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싱그러운 어느 봄날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찢어진 창호지 문이 활짝 열렸다. 낡은 초가지붕 위에 앉아 부산하게 몸단장을 하던 산새들이 줄행랑을 쳤다. 문을 열고 나온 아이는 마당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그만 얼굴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이는 흐리멍덩한 눈을 깜빡거리며 잠의 여운을 쫓아냈다.
댓돌 위에는 아이가 벗어 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이는 신발을 꿰어 신고 마당을 빠져나왔다.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아름드리 뻗은 소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멈춰 섰다. 아이는 양팔을 활짝 펼치더니, 집채만 한 나무를 한 품 가득 끌어안았다.
“배고파.”
아이가 나무에 볼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나 배고프다고.”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는 눈썹을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품에 안고 있던 나무를 온 힘을 다해 흔들었다. 그러자 솔방울 하나가 아이의 정수리로 톡, 떨어졌다.
“아씨!”
아이가 정수리를 문질거리자, 나무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흩어졌다.
“그러게, 나무를 괴롭히면 안 되지.”
“네가 떨어트린 거잖아!”
“어허, 스승님한테 너라니. 건방지구나.”
“오호, 뜨등님한테 느라뉘, 근방지구나앙.”
사내가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으나, 아이는 눈꺼풀을 까뒤집으며 사내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는 모습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서까래처럼 두꺼운 가지 위에 정좌를 하고 있던 사내가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성미가 고약한 아이로다.”
아이는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사내는 한 번도 저를 진심으로 나무란 적이 없었다. 반말을 하고 짜증을 부려도 사내는 항상 웃기만 했다. 말로는 스승이라고 하면서도 사내는 저를 늘 동등하게 대해 주었다. 가끔은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친우 사이 같았다.
“무어가 먹고 싶으냐?”
사내의 다정한 물음에 아이가 눈을 굴렸다.
“고기.”
사내가 나무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땅 위로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눈 뜨자마자 고기?”
“응. 고깃국이랑 쌀밥.”
아이는 사내와 같이 다니면서부터 살이 꽤 붙었다. 마을에서 떠돌이 개처럼 생활할 때와는 달리, 아이는 그새 훌쩍 자라 있었다. 그땐 마냥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은 소년이라면 소년처럼 보였고 아이라면 아이처럼 보였다.
사내는 소년을 목전에 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일러 주었다. 수시로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기에 생활이 불안정하긴 했지만 사내와 함께라면 괜찮았다. 항상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잤고, 더 이상 끼니를 거르는 일도 없었다.
아이와 사내는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다. 이번에 둥지를 튼 곳은 산 중턱에 있는 낡은 초가집으로, 어젯밤에 짐을 풀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집이라 먼지가 가득했다. 덕분에 밤늦게까지 집 안 곳곳을 쓸고 닦느라 지쳐 잠자리에 들었었다. 당분간 지낼 집이 생겼으니 이젠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럼 시전(市廛)에 나가 보자꾸나. 가는 김에 덧댈 창호지도 사고.”
사내와 아이는 나란히 산길을 걸어 마을로 향했다. 산속 외딴집에 있다가 인파가 북적이는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졌다. 시전 좌판을 둘러보던 아이의 눈이 들떠 있었다. 흥정을 하는 소리, 좋은 물건이 나왔다며 발길을 붙잡는 소리, 거나하게 흥이 오른 취객의 노랫소리……. 말 그대로 시장 통이었다.
인파를 헤쳐 휘적휘적 걷던 사내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이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잘 말린 육포를 널어 놓은 좌판 앞에서 아이는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많이 컸나 싶어도 영락없이 애구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를 불렀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아이는 용케 사내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아이가 난데없이 뒤로 철퍼덕 자빠졌다.
“이런, 다친 덴 없느냐?”
부리나케 달려온 사내가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아픈지 인상을 쓰며 손바닥을 털었다. 살갗이 살짝 까지긴 했지만,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어떤 놈이 뒤에서 잡아당겼어.”
“잡아당겼다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봇짐을 잡아당겼다. 아이가 뒤를 흘끔거리며 봇짐을 확인했지만 봇짐은 육안으로 봐서는 멀쩡했다. 사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리 내 보거라.”
