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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117화 (완결) (117/121)

117화.

혜서의 가슴이 다시 차갑게 서걱거렸다. 맞잡은 손이 자꾸만 떨려서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서하는 분명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아니야. 그런 거. 그저 잠꼬대였을 뿐이야. 진심이 아니라고 저를 설득하고 달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덮는 게 최선일까. 굵직한 저음이, 혜서의 어지러운 의식을 다시 그에게로 집중시켰다.

“내가 군에 있을 때부터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잠꼬대였어. 매일 밤 악몽을 꿨어. 그 시골에서 너를 다시 만나고부터 멈췄던 것 같아.”

윤서하가 침음 같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어딘가 결연한 눈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야. 죽을 때까지 묻고 가려고 했어.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나 자신이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사람 새끼 같지 않아서.”

혜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맞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뭔가가 땀구멍을 한순간 틀어막은 것처럼 긴장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4년 전 그 순간부터……. 네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던 그날. 지금은 거짓말인 걸 알지만 그땐 등신처럼 그런 줄만 알았으니까. 그때부터 꿈을 꿨어. 군에 있는 내내, 널 내 손으로 죽이는 악몽을. 그리고 그 꿈 다음에는 어김없이…….”

윤서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혜서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는 지금 죽기보다 힘든 말을 토해 내려 하고 있었다.

“형이 죽길 바라는 또 다른 꿈을 꿨어.”

혜서야. 너 때문에 나는 윤서준을 그토록 미워했어. 형만 없었다면, 존재 자체마저도 부정했지. 너 때문에, 내게 그렇게 잘해 줬던 내 형을.

짧은 신음이 흘렀다. 혜서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린 제 입을 막았다.

“언젠가 네가 물었지. 네 고백 때문에 형을 조금이라도 원망한 적 있냐고. 그때 아니라고 했지만…… 오직 너만 원망하고 있던 것처럼 지껄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

그가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괴로운 나머지 숨쉬기도 버거워 보였다.

“수없이 생각했어. 형만 없었다면. 형만 없으면 그럼 너와 날 가로막는 것도 없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서…….”

“형은 내게 형 이상의 사람이었어. 늘 바빴던 부모님 대신 내 보호자 역할을 해 주었고 때론 가장 가까운 친구였어. 서로 숨길 게 없었지. 그런 형을 원망하는 내 마음을…… 부정하려 애썼어. 애쓰면 애쓸수록 너에 대한 증오도 더 커 가는 것 같았지.”

사실은 그리움이 훨씬 더 컸지만 스스로를 열심히 세뇌시켰다. 이 집착의 감정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미움일 뿐이라고. 그래서 훈련마다 더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스스로를 혹사시키려 사력을 다했다. 그 노력도 무색하게, 결국 혜서가 뇌리를 떠나는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온 거야. 형이 사고를 당했다고.”

윤서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침몰하던 무거운 시선이 혜서의 젖은 눈을 더듬어 찾았다. 그의 눈도 그녀의 것 못잖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칠 것 같았지. 나 때문이라 믿었어. 내가 그렇게 끊임없이 형을 원망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마음 때문에…… 형이 그런 사고를 당한 거라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어. 그러다 장례식 때 임 비서를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된 거야. 사실은 그 차가 송현을 지나던 길이 아니라 일부러 거기 들른 거였다는 걸. 거기서 만난 사람이 너였다는 것도.”

“…….”

“형의 수행 비서도 몰랐던, 어떤 다른 용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형이 사고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너였고. 그때부터였어. 내 마음이 지옥이 된 건.”

미칠 것 같은 심정을 넘어서서,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래서 둘만의 약혼을 상징했던 반지를 불 속에 던져 넣기까지 했지만 그다음의 행동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손이 멋대로 움직여 불 속을 파고들어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형에 대한 죄책감은 강혜서를 향한 원망과 증오로 전이되었다.

네가 형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더라면. 아니, 역시 형이 처음부터 없는 편이 나았어. 형만 없었더라면……. 아니, 이 지옥은 결국 강혜서가 만들어 낸 거야. 아니, 아니야. 웃기지 마.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결국 윤서하 네 좆같은 감정 때문이잖아. 이 지경이 되어서도 결국 그 여자를 잊지도 못하고 손에 넣지 못해 미쳐 가는 너 자신, 바로 너 때문이라고!

