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42)화 (42/348)

#42

정주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다고 했다. 호족의 성채를 뛰쳐나와 인간 세상에서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안온한 성채에서 화초처럼 자라 온 정주에게 있어 넓고 자유로운 바깥세상은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재겸아, 나는 그 성채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어. 네가 없었다면 난 평생 그곳에서 갇혀 지냈을 거야. 널 만나면서 처음으로 용기가 생겼어. 매일 꿈을 꾸는 것 같아.’

정주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된 이 땅을 사랑했다. 마음껏 욕망하고, 그 욕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세계였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거라고, 정주는 그렇게 말했었다.

재겸은 자유를 만끽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정주가 부러우면서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재겸은 종종, 자신의 존재가 정주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고인 물과 같은 이 삶에 정주도 메산이도 더 이상 발을 담그고 있어선 안 됐다.

저를 떠나 각자의 삶을 온전히 살아 내길 바랐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나랑 얘 신경 쓰지 말고.’

정주가 연예계 데뷔를 준비하며 서울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 메산이는 못내 섭섭하고 아쉬워했지만 재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라고 했다. 늙지도, 죽지도 못 하고 멈춰 있는 이 삶은 오로지 저의 몫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윤태희는 정주가 스스로 일궈 낸 삶을 방해하고,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말해 봐,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이는지. 내가 뭐였으면 좋겠어?”

윤태희는 말했다. ‘네가 말하는 대로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 주겠다’고. 그렇게 재겸의 손에 상냥하게 칼자루를 쥐어 주었다. 하지만 재겸은 알고 있었다. 이 칼을 어느 쪽으로 휘두르든 다치는 건 자신일 것이라는 사실을.

“친구, 동료, 원수, 적…. 어느 쪽이든 말만 해.”

친구, 동료?

재겸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지금에 와서 또다시 친구니 뭐니 운운하는 게 가증스럽다. 윤태희는 더 이상 협잡꾼에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의 윤태희는 악귀보다도 간특한 흉한에,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이었다.

“넌 그냥 나를 이용하려는 거잖아.”

“그럼 너도 날 이용해.”

윤태희는 달리 부정은 않고 태평하게 대꾸했다.

“아까 조심하라고 말한 건 진심이었어.”

뜬금없는 말과 함께 윤태희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뭐?”

“네 삼촌 말이야. 방송국이나 촬영장 같은 곳엔 특히나 귀신이 많아. 그래서 그 바닥, 나자 밭이거든. 현직 유명 연예인이 귀재라는 사실을 알면 나례청에서는 분명히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할 거고. 덜미를 잡히면 그걸로 끝이야. 지금까진 운이 좋았던 모양이지만.”

윤태희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 쥐새끼처럼 집요하고 끈질기거든. 어쩌면 이미 누군가 한 명쯤은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처럼 정체를 숨기고 곁에 붙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동안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정주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생활한다. 고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협박범은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태도로 현실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사방 천지에서 쥐새끼가 득실대는데, 따돌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동안의 안일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싸늘했다. 마치 재겸과 정주가 방심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실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윤태희는 나자를 서슴없이 ‘쥐새끼’라고 칭했다. 스스로 모욕적인 비유를 쓰는 것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너는 꼭 그런 쥐새끼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네.”

재겸의 조소 어린 말에 윤태희가 순간 멈칫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이었다. 윤태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여상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재겸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주를 들먹이며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협박할 땐 언제고, 이번에는 조심하라는 말은 진심이라며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네가 조심해야 할 건 나만이 아니야, 라고.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모든 말과 행동이 의심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이래 봬도 내가 직급이 꽤 높거든.”

윤태희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뒷배로 삼기엔 그럭저럭 제법 괜찮은 위치일걸.”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나 좀 써먹어 보라고.”

재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윤태희가 능청스레 웃으며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아까 말했잖아. 너도 날 이용하라고. 나라면 지켜 줄 수 있으니까. 네가 내 편이 되어 준다면 나도 네 편이 되어 줄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거든.”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쪼록 현명한 판단, 기대할게.”

