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8)화 (28/348)

#28

대기 좌석에 복귀하자마자 간호사는 이주열의 이름을 호명했다. 기다림에 지쳐 신경이 곤두서 있던 모친은 후다닥 이주열을 방사선실로 떠밀었다. 그리고 지금, 정주는 초조한 낯으로 진료실 앞에 앉아 있었다. 안면과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모자는 곧바로 진료실에 불려 갔다. 검사 결과를 토대로 정확한 진단이 내려질 터였다.

병원 안은 인간이 많아 메산이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정주는 메산이에게 일을 마치거든 병원 주차장에 있는 밴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미리 언질을 해 둔 상황이었다. 두 모자를 기다리는 동안, 정주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언제쯤 올라오십니까, 지금 다 선배님만 기다려요….’ 정주는 심호흡을 하며 매니저와 소속사로부터 날아든 메시지를 차례차례 확인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열 군, 어머님.”

진료실 문이 열리고 두 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주는 둘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연기를 업으로 삼은 만큼,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 보면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수술 날짜는 언제로 하셨나요?”

“…….”

“…….”

정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주열이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말이 없는 이주열 대신 이번엔 모친을 응시하니, 역시나 어딘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대답하기 껄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둘의 반응을 확인한 정주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겉으로는 면목이 없다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마스크 속에 숨겨져 있던 정주의 입가에선 꽃이 피어나듯 서서히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정주는 미소와 반대되는 침통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수술 날까지는, 혹시 모르니… 주열 군이 입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병원비 전액은 제가 부담….”

“그럴 필요 없어요.”

이주열의 모친은 이전에 보여 주던 모습과는 다르게 차분히 대꾸를 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어라? 이상하다. 안면이랑 흉부, 전부 다 멀쩡한데요?’

엑스레이로 촬영한 사진을 들여다보던 의사가 걸치고 있던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당혹스러워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한 채, 의사가 골절상을 선고하기를 기다리던 두 모자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눈을 크게 떴다.

‘지인짜 이상하다? 분명히 아까만 해도 코가 이렇게, 한쪽이 삐뚤어져 있었는데?’

의사는 화면과 이주열의 안면을 번갈아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주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자기 부기가 빠진 콧대며 옆구리를 꾹꾹 눌러 보더니 ‘아파요? 어때요?’ 하고 물었다. 이주열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온몸 구석구석이 아팠는데, 지금은 의사가 아무리 만져도 가벼운 통증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허허, 제가 아까 잠이 덜 깼나 봅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의사가 머쓱한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가벼운 타박상 말고는.’

“아무 문제 없다네요.”

이주열의 모친이 마뜩잖은 기색으로 의사의 진단을 전했다.

“…엑스레이상으로는, 코뼈고 갈비뼈고 금 간 데 하나 없으니 안심하랍니다.”

그 말을 들은 정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뜨는 척을 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아까는 의사 선생님께서 골절이라 말씀하셨다고.”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이거 순 돌팔이 아니야? 눈대중으로 코뼈 부러졌다고 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멀쩡하다니….”

모친은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여태껏 정주에게 있는 성화, 없는 성화를 다 부리더니 이번엔 그 불씨가 의사에게로 옮겨 간 상태였다.

그리하여 정주는 알 수 있었다. 두 모자는 지금 무척이나 곤욕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자칫하면 주도권이 전복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다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지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자니 그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겸과 이주열 둘 다 가벼운 타박상에서 그쳤다는 사실로 결론이 난 이상 정주는 더 이상 두 모자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서로 사이좋게 주고받았으니 어느덧 상황은 일대일이었다. 정주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주열 군이 크게 다쳤을까 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종, 종합 병원이라고 해서 왔더니만, 의사가 영….”

“의사도 사람이니까요.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죠. 애들도 원래 싸우면서 크는 법이고요. 우리 재겸이도, 주열 군도, 오늘을 본보기로 삼아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친 정주가 이주열을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마주치자, 이주열은 뜨끔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주열은 다소 표정 관리에 서툰 모양이었다.