영원히 결론 나지 않는 심연 아래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끝없는 추락 속에서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이 지독한 악연의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해서, 강혜서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서 누구와 있든, 절대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어떻게든 제 옆에 다시 데려다 놓고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 외에는 그가 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제대하고 얼마 안 있다가 사람을 붙였어. 네가 거기서 어떻게 사는지, 만나는 남자는 없는지, 하루 일과는 어떤지 일일이 보고를 받았지.”

혜서가 조금 놀란 듯 미간을 좁혔다. 해원의 존재를 알게 되어 찾아온 날, 하필 김상범이 애 아빠를 들먹이며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우연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 전부터 사람을 붙여서 동향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니.

“미안해. 그때는 복수하기 위한 감시라고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집착이었어. 네가 뭘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미칠 지경이었던 거야. 그러다 해원이에 대해서도 알게 됐지.”

그는 단 한 번도 해원이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나 과정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창들 사이로 흘러든 소식이라 해 왔지만 그 전부터 윤서하가 심어 둔 인편을 통해서였다.

“주인집 손녀인 줄 알았던 어린애가 널 엄마라고 부르더란 보고를 듣고 바로 조사시켰어. 아이의 유전자 검사 역시.”

“…….”

“반신반의했어. 당연히 내 아이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만약 다른 놈 자식이면 어떡하지……. 그동안 서준 형과의 접점은 없었으니까 혹시 그새 다른 새끼를…….”

그는 괴로운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검사 결과야 어떻든 둘 다 데려올 생각이었어. 설령 다른 놈의 아이라 해도. 우리 집엔 내 아이인 걸로 해서 호적에 넣고 평생 너와 나, 둘만의 비밀로 만들 셈이었지. 어쨌든 널 내 옆에 붙들어 두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작정이었어. 그보다 더한 것도.”

“서하야…….”

혜서가 울 것처럼 눈을 말갛게 떴다.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서하 널 그렇게 떠나고 다른 남자와……. 내 인생에 다시는 다른 사람…… 없을 거라 결심했는데. 아니, 결심할 필요도 없었어. 어차피 내 마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으니까…….”

참았던 울음이 왈칵 터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혜서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떨었다. 깊은 안도감 위로, 지난했던 시간에 대한 회한이 물밀 듯 밀려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까. 우리 둘 다 이토록 서로밖에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람들이었는데.

크고 단단한 팔이 그녀를 그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따뜻한 온기와 체취, 조금은 거칠게 약동하는 심장 소리가 혜서를 제 안으로 바투 끌어왔다. 가느다란 흐느낌 속에서 혜서가 재차 말을 이었다.

“나한텐 네가 유일했고…… 그 뒤로도 쭉…… 유일한 한 사람이었을 거야. 서하야.”

“알아. 이제는 확실히 알아.”

울음이 잦아들며 혜서가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가 어느새 침대 위에 올라와 그녀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혀 두고 있었다. 서하의 엄지손가락이 뻗어 와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이어 눈물 자국을 훑어 낸 입술이 지그시 눈꺼풀을 누르며 키스해 왔다.

“나야말로…… 나는 단 한 번도 널 놓으려고 한 적이 없었어. 한순간도 포기한 적 없었다고.”

설령 네가 내 형을 직접 죽였다고 해도…… 난 절대로 널 놓지 못했을 거야.

“만약 네가 정말로 형을 좋아했고 형이 무사히 살아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야. 제대하자마자 널 찾아내서, 어떻게든 설득해 멀리 데리고 떠났을 거야. 최대한 멀리. 가족과 인연 다 끊고 명진가 아들로서의 책임과 권리 모두 미련 없이 버리고.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어떤 대가든 다 치를 수 있으니까. 너 하나만 얻으면…… 너 하나만 내 옆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다른 건 뭐든 다 감수하고 버틸 수 있다고 믿었어.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한 조각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을까. 이렇게 한 단어, 한 단어마다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어 두드리는데.

“미안해, 서하야. 그런 엄청난 거짓말로…… 상처 주고 힘들게 해서.”

