은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뒷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재겸이 내린 답이었다.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나례청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재겸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아니, 넌 몰라.”
윤태희가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결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될 거야.”
재겸이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상관없어. 권태롭고 불우한 인생에 소일거리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잘 생각해 봐, 권태롭고 불우한 인생에 적당한 소일거리 하나쯤은 있어야지.’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웃음은 왜인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웃다가, 마침내 윤태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나는….”
윤태희가 고개를 숙인 채 음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왜 나는, 자꾸 널 실패하지?”
들릴 듯 말 듯한 사소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저녁 한 끼라도 같이 먹었으면 덜 억울했을까.”
그 말을 끝으로 산중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영신을 비롯한 나자들은 둘이 지금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을 때였다. 윤태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아니야.”
“입 닥쳐.”
폭풍 전야는 막을 내렸다.
“전부 때려죽일 거니까.”
잠잠하던 소년의 주변으로 스멀스멀 귀기가 흘러나왔다. 눈에 보일 정도로 짙고 무거운 귀기였다. 소년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야? 저 귀기….”
“어, 저, 저게 무슨….”
몰아치는 바람에 풀이 눕고 나뭇가지들이 휘청거렸다. 나뭇잎과 흙먼지가 시야 속에서 어지러이 떠돌아다녔다. 나자들은 광풍에 맞서느라 몸이 뒤로 떠밀릴 지경이었다. 귀기로 만들어 낸 바람에는 명백한 살기가 섞여 있었다.
이영신은 몹시 당황한 낯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따지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윤태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탈을 다시 얼굴에 뒤집어쓸 따름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메산아, 움직이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어.”
귓속말처럼 다가온 말에 훌쩍이고 있던 메산이가 번뜩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쪽에 서 있던 저의 나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 나리! 어디에….”
놀란 메산이가 황망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무형의 채찍 같은 귀기가 예고 없이 허공을 후려쳤다.
“컥!”
신 주임을 비롯해 제구부 나자 셋이 외마디 비명을 토하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흡사 달려오는 차에 부딪힌 것만 같은 큰 충격이었다. 지척의 나무 몇 그루가 순식간에 꺾여 나갔다. 이영신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숙였다.
쏜살같이 날아든 재겸이 신 주임의 하관을 한 손에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체격 좋은 신 주임이 정신없이 발버둥 치며 재겸의 손목을 마구 잡아 뜯었다.
“욱, 으윽….”
틀어막힌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악력을 떨쳐내려 온 귀기를 실었으나 소년의 손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재겸은 그대로 신 주임을 바닥에 내리꽂듯 패대기치더니, 사정없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신 주임은 광기로 일렁이는 살벌한 눈동자를 보았다. 음절이 짧게 끊어질 때마다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때마다 터지고 부서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나리….”
메산이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신, 신 주임님!”
“저 미친, 신 주임!”
몰아치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이영신과 나자들이 뒤늦게 달려들었다. 재겸은 달려드는 나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귀기에 나자들이 일시에 튕겨 나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말… 말도 안 돼…….”
이영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귀기였다. 나자도 아닌 귀재가 이렇게까지 귀기를 다루는 모습은 듣도 보도 못했다. 기운이 밋밋했던 것은 방심한 틈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귀기를 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일단 저 귀기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이영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박 주임, 빨리!”
박 주임이 짐가방에서 밧줄을 꺼냈다. 재빨리 술식을 외고 밧줄을 땅에 떨어트리자, 밧줄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땅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흙바닥 아래로 사라졌던 밧줄은 소년의 발밑에서 튀어나왔다. 밧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나무뿌리처럼 소년의 발을 묶었다.
귀기를 무력화시키는 밧줄로 귀기를 봉쇄하자마자 휘몰아치던 바람이 일시에 흩어졌다. 신 주임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재겸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때, 재겸의 발치로 무언가 데굴데굴 날아들었다.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섬뜩한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영신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 틈에 박 주임이 힘없이 늘어진 신 주임을 단숨에 낚아챘다.
윤태희는 신 주임을 구하려 들지도 않았고, 재겸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탈 너머로 표정을 감춘 채 멀찍이 물러나 있었는데, 어째선지 묘하게 상심한 기색이었다.
그때, 이영신이 눈을 질끈 감고 손뼉을 짝, 마주쳤다.
“무술 오월기미삭 초칠일경오.”
“영신아, 잠깐….”
뒤늦게 멈칫한 윤태희가 한 발자국 다가설 때였다.
“이영신이 은륜의 시한을 종료합니다.”
신속하게 말을 끝맺자마자 소년의 발밑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귀기가 폭발했다. 뿌연 흙먼지가 가시자 그 속에서 움직임이 멎은 그대로 서 있던 재겸의 모습이 보였다. 교복은 넝마가 되었고, 터진 살갗에서는 피가 흘렀다.
“나, 나리-!”
피를 뚝뚝 흘리는 재겸을 발견한 메산이가 울부짖었다. 소년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큰 상처를 입고서 피를 잔뜩 뒤집어썼음에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한층 더 희번덕한 눈을 뜨고서 나자들을 뚫어져라 응시해 왔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박 주임은 저도 모르게 재겸의 발밑을 확인했다. 아까만 해도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해 보였는데,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구부 수석의 은륜지에 직격을 당했음에도 저렇게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놀라웠다.
이영신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신 주임이 큰 부상을 입긴 했지만 크게 한 방 먹인 것은 이쪽이다. 발을 묶고 귀기를 봉쇄했으니 저 자리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헌데 위기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야, 너네 뭐 하고 있는 거야? 일단 약수 꺼내서 신 주임 처치부터 해. 윤태희, 도대체 왜 그러고 서 있는 거냐고!”
이영신이 답답한 얼굴로 윤태희를 응시했다.
제구부는 제작하고 연구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행히 전투직인 축역부 나자, 그것도 무려 수석씩이나 되는 윤태희가 있으니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윤 수석은 전력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아까부터 남의 일인 양 멍하니 손을 놓고 있었다. 이따금 손을 들어 흙먼지를 휘휘 물리치거나, 간간이 날아드는 돌멩이며 나무 조각 따위를 튕겨 내는 게 전부였다.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윤태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짧게 대꾸하자, 이영신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도 안 될 뿐더러 성의조차 느껴지지 않는 핑계였다. 이영신이 낯을 굳히며 심각하게 물었다.
“너 설마 아직도 후임으로 데려오고 싶은 거야? 쟤를?”
윤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