“하긴 뭐,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의가 있다면… 그 앞에선 웬만한 의사들이라도 돌팔이 취급을 받고 말겠죠. 당연한 얘기네요.”

“…뭐, 무슨 명의요?”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열 군.”

정주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오만 원짜리 지폐 네 장을 꺼내 정확히 반을 접더니, 이주열에게 내밀었다.

“진료비는 이걸로 되겠죠? 가벼운 타박상이니까요.”

당황한 두 모자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이, 지폐를 내민 채로 이주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정주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아, 맞다.”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고 보니까, 주열 군은 엄살이 꽤 심한 편인가 봐요. 고작 타박상에 그렇게 아파하는 걸 보면 엄살이 심한 거 아닐까요? 모두 깜빡 속았잖아요. 연기에 소질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앞으로 연기할 생각 있으면 연락 주세요.”

이주열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 뭐요?”

“원한다면 오디션 자리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음,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주열 군은 깡패나 조폭 같은 역할에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을 잘하니까… 주먹질하는 배역에 딱이겠네요. 성격이 호전적이고 대담하니까요.”

“저, 저기요. 지금 당신, 뭐라고….”

두 모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정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주는 손에 들고 있던 지폐를 한 번 더 접었다. 그리고는 이주열이 입고 있는 교복 재킷의 한쪽 주머니에 곱게 접은 지폐를 다소곳이 꽂아 주었다.

“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칭찬이에요. 칭찬. 어디까지나… 동종업계 종사자로서요.”

정주가 애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하관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고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연락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정주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모자를 원래대로 앞으로 눌러 썼다.

정주가 곧장 등을 돌려 병원 로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캬캬. 유명인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고얀 인간들 같으니. 마스크 안쪽에서 여우의 기분 좋은 캥캥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볍게 뛰어오르는 발걸음은 후련해 보이면서도, 마치 탭댄스를 추듯 홀가분해 보였다.

***

신나게 주차장으로 뛰어나온 정주는 밴을 세워 둔 자리로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병원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인간을 무서워하는 메산이는 겁에 질려 훌쩍거렸다. 하지만, ‘이것이 너의 나리를 위한 길이다.’라며 정주가 기운을 북돋아 주자, 메산이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산이는 아주 잘해 주었다.

정주가 미리 주문했던 내용은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그대로 두되, 내상은 모두 낫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놓고 힘을 쓰면 더 수월하긴 했지만 사람들 눈에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까다롭게 접근해야 했다. 고심하던 메산이는 정주에게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평소 차에 넣어 두었던 종이컵을 건네자, 메산이는 컵을 받아 들고 얼마간 명상에 빠졌다.

그로부터 몇 분이 흘렀을까.

‘뿌에엑.’

눈을 뜬 메산이는 종이컵에 다짜고짜 토를 했다.

‘…….’

난데없이 펼쳐진 광경에 어찌나 놀랐던가. 당황한 나머지, 정주의 머리통 위로 여우 귀 두 짝이 폴짝 튀어나왔다. 덕분에 귀를 집어넣기 위해 한참 동안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오늘 아침에 이슬을 무지막지하게 마셔 놨는데 다행이에요. 헤헤. 이건 제 몸 속에 고여 있던 이슬로 만든 정화수입니다. 힘을 쓰지 않아도, 이걸 마시면 내상이 씻은 듯이 나을 것입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주열은 홀로 떨어져 있는 사이에 메산이와 접촉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약간만 지체되었어도 원래 결과대로 나왔을 것이었다.

앞선 두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면 아주 고소해 죽겠다. 사회적 체면이 있어 뭐라 더 쏘아붙이지 못한 게 한이었다. 정주가 캥캥 웃으며 시꺼멓게 선팅된 조수석 문을 활기차게 열어젖혔다.

“이야, 우리 장한 풀떼기! 진짜 잘했….”

놀란 정주가 두 눈을 의심하며 마스크를 쑥 내렸다.

“…어?”

차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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