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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9)화 (29/348)

#29

분명히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건만 메산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정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인간이 많은 곳에서 사라지다니. 신났던 기분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쳤다.

정주가 황망한 시선으로 주변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메산이의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돌발 상황이었다. 정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길을 잃은 걸까? 정주가 마스크를 단단히 올려 쓰고 병원 곳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주차된 차들 사이사이, 꽃이 핀 화단, 큰 그늘을 만들어 낸 나무 밑.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 봤지만 어디에도 메산이는 없었다.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정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머리통을 퍽퍽, 때렸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해.”

돌돌돌, 링겔 대를 밀며 병원 앞을 산책하던 환자들이 정주를 힐끔거렸다. 정주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병원 밖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문을 넘어 대로변에 선 정주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동그랗게 모여 있는 행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정주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건 바로 위기감이었다.

행인들은 중심을 겹겹이 둘러싸고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으, 저거 고양이 맞지?”

“어떡해. 다쳤나 봐.”

정주가 다급한 손길로 인파를 헤쳤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마침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몸집의 몇 배나 될 법한, 큰 후드티를 걸치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쪼그려 앉은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고양이가 있었다. 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고양이는 차마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메, 메산…!”

정주가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어머. 어머머.”

“애기야, 내버려 둬.”

“꼬마야! 만지면 안 돼!”

메산이를 부르려던 정주가 숨을 들이켰다. 메산이가 결심하듯 쓰러진 고양이의 몸 위로 손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메산이의 작은 손바닥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메산이를 제지하려던 행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산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은 무수한 알갱이가 되었다. 작은 알갱이들은 너덜너덜하던 고양이의 살갗에 촘촘하게 달라붙었다. 피가 흘러나오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행인들이 탄성을 내뱉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세, 세상에….”

“방금 뭐야? 헐. 대박.”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졌다. 기절한 듯 쓰러져 있던 고양이가 눈을 떴다. 어느새 메산이의 작은 손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고양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인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정주가 그제서야 행인들을 뚫고 다급히 메산이에게 뛰어들었다.

정주는 메산이의 뒷덜미를 단숨에 잡아 올렸다. 당황한 메산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정주를 올려다봤다. 정주는 메산이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커다란 후드가 메산이의 작은 얼굴을 전부 가렸다. 행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주는 그대로 메산이를 들고 튀었다.

***

정주와 메산이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정주와 메산이는 피곤한 얼굴로 신발을 벗었다. 정주는 재겸의 컨버스 운동화가 신발장을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심 딴 데로 샜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재, 재겸아. 나 왔어.”

“나리, 다녀왔습니다….”

집 내부는 불이 켜져 있었고, 티비를 틀어 놨는지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있는 건 분명하건만 정주와 메산이가 건넨 인사는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에 메산이가 눈치만 보는 사이, 거실로 향한 정주가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

재겸은 평소처럼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뭘 먹고 있었는지 손에는 커다란 그릇이 들려 있었다. 재겸은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수저질을 했다. 피딱지가 달려 있는 입가는 음식을 씹느라 우물거렸다. 그릇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흰 쌀밥이었다.

“밥 먹어? 반, 반찬도 없이 왜 맨밥만 먹어.”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재겸을 향해, 정주는 짐짓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재겸 역시 평소에 보던 표정 그대로였다. 단, 말이 없을 뿐이었다. 재겸은 지금 정주와 메산이를 아예 공기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은 어려울 듯싶었다.

정주가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겸의 정면에 앉았다.

“재겸아.”

“…….”

“재겸아.”

“비켜. 안 보여.”

정주는 일부러 티비 화면을 등지고 앉았다. 재겸이 짧게 대꾸했음에도 정주는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재겸은 군말 없이 시선을 밥그릇으로 옮겼다. 묵묵히 밥만 퍼먹었다. 메산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주가 말해 줬던 대로였다. 지금, 저의 나리는 화가 난 게 분명해 보였다.

