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2)화 (22/348)

#22

재겸이 집에 돌아온 것은 해 질 녘 무렵이었다.

“나리-! 다녀오셨습니까?”

현관을 열자마자 메산이가 도도도, 뛰어와 배꼽 인사를 했다. 메산이의 발걸음이 닿은 자리마다 물기가 흥건했다. 재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척하면 척이다. 또 맨발로 놀러 나갔다가 방금 막 지저분한 발을 씻은 듯했다. 재겸의 꾸중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그 노력이 가상하여 재겸은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메산이의 젖은 발을 모른 척하며, 재겸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메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쇼핑백 입구를 기웃거렸다.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 그거… 넥타이.”

재겸은 학교 근처에 있는 교복 가게에 들러 넥타이를 샀다. 그 넥타이 하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책 정리까지 했으니까. 메산이는 쇼핑백을 들고 재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재겸의 분위기가 아침과는 살짝 달랐다. 지친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재겸은 부엌으로 가서 가위를 챙긴 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메산이는 어리둥절 얼굴로 재겸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욕실 문이 열리자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메산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재겸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머리 길이가 확연히 짧아져 있었다. 되는대로 싹둑싹둑 자른 머리카락은 끝이 삐뚤빼뚤했다. 줄곧 재겸을 관찰하고 서 있던 메산이가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나, 나리.”

“응.”

“혹시… 화나셨어요?”

재겸이 젖은 수건을 어깨에 둘렀다.

“왜?”

“그,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메산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 있으셨나요?”

무슨 일이야 많았다. 아침부터 넥타이가 없어 골치가 아팠고, 학주한테 대거리를 했다가 벌점을 받았으며, 날아온 축구공에 얼굴을 맞아 코피를 쏟은 데다가, 넥타이를 빌미로 도서실에 붙잡혀 일손까지 보태야 했다. 하루가 너무 길어도 너무 길었다.

“…….”

재겸은 말없이 메산이를 내려다보았다. 눈치를 보며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팔자에도 없는 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는 눈앞에 서 있는 이 조그만 아이 때문이었다.

언젠가 늦은 밤, 재겸은 창문 너머로 속닥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메산이와 정주는 뒷마당에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굳이 마당으로 나온 이유는 집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가 잠결에라도 재겸의 귀에 들어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둘의 대화는, 그중에서도 메산이의 목소리는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메산아, 별일 없었지? 지난주에 오겠다고 해 놓고 못 와서 미안해.’

‘괜찮아요. 걱정 마셔요, 정주 님. 제가 항상 나리 곁에 있으니까요.’

‘내가 요즘 일이 바빠서… 나 없어도 메산이 네가 재겸이 좀 잘 봐줘.’

재겸은 가끔 궁금했었다. 메산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서울로 독립한 정주가 자주 내려오지 못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설마 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일뿐, 함께 사는 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재겸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멍하니 누워 있던 소년은 그때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라도 만나자. 무엇이든 하자. 설령 흉내에 불과하더라도… 나를 동정하는 저 불쌍한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재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로소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안심한 메산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겸은 그대로 방에 들어가 지갑을 챙겨 나왔다. 메산이는 그런 재겸의 뒤를 졸졸 쫓아 왔다. 현관으로 향한 재겸은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었다.

“나리, 해가 졌는데 어, 어디를 가십니까?”

“요 앞에 있는 가게.”

근처에 있는 가게라곤 정류장 앞에 있는 낡은 구멍가게뿐이었다. 이곳에서 몇 해를 살았지만 재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가게에 들른 적이 없었다. 놀란 메산이가 눈을 크게 떴다. 밖에 나가는 것을 지독히 귀찮아하는 분이 손수 지갑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다니… 설마, 학교에 다니시면서 바깥 생활에 정이라도 붙으신 걸까? 메산이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물들었다.

“무, 무, 무어가 필요하셔서요?”

“열불 터져서 시원한 것 좀 먹으려고 그런다.”

“예?”

“왜. 같이 갈래?”