“뭘?”
“봇짐 말이다.”
아이가 어깨에서 봇짐을 벗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말없이 봇짐을 받아 들더니, 끈을 풀어 봇짐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뭔가를 찾는 듯 손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사내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왜?”
알쏭달쏭한 사내의 표정에 아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사내는 대꾸 없이 봇짐 안에서 전낭(錢囊)을 꺼내 들었다.
“어…?”
엽전이 가득 들어 있어야 할 전낭은 한눈에 보기에도 홀쭉해져 있었다.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전낭을 덥썩 움켜쥐었다. 역시나였다.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전낭 안의 내용물은 지나치게 부실했다.
“뭐야! 이거 다 어디 갔어!”
놀란 아이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설마! 아까 잠깐 부딪쳤던 인간이… 아이는 옷소매를 걷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샐쭉 올라간 눈꼬리에서 분기가 흘러넘쳤다.
“아니 이런 개좆같은 인간을 봤나?”
“…….”
“사지를 어? 포를 떠 가지고 확 그냥, 아주 모가지를 베어서….”
“어허. 그만….”
지나가던 이들이 놀란 눈으로 아이를 흘끔거렸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험한 말에, 사내가 황급히 손을 들어 아이의 코를 잡아 당겼다. 오똑하게 솟아 있던 아이의 코끝이 한순간에 찌그러졌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아이가 눈을 치켜떴다.
“애먼 인간을 잡아서 쓰나. 인간의 소행이면 전낭이 통째로 사라졌겠지.”
“아.”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사내는 전낭을 탈탈 털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남은 건 딸랑 엽전 두 푼이 전부였다. 사내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전낭 속에 돈 귀신이 붙었는가 보다.”
“돈 귀신?”
“그래. 오래 묵은 엽전을 좋아하는 잡귀인데, 전낭 속에 잠들어 있다가 사방에서 돈 냄새가 폴폴 나니 그 틈을 타서 깨어난 모양이야.”
“그럼 어떻게 해?”
돈 귀신은 엽전인 척 둔갑하여, 진짜 엽전들 틈에 끼어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했다. 오래 묵은 엽전일수록 돈 귀신이 잘 꼬였다. 그러다가 더 오래된 엽전 냄새를 맡으면 신이 나서 그쪽으로 이사를 간다. 인간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엽전으로 옮겨갈 때면 자신이 좋아하는 엽전들을 주렁주렁 이고 떠나서, 하루아침에 눈뜨고 돈을 도둑맞는 날벼락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물론, 돈 귀신이 옮겨 간 그 엽전의 주인은 난데없이 전낭이 두둑해져서 뜻밖의 횡재를 했을 것이고.
“미리 확인하지 못한 불찰이지, 별수 있겠느냐? 돈 귀신은 기척이 없어서 잡기 어렵단다.”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수중에 남은 단돈 두 푼을 바라보았다. 반면에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심란한 아이에게, 사내가 이런저런 당부를 늘어놓았다.
“그러니 돈을 보관하는 항아리에는 정결한 소금 주머니를 넣어 놓아야 한다. 잡귀들은 소금에 진저리를 놓기 마련이니 응당 돈 귀신도 물러갈 것이다. 아니면, 엽전을 멍석에 전부 쏟아 놓고 여린 엄나무 가지로 회초리질을 하는 방책도 있단다. 회초리로 엽전을 골고루 내리치면, 둔갑해 있던 돈 귀신이 매를 얻어맞고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음?”
“그래서, 고깃국은?”
“…….”
사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지.”
사내와 아이는 팔도를 떠돌아다니긴 했으나 주머니 사정은 대체로 넉넉한 편이었다. 마을을 옮겨 다니는 동안, 사내는 민간의 의뢰를 받아 그 대가로 수입을 벌었는데 그게 꽤나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 의뢰라 함은 귀재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뜻했다.
사내는 삿갓을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집주인이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할, 그 집에 얽힌 내력을 줄줄 풀어놓았다. 보통은 집에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거나, 계속 반복되는 불가사의한 꿈을 꾼다거나, 집터를 옮기고 나서 몸이 자꾸 아프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일을 해결해 주고 나면 으레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었다. 흑색 장포를 두른 신통한 이가 나타났다는 소문. 그러다 사내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려오는 날이면 그때는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나곤 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었다. 고작 하찮은 잡귀 때문에 한순간에 거덜이 나 버렸다.
