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4)화 (14/348)

#14

조영우가 나비의 존재에 관해 언급할 때까지만 해도 재겸은 긴가민가했었다.

조영우를 따라다니는 나비는 평범한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영우는 나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범인이라도 기가 약해져 있거나, 특정한 장소에 가면 일시적으로 눈이 열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귀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둘 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혹시나 하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은 조영우가 윷점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조영우는 최근 들어 점괘가 잘 맞는다는 말을 했다. 점괘가 들어맞기 시작한다는 것은 귀재로서의 능력이 점점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도꼭지로 따지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굵은 물줄기로 변하는 것과 비슷했다. 헛것이 자주 보인다는 말로 미루어 아직은 보이다가도 안 보이고 하는 모양이지만, 머지않아 눈이 완전히 열릴 것이다.

조영우는 귀재임이 틀림없었다.

보통 귀재들은 같은 귀재를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연스레 동질감에서 비롯된 호감을 갖기 마련이지만 재겸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재겸은 귀재를 몹시 싫어했다.

적당히 어울려 줬던 것은 조영우가 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겸은 오히려 범인에게 훨씬 너그럽게 구는 편이었다. 범인은 이 바닥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어차피 적당히 둘러대고 숨기면 그만이니까. 조영우가 귀재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 귀재는 똬리를 튼 뱀처럼 언제든지 간사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재겸은 생각했다. 이러한 뼛속 깊은 불신은 과거의 누군가로부터 얻은 깨달음이었다.

재겸은 정류장 벤치에 앉아 홀로 버스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겸의 기분도 점점 바닥을 쳤다. 유달리 피부가 하얗고 유약해 보이던 얼굴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조영우는 얼굴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알기 쉬운 녀석이었다. 자신이 던진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재겸은 불현듯 귓가를 맴도는 희미한 목소리 하나를 들었다.

‘우야, 우야….’

난데없는 목소리에 멈칫한 재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야, 하고 애타게 이름을 불러 대는 목소리는 노쇠해 있었다. 하지만 정류장 근처에 목소리의 주인이라 짐작할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엔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뿐이었고, 학생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귀를 기울이던 재겸이 손을 들어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틀어막자 도로의 자동차 소리, 학생들의 수다 소리, 귓가로 들려오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늙은 여성의 목소리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훨씬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재겸의 예상대로였다. 이 목소리는 범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재겸은 한층 가깝게 들리는 소리에 귀를 집중했다.

‘영우야, 영우야….’

영우? 재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모걸. 한자득의(寒者得衣). 추운 자가 옷을 얻는다. 즉슨, 귀인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 나간다는 의미였다. 조영우는 이 점괘를 두고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해석을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점괘는 마냥 길한 점괘가 아니었다. 어쨌든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선….

“알 게 뭐야.”

재겸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벤치에 주저앉았다. 귀인 같은 소리 하네. 재겸은 조영우가 됐든 누가 됐든 간에, 누군가의 귀인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점괘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다. 조영우의 점괘가 정확하다면.

만약 귀신이랑 관련된 일이라면, 괜히 끼어들었다가 귀재라는 걸 드러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뒷수습하는 것도 귀찮을 테고, 수습하자면 또 구구절절 설명해 줘야 하고, 온통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범인이고 귀재고 다 떠나서 상관없는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불현듯 식판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고기반찬이 떠올랐다.

‘이따 마치면 집에 같이 갈래?’

‘고기 좋아해? 손 안 댄 거야.’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점괘가 나왔거든. 근데 오늘 재겸이 네가 전학을 왔잖아.’

아무리 따져 봐도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없는데….

“버스가 너무 안 오잖아.”

재겸은 결국 짜증을 내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

“학생 거, 맞죠?”

여자의 손안에서 투명한 나비가 나풀나풀 빠져나왔다.

“어, 어떻게 이걸….”

조영우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나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나비는 여자의 근처에서 떠돌다가, 어느새 조영우의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상태였다.

“이게 보이세요?”

“그럼요. 나비잖아요.”

“죄송한데, 저기… 누, 누구세요?”

“여긴 보는 눈이 많네요.”

“네?”

조영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인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조영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지나갔다. 뭐지? 왜 쳐다보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조영우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조영우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중이었다.

“저쪽 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여자는 거보라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상가 뒤쪽의 골목을 가리켰다.

“학생한테 꼭 알려 주고 싶은 게 있거든요.”

“저, 저한테요?”

여자는 그대로 등을 돌려 골목으로 향했다. 내 눈에만 보이는 헛것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나비를 볼 수 있는 걸까. 조영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의미심장한 말과 표정을 보니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민하던 조영우는 머뭇거리며 여자의 뒤를 쫓았다.

인적 드문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조영우를 향해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지레 놀란 조영우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본 여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는 기이할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꼭 마네킹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나비, 저 주세요.”

“네?”

“나비가 싫으시죠? 눈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죠?”

뜬금없는 요구에 당황한 조영우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나비는 학생의 앞길을 그르치기 위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학생한테 흉사(凶事)를 몰고 오는 나비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저한테 주세요.”

조영우가 황망한 낯으로 입을 벌렸다. 나비가 흉사를 몰고 온다니….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바둑알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조영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사정을 훤히 꿰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으….”

그 순간,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조영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싸늘한 여자의 표정만큼이나 급격히 공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뜬금없이 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했다. 조영우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때였다.

“아니면, 이렇게 할까요….”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냥 학생 손으로 나비를 찢어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조영우는 뒤돌아 달리려고 했다. 도망쳐야 한다. 본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끝 하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조영우가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나비가 싫죠? 싫잖아요? 그렇죠?”

바둑알처럼 까만 여자의 동공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대답해요. 나비가 싫잖아!”

마침내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흰자위를 전부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조영우의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초점이 사라졌다. 눈은 뜨고 있지만 의식은 없는, 마치 물고기와 같은 얼굴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조영우는 멍하니 여자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공포심이 사라졌다. 대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죽이세요, 어서.”

분노에 사로잡힌 조영우가 여자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마비된 것처럼 꿈쩍도 않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조영우는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나비를 감쌌다. 주먹 안에서 나비의 날개가 파르르 경련하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지금 조영우의 머릿속엔 오로지 나비를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자의 말이 맞다. 다 이 나비 때문이다. 이 나비만 없어지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죽이세요… 어서….”

조영우가 여자가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그러자, 여자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영우가 손아귀에 힘을 실으려던 순간이었다. 내내 여유롭던 여자의 얼굴에 불현듯 당혹감이 떠올랐다. 여자가 조영우를 향해 황급히 손을 뻗으려는 찰나,

빡-!

간발의 차로 조영우의 몸이 무너졌다. 동시에 나비가 손아귀에서 쏜살같이 빠져 나왔다.

“아, 흐으, 윽….”

앞으로 고꾸라진 조영우가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두개골이 부서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이었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엄청난 통증에, 조영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드렸다.

신음하던 조영우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베이지색 컨버스 올스타였다.

조영우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가방을 메고서,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한 재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조영우가 혼란스러운 눈길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재겸이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 덕분에 흐릿하던 조영우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조영우의 머릿속이 굼뜨게 돌아갔다. 조영우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어, 나비가. 아니 그게, 어떻게… 재겸아. 너, 왜, 여기 있어?”

재겸이 말없이 이마를 긁적거렸다. 일단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서 보다 못해 끼어들긴 했는데,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서 난감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아, 집에 같이 가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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