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긴 생머리의 사내, 패현은 윤태희와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했다.
나자가 아니던 시절,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에 키도 작았던 윤태희는 패현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린 귀재들은 처음엔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했다가 발밑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윤태희는 패현의 발밑을 보고도 그 자리에 멀뚱하게 서 있었다. 패현은 오래 묵은 영귀(靈鬼)였다.
귀신은 셋 중 하나였다.
하나는 원한을 가진 귀신으로, 원귀 혹은 악귀라고 불렀다. 원귀는 생에 대한 미련과 한이 강하게 남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케이스였다. 원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며, 악의를 품고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였다. 민간에 발생하는 피해의 대부분은 이 원귀로 인한 것이었다. 다만 구천을 오래 머무를수록 지니고 있던 귀기가 약해지고, 귀기가 약해질수록 원념 또한 점차 약해지면서, 나중에는 이지(理智)를 잃고 모든 것을 망각한 채 감정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살았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른 채, 아무런 목적 없이 구천을 떠도는 존재가 되면 그때부터는 잡귀라고 불렀다. 다른 귀신 중 하나가 바로 이 잡귀였다. 잡귀는 이지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망가진 외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잡귀는 한눈에 정체를 알아차리기 쉬웠다. 이지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자아 역시 없었고, 행동은 마치 짐승에 가까웠다. 원귀와는 다르게 악의가 없는 대신 호기심이 많아 하찮은 장난질을 일삼기도 했다.
마지막 하나가 바로 패현과 같은 영귀였다. 영귀는 앞선 둘과는 달리 가장 드문 경우로, 그 수 역시 현저히 적었다. 영귀는 뚜렷한 이지가 있으며, 평범한 인간과 똑같이 멀쩡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귀는 원귀와는 달리, 인간으로 살았던 생애에 대한 미련과 기억들을 전부 잊은 채로 귀신으로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강한 귀신이었다. 영귀는 살아생전에 강력한 귀기를 지녔던 인간이 죽어서 이승에 남은 존재였다. 잡귀, 원귀와 다른 점이라면 이승을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과 마주치는 나자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날 적이면 습관적으로 발밑부터 살펴보고는 했다. 잡귀라면 겉모습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원귀와 영귀의 경우는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나자들은 귀신에게 뼛속까지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귀신에 시달리며 살았던 불우한 과거가 흉터처럼 삶에 남은 탓이었다. 나자들이 귀신을 맞닥뜨리는 족족 눈에 불을 켜고 사멸시키거나 축귀하려고 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나자들은 여유와 함께 느슨함이 생겨 적당히 지나치기도 했지만, 젊은 나자들의 경우엔 그 대부분이 귀신을 혐오하며 적대감을 가졌다.
하지만 윤태희는 예외였다.
윤태희는 애초에 인간과 귀신의 구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윤태희는 꽤나 별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흔히 귀신 때려잡는다는 축역부의 수석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영귀인 패현과 가깝게 지내는 점도 그랬다. 물론 나자가 되기 전에 맺은 인연이기는 했지만, 윤태희는 나자가 되고 나서도 변함없는 태도로 패현을 대했다.
윤태희가 귀신과 왕래한다는 사실은 석 부장을 비롯한 다른 나자들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도련님은 어딨어?”
따라서 귀신을 이용한 이번 일은 윤태희이기에 가능한, 윤태희여서 벌일 수 있었던 일이다. 김성훈의 몸에서 빠져나온 패현이 아이의 병실에서 훔쳐 온 토끼 인형을 건넸다. 아이의 혼은 바로 이 안에 있었다. 이 인형은 몇 년 되지 않은 아이의 인생 동안, 아이가 깊이 교감하고 애착한 물건이었다. 이런 물건은 혼을 담을 그릇이 되기에 충분했다.
“도련님은 내가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너는 이만 가서 쉬도록 해.”
윤태희가 손때가 묻은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주경 건설이 영험한 바위를 잘못 건드려 아이의 혼이 납치당한 사건은 여기서 종결이다. 물론, 혼을 훔친 건 노한 신령이 아니라 패현이었지만. 윤태희가 귀신인 패현을 사주하여 벌인 일이니, 범인도 윤태희였고 해결사 역시 윤태희였다. 어차피 수석씩이나 된 자가 해결한 일이니 나례청에서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손가락으로 긴 머릿결을 빗어 내리던 패현이 입을 열었다.