“이를 어쩐다.”
사내가 눈을 굴렸다. 당장 어디서 의뢰를 받을 것이며, 고작 두 푼으로는….
“고깃국은 고사하고, 당장 한 끼도 배불리 먹기 힘들 것인데….”
사내의 말에 아이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내는 손바닥 위에 놓인 두 푼을 보고 무언가 곰곰이 헤아리는가 싶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가 싶더니 덥썩, 아이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만 있어 보거라.”
눈을 댕그랗게 뜬 아이를 뒤로하고, 사내는 비뚤어진 삿갓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흑색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잠시 뒤, 사내는 손에 큼지막한 주머니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이것을 사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먹을 건가? 뭘 사 온 거지? 궁금해진 아이가 까치발을 들자, 장신의 사내는 무릎을 굽혀 주머니 안에 든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이게 뭐야?”
“내 이걸로 제자에게 고깃국을 사 줄 생각이다.”
사내는 곱게 깎아 낸 나무토막 네 개를 가지런히 내밀었다.
“이건 윷이라는 거란다.”
어리둥절한 아이의 표정에, 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월이면 이 윷가락을 던져서 놀음을 하는데, 해 본 적이 있느냐?”
“있겠어? 그동안 여기저기 빌어먹고, 얻어터지면서 사느라 바빴는데.”
“…….”
물어 뭐 하니. 사내는 머쓱하게 턱을 매만졌다.
“남은 두 푼으로 이거 산 거야?”
“그래, 이걸로 돈을 충당하련다.”
“어떻게? 이걸로 놀음을 해서 돈 벌려고?”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음, 애석하게도 그런 데는 소질이 없구나. 대신 다른 데 소질이 있잖느냐?”
“뭔데?”
“윷가락을 던졌을 때, 패의 결과에 따라 점사를 봐 주는 것이다.”
“이걸로 점을 친다고?”
“그렇지.”
사내가 웃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이 괜찮은 곳에 판을 벌여서 오가는 행인에게 윷점을 쳐 주는 거지. 윷점을 칠 때는 윷을 세 번 던져 결과를 보는데, 주역의 64괘를 바탕으로 괘사를 풀이한다. 따라서 윷점을 쳐서 나오는 패 역시도 총 예순네 개나 되지.”
“예순네 개? 그걸 다 알고 있어?”
“그럼, 내 주역을 닳도록 읽었는데.”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내는 평소 서책을 즐겨 읽었고, 따라서 문장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는 것이 많다 싶었는데, 설마 예순네 개나 되는 패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건가? 아이가 감탄하자 사내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열댓 개밖에 모른다.”
“…….”
장난하냐.
“그럼 나머지는?”
“말했잖느냐, 나머지는 모른대도.”
“근데 어떻게 윷점을 쳐?”
“말했잖느냐, 소질을 살리면 된다고.”
사내가 아이를 이끌고 빈 좌판의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봇짐을 펼치더니 아이에게 윷가락을 건넸다. 아이가 멀뚱멀뚱하게 서 있자, 사내가 손짓을 했다.
“던져 보렴.”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윷을 봇짐 위로 던졌다. 데굴데굴. 나무토막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청쾌해서 듣기 좋았다. 근데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람. 물끄러미 패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재차 손짓했다. 아이는 두 번 더 윷을 던졌다.
“보자. 도, 도, 개. 도도개가 나왔구나. 도도개라 하면…”
“도도개. 알고 있는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입창중(鼠入倉中). 쥐가 곳간에 들었다는 뜻으로, 재산이 빠져나간다는 의미지.”
“…….”
“안타깝게도 적중이구나.”
돈 귀신이 전낭에 들었다. 잠시나마 돈 귀신의 소행을 잊고 있었던 아이가 금세 한스러운 눈빛을 했다. 이걸 진작에 알았다면… 숙연해진 아이에게 사내가 웃으면서 다시 윷을 주워서 건네자, 그걸 받아 든 아이가 봇짐 위로 가볍게 던졌다.