재겸이 장난스럽게 묻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메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가게에 가겠느냐고.”

“허, 헉… 정, 정말요?!”

“너만 괜찮으면.”

메산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메산이는 재겸을 제외한 인간은 모조리 무서워하는 주제에 바깥 구경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지금껏 재겸은 항상 집에만 있었고, 정주는 머나먼 타지에서 지냈다. 혼자선 도저히 마당을 벗어날 용기가 없던 메산이었다. 메산이의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강하게 흔들리며 미약한 바람을 일으켰다.

메산이가 부랴부랴 조막만 한 신발을 꿰어 신었다. 그러자 재겸이 현관문을 열고 눈짓을 했다. 먼저 나가라는 뜻이었다. 메산이가 상기된 얼굴로 마당에 발을 디뎠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둘은 마당을 지나서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조금 쌀쌀했다.

좁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걷다 보니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멀리 불 켜진 구멍가게가 보였다. 재겸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메산이가 눈치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재겸은 군말 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작은 온기를 쥐었다. 가게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한 메산이가 움찔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가게 앞에는 낡은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재겸이 버스에서 내릴 때만 해도 평상은 비어 있었는데, 지금은 허리가 굽은 노인 두세 명이 앉아 있었다.

“왔어?”

인사를 건넨 쪽이 가게 주인인 듯했다. 주인은 초면인 데도 몇 번은 마주친 사람처럼 인사를 했다. 나머지 노인들은 평상 한가운데에 김치를 꺼내 놓고 사이좋게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재겸은 별 말 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메산이는 어느새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재겸의 티셔츠 자락을 움켜쥔 채 몸을 뒤로 숨기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상인가?”

“네?”

“어린 아가 동상이여?”

주인의 말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다른 이들이 재겸과 메산이를 힐끔거렸다. 그에 당황한 메산이는 재겸의 등 뒤에서 코만 빼꼼 내놓은 수준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입을 달싹였다.

“아뇨, 동생 아닌데요.”

“형제 아니여? 그럼 누구여?”

“동생은 아니고… 그냥 아는 애요.”

“그려어.”

주인이 더는 묻지 않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은 메산이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메산이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미닫이로 된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재겸의 눈에 들어왔다. 바깥에 놓여 있는 낡은 냉동고였다. 재겸은 가게 안에 들어가는 대신에 냉동고로 향했다.

냉동고의 높이는 메산이의 키와 얼추 비슷했다. 점심에 먹었던 쭈쭈바를 떠올린 재겸은 냉동고의 문을 열었다. 재겸이 허리를 숙이고 냉동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원한 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키가 작은 메산이 역시 까치발을 들고 냉동고 안을 구경했다. 하지만 재겸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쭈쭈바는 보이지 않았다.

재겸은 별수 없이 막대기가 달린 하드를 골랐다. 오랫동안 냉동고에 있었는지, 하드 포장지에는 차가운 성에가 잔뜩 붙어 있었다. 지갑을 꺼내 값을 치른 뒤 포장지를 벗겼다. 길쭉한 사각형으로 된 아이스크림은 연두색이었다. 재겸은 메산이의 손으로 막대기를 넘겨주었다.

“나리, 이게 뭐예요?”

메산이가 평상에 앉은 노인들을 힐끔거리며, 조그맣게 물었다.

“포장지엔 메루나라고 써 있던데.”

“이, 이걸 먹으면 열불이 꺼지나요?”

메산이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재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임마.”

메산이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이 섰는지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달고 차가운 느낌에 메산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맛있냐?” 메산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예?”

“네 친구들한테 자랑해.”

“무엇을요?”

“나 이런 것도 먹어 봤다고.”

메산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야. 녹는다. 일단 먹어.”

재겸은 메산이의 나풀거리는 빈손을 끌어당겼다. 일전에 정주와 약속했던 대로 한 달을 채우는 날, 재겸은 미련 없이 소원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나를 떠나서 각자 제 삶을 찾아가기를.

재겸과 메산이는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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