협박, 그다음엔 회유였다.

***

이영신이 달려들던 순간에 메산이는 나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엄청난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가뜩이나 인간을 무서워하는데, 알지도 못하는 덩치 큰 장정이 달려드니 그야말로 기절할 노릇이었다. 드넓은 마당에서 한바탕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메산이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게 바로 술래잡기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분명히 문에 자물쇠를 채웠는데 이영신은 아주 손쉽게 문을 따고 들어왔던 것이다. 제구부 수석의 비범한 손재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집 안에서도 추격전은 벌어졌다. 덕분에 집 안 꼴이 개판 오 분 전이었다. 이영신은 어렵지 않게 메산이를 포획했다.

“이거 놔, 으어엉, 놔주시오흐어엉……”

이영신은 메산이가 손끝 하나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주 강한 힘이었다. 이영신이 메산이의 머리통에 볼따구를 부비적거렸다. 그러자 메산이가 어흐어우어엉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더 크게 훌쩍거렸다.

“나리, 나리, 흑흑, 나리께 보내 주세요, 엉엉….”

어린애가 습관처럼 ‘엄마’를 부르짖으며 울듯이, 부모가 없는 메산이는 엄마 대신 저의 나리를 찾으며 울었다. 메산이의 머리통에 볼을 부비적거리던 이영신이 멈칫했다.

“나리…?”

동자님은 아까부터 누군가를 찾고 있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집 내부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범한 가정집이다. 사람이 생활하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평소 함께 생활하던 이가 있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맨 처음 보고를 받을 적에 웬 남자가 동자님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남자를 나리라고 부르는 건가? 근데 ‘나으리’라는 호칭은 보통은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신성한 산삼 동자가 윗전이라도 모시고 있는 건가? 만약 산신이라면 몰라도. 이런 가정집에 자리를 잡고 생활을 하는 걸 보면 산신을 모시고 있을 리는 없고. 게다가 딱 보아하니 사람의 손을 탄 듯한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영신이 입을 열었다.

“동자님, 울지 마세요.”

의문을 뒤로한 채, 일단 이영신은 뒤늦게나마 상황 수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다소 멋쩍어진 이영신은 메산이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살짝 풀었다. 그리고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세심한 손길로 닦아 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무서우셨죠?”

“으, 흐흑….”

“동자님이 이렇게 우시면, 나리께서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이영신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리’를 언급했다. 그러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얌전히 안겨 있던 메산이가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반응에, 이영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최대한 친절하고 무해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는 동자님이 우실 때마다 속상해 하시는, 그런 다정한 분이시잖아요. 나리께서 그간 워낙 동자님께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서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무례하게 굴고 말았어요. 저를 용서하세요.”

메산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훽, 돌렸다.

“저, 저희 나리를 아세요?”

“그럼요, 당연히 알지요.”

메산이의 얼굴에 한 줄기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니 제가 이 집에 들어왔죠. 동자님도 아시겠지만, 이 집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으니까요. 나리께서 손을 써 주셨습니다. 게다가 저는 동자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고요. 그래서 처음 뵀을 때부터 ‘동자님’이라고 불렀던 거예요. 한낱 인간인 제가 무슨 수로 이 모든 걸 알고 있겠습니까. 다 나리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남은 울음을 삼켜 내던 메산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정말이세요?”

“네에. 제가 이곳에 온 것도 나리께서 부탁을 하셔서예요.”

“나리께서 부탁을 하셨, 셨다고요?”

이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고 있던 메산이를 일으켜 세웠다.

“나리께서 동자님을 데려와 달라고 하셨어요.”

“저를요? 나리께서요? 어, 어디로요?”

“아. 그게….”

아놔.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놨는데.

순간, 말문이 막힌 이영신이 눈을 굴렸다.

“어, 그러니까….”

“…네?”

“서, 서울, 서울에.”

“…서울이요?”

메산이의 표정이 일변했다. 마치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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