“석 부장은 별말 없던가요?”
윤태희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별말이야 많았지. 고작 후임 하나 찾으려고 두 달씩이나 쉬는 게 말이 되냐고 난리도 아니었어. 자기가 후임 한 명 붙여 주겠다면서.”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알잖아. 나는 값지고, 귀한 걸 좋아해.”
“네, 그러시지요.”
“그리고,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이어야 하고.”
초라니 기간을 거쳐 나자가 된 이들은 하나같이 나례청을 향한 충성심이 하늘을 찔렀다. 나자로서 자부심이 드높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석 부장이 데려올 후임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그저 그런 후임은 관심 없어.”
“그럼 어떤 자를 원하십니까?”
“내가 어딜 가더라도 기꺼이 따라올 수 있는 사람.”
윤태희는 들고 있던 인형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설령 그곳이 불구덩이라고 해도.”
***
소년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같았다. 깊고 무거운 암흑. 시간이 마치 멈춘 듯했다. 소년은 이 어둠 속에 영원히 매몰되고 싶었다. 홀로 고립된 이 쓸쓸하고 적막한 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짹짹….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던 소년이 인상을 썼다. 시끄러운 새소리가 어둠을 비집고 끼어들었다. 소년은 눈을 꾹 감고 새소리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런 소년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는 더 목소리를 키워 우렁차게 우짖기 시작했다.
“씨발.”
결국 참다못한 소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야! 메산아!”
소년의 부름에 멀리서 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방문이 활짝 열렸다. 새까맣던 방 안이 한순간 밝아지며 어린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방긋 웃으며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 배꼽 인사를 건넸다.
“나리, 기침하셨습니까?”
“밖에 저 염병할 새 새끼들 좀 쫓아내라.”
소년은 어중간하게 자란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렸다. 길쭉한 목덜미를 타고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곱상한 얼굴은 잔뜩 심통이 난 상태였다. 소년이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너, 쟤네랑 친구지? 빨리 가서 닥치라고 해. 가만 안 둘 거라고.”
“네? 허, 허나… 그리 말했다가 겁에 질려 이곳을 떠나면요? 착한 아이들인데… 어제 산딸기도… 물어다 줬는데….”
메산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그럼 밤에 울라 해. 왜 아침마다 내 방 창문에서 저 지랄인데?”
메산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침에 새가 지저귀는 건 당연한 거야.”
그때, 문 너머에서 대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적절하게 끼어든 남자 덕분에, 난감해하던 메산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정주 님!”
정주가 반색하는 메산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남자, 정주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 하나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 정주는 소년의 허락도 없이 두꺼운 암막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넓은 창문에서 찬란한 아침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소년이 한껏 인상을 쓰며 눈가를 가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커튼 닫아.”
“네가 언제 좋은 말을 했다고? 맨날 쌍욕만 하면서. 그치, 메산아?”
정주는 소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꽤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소년의 눈엔 그저 얄밉게만 보였다.
정주는 묘하게 매혹적인 분위기를 끌고 다니는 남자였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스타일링을 받고 왔는지 완벽한 차림새였다. 머리도 멋들어지게 손질한 데다가 메이크업까지 마친 모양이다.
“애먼 새들 잡지 말고 얼른 일어나.”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정주를 흘겨보았다. 안 그래도 샐쭉 올라간 눈꼬리에 한층 날이 서 있었다.
“왜 왔어.”
“너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왔지. 빨리 준비해.”
“무슨 준비.”
정주는 대답 대신 팔에 걸치고 있던 쇼핑백에서 상의 하나를 꺼내 보였다. 한 달 전 재단사에게 맡겨 두었던 옷이었다. 귀하게 자란 정주는 기성 제품 대신 값비싼 수제를 선호했고, 소년은 그런 정주에게 아주 돈지랄을 사서 한다며 툭하면 빈정거리곤 했다.
“잊었어?”
정주는 잘 다려진 상의를 소년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소년은 얼떨결에 옷을 받아 들었다. 상의 왼쪽 가슴팍에는 ‘김재겸’이라는 소년의 이름 석 자가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너 학교 다니기로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