정주는 운전하는 내내 그야말로 노발대발을 했었다.

‘메산아. 내가 진짜 너네 둘 때문에 미치겠다. 너네 나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넨 조심성이라는 게 없어?’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고양이가, 아파 보여서….’

‘재겸이 성질머리 몰라서 그래? 메산이 네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걸 걔가 알기라도 해 봐. 이 정도로 안 끝내! 나니까 이렇게 혼내고 말지. 내가 진짜 너네 때문에 심장 떨려서 못 살겠다. 안 그래도 재겸이 지금 화났을까 봐 걱정인데!’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리께서 화나셨다니….’

그 이유를 물었지만 정주는 뜨끔한 기색으로 딴청을 피우며 그저 함구할 따름이었는데,

“…미안해.”

정주 님 때문이구나.

가만히 재겸을 바라보던 정주가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재겸은 조용히 밥만 먹었다. 정주가 재겸의 눈치를 살피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와 동시에 정주의 머리통 위로 여우 귀가 퐁, 튀어나왔다. 정주는 일부러 귀를 축 늘어트렸다. 한껏 불쌍해 보이도록, 재겸의 연민을 유발하기 위한 필살 전략이었다.

“아니. 괜찮아.”

작전이 통했는지 재겸은 들고 있던 밥그릇을 순순히 내려놓았다. 재겸이 한참 만에 눈을 마주쳐 오자, 정주의 얼굴 위로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아냐, 재겸아. 내가 아까는 말이 심했….”

“학교 한 달 다니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지.”

“어? 어….”

재겸이 평소와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할게. 메산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무거운 정적이 넓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

정주가 귀를 의심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재겸을 응시하던 정주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한 메산이 역시 저와 같은 표정이었다.

“재겸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약속 지켜. 앞으로 2주 남았어.”

“나, 나리!”

그때,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 없던 메산이가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겸이 눈을 들어 메산이를 바라보았다. 메산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메산이가 씨근덕거리며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정주가 재겸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정주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 올리며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재, 재겸아. 갑자기 왜 그래. 내, 내가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나는 그냥 네가 걱정되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래서 그랬어. 예전에야 뼈 하나 부러지는 것쯤은 별거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다르니까, 그러니까….”

“알아. 무슨 말인지. 네 말이 맞아.”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냥, 재겸이 네가 학교를 다니기로 한 이상 진짜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지냈으면 해서.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래서 그랬어. 이주열 같은 인간, 나도 싫어. 싫은데! 당연히 걔가 잘못을 했겠지, 근데 재겸아. 그런 놈은 원래 그런 놈이고, 넌 어차피 학교 천년만년 다닐 것도 아니잖아! 넌 걔보다 강하고, 그러니까. 눈 딱 한 번만 감고 참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거잖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이번처럼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진흙탕 싸움은 피할….”

“야.”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겸이 불쑥 말을 잘랐다.

“너 진짜 인간 같다.”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정주가 입을 다물었다.

“…….”

“진짜 인간 다 됐네.”

“…재겸아.”

“이제 이렇게 사는 거 지긋지긋해.”

재겸이 고요한 시선으로 창문 밖을 응시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메산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나 울음을 참았는지 어깨는 마구 들썩거렸다.

“나리. 전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나리의 곁에 있을 거예요.”

“재겸아. 나는 그냥 네가 다시 사람들이랑 어울렸으면 해서, 예전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면 해서, 그래서 그랬어. 그냥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랬어.”

“…….”

둘의 애원에 재겸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 제발 부탁인데… 나 때문이라고, 날 위해서라고 그런 말 좀 하지 마. 사실은 너네 스스로를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재겸이 밥그릇을 집어 들더니 말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정말 날 위한다면, 차라리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그래?”

재겸은 식어 버린 밥을 개수대에 쏟아부었다.

“나 좀 죽여 줘라.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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