“자, 이번엔. 도, 걸, 개. 도걸개로구나.”
“도걸개. 이것도 알아?”
“기자득식(飢者得食). 굶주린 자가 밥을 얻는다는 뜻이다. 흐음, 이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아무래도 고깃국을 먹게 되려나 본데?”
사내의 말에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아이는 어느새 윷점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귀재가 윷점을 치니 딱딱 들어맞는 모양이다. 사내가 또다시 윷을 주웠다. 아이에게 윷을 건네준 뒤, 던져 보라며 손짓했다.
“도, 모, 걸.”
“도모걸, 도모걸, 도모걸….”
뭔가 좀 이상한데. 아이가 눈을 들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거 원래 이래?”
“무어가 말이냐.”
“왜 다 ‘도’로 시작해?”
“글쎄. 그거야 네 손에 달린 우연 아니겠느냐?”
“이건 무슨 뜻인데?”
사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한자득의(寒者得衣). 추운 자가 옷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귀인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 나간다는 의미구나. 흐음, 우리 제자에게 귀한 인연이라 함은 나뿐이니, 스승이 돈을 벌어 제자의 끼니를 해결해 준다는 의미렷다.”
“…….”
아이가 말없이 봇짐 위에 흩어진 윷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윷을 들고 서 있었다. 잠시 뒤, 눈을 뜬 아이가 땅바닥에 냅다 패대기를 쳤다. 매번 사내의 손을 거치다가, 아이가 손수 주워서 던진 이번 패는 ‘도’가 아니라 ‘모’였다.
“사기꾼.”
“사기라니.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그저 소질을 살린 거래도.”
“열댓 개밖에 모른다면서, 세 번을 던졌는데 전부 뜻을 알고 있잖아.”
아이가 눈을 흘겼다.
사내가 큭큭거리며 아이가 집어 던진 윷을 주워들었다. 아이는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언제나 사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실 사내는 ‘도’로 시작되는 괘사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내는 궁리 끝에 아이에게 윷가락을 건네줄 때마다 미약하게 귀기를 실어 놓았다. 윷을 던질 때마다 귀기로 인해 사내가 미리 손을 써 놓은 대로 윷가락이 저절로 넘어갔던 것이다.
“기분이 상했느냐?”
“당연하지. 나는 그 점괘가 다 진짜인 줄 알고 기대했단 말이야.”
“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이는 훽, 등을 돌리고 주섬주섬 봇짐을 챙겼다. 안 그래도 성질 나빠 보이는 눈매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아이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사내가 삿갓을 고쳐 쓰며 난처하게 웃었다.
“내 소질을 살려서, 그 점괘가 다 들어맞게 해 주마.”
아이는 봇짐을 메더니,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고깃국도 필시 먹게 될 것이다.”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좌판을 벗어났다. 저잣거리엔 사람과 잡귀가 넘쳐나서, 저대로 혼자 보내자니 사내는 걱정이 앞섰다. 왜 저리 뿔이 났나.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아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내는 휘적휘적 긴 다리로 그 뒤를 따라갔다.
“매정한 제자야.”
사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
“겸아!”
‘겸아!’
‘재겸아!’
“재겸아!”
놀란 재겸이 휘청거리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
“담임 쌤이 너 교무실로 오라는데.”
눈앞에 서 있는 건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 아. 어….”
말을 마친 아이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재겸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7교시가 지리 시간이었나, 분명히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턱을 괴고 있다가 깜빡 졸아 버렸다. 수업도 종례도 어느새 다 끝난 모양이었다. 교실 안은 방과 후에 남아 자습을 하는 아이들, 교실 청소하는 아이들, 귀가하는 아이들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을 멍하게 있던 재겸은 손목을 주물렀다. 오랫동안 턱을 괴고 있어서 그런지 손목이 욱신거렸다.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재겸은 무심코 비어 있는 의자 하나를 쳐다보았다. 조영우의 자리였다. 먼저 집에 갔나 보네. 하긴, 괜히 화풀이를 했으니….
“…….”
그래서, 결국 고깃국을 먹었던가?
사람들로 넘쳐나는 복도를, 재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헤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