혜서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하야. 나는…… 난 처음부터 너였어. 늘 그랬어. 4년 전 그 여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랬던 것 같아.”

눈물이 다시 솟아올라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하지만 이제 목은 메지 않았다. 과거, 지난한 세월 동안 흘렸던 것과는 다른 눈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면 안 된다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애써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 너를 사랑해서 너무 행복한 동시에…… 너무 괴로웠어.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해질까 봐 두려웠고…… 서준 선배와 멀어지게 될까 봐…… 그리고 네 미래까지…… 모든 게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어.”

“알아. 네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이제는 다 알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불안해하지도 마.”

따스한 손이 혜서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두툼한 니트 위로 잡히는 골격이 너무 가늘고 연약해 새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작고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버텨 낸 걸까. 다 내려놓고 멀리 떠나 외진 곳에서 혼자 아이를 낳고, 평생 그렇게 아이만 바라보고 살 결심을 하다니. 그런데 자신은 이 가엾은 여자에게 어떻게 했었던가.

그 힘들었던 시간을 달래 주고 감싸 주긴커녕, 다시 만나자마자 애를 데려가겠다고 온갖 겁박에, 협박질을 서슴지 않았다. 기어이 결혼을 강행하고 데려온 이후에도 셀 수 없이 상처를 가했다. 저에게 그럴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이 여자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유린하고 난도질을 했는지.

“혜서야…….”

그가 그녀를 꼭 끌어당겼다. 넓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자 혜서가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서하는 그녀가 제 눈물을 보지 못하도록 더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용서해 줘, 제발…… 다 내 잘못이었어. 형에 대한 죄책감, 애도, 모두 다 내가 떠안고 갈게. 너는 한순간도 그런 생각 하지 마. 거기 얽매이지 마. 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반대야. 지금은 네가 없으면 바닥까지 불행해질 사람들뿐이야. 모르겠어?”

혜서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한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왔지만 그대로 있었다. 한순간 시간이 거꾸로 흘러 4년 전, 그 시절로 되돌아간 착각마저 들었다.

“난 네가 아니면 안 돼, 혜서야. 네가 없다면 나도 없어. 단 한 순간도. 너 없는 이 세상에서 숨 한 번 내쉴 이유조차 없다고.”

-선배. 난 선배가 아니면 안 돼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어. 선배가 없으면.

“그러니까 다시는 나 떠날 생각 하지 마. 응?”

“그럼…….”

혜서가 그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와 서하를 마주했다. 해원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은 얼굴은 4년 전처럼 앳되어 보였다. 젖은 긴 속눈썹 아래, 붉게 물든 눈이 빨려들 듯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럼 나…… 정말 욕심 내도 괜찮은 거겠지?”

혜서가 울먹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도 그의 것만큼이나 다시 습기에 차 있었다.

“너 욕심내도…… 이대로 네 곁에 있어도…… 쭉 함께 해도 괜찮은 거지……?”

-하나님. 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 아이, 욕심내지 않을게요. 감히 주제넘게, 바라서는 안 되는 사람인 거 알면서도…… 다시는 넘보지 않을게요.

오래전 그가 저 때문에 불행해질까 끊임없이 전전긍긍, 연락이 끊겼을 땐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닌지 절망에 휩싸여 헤맸던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며칠 전의 악몽 속, 비로소 할머니의 저주의 족쇄를 뚫고 나온 해방감에 잠시나마 휩싸였던 것처럼.

“혜서야.”

그가 못 참겠다는 듯 다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한참 뒤 포옹을 풀고 혜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제발 욕심내 줘. 마음껏. 그게 내가 가장 원했던 거야.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쭉…….”

그가 혜서를 품 안에 다시 넣었다. 팔을 한껏 벌린 거대한 나무둥치 안에 폭 파묻힌 것 같다. 그런데도 정작 매달리고 있는 것은 윤서하였다.

“너는 해원이만 있으면 나 없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안 돼. 절대로. 나는 그냥 죽을 거야. 콱 죽어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죽게 될 거라고.”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속삭이는 음색에서도 눈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네가 돌아와 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조금씩 죽어 가거나…….”

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기껏 이런 순간에 혜서를 겁먹게 할 순 없었다. 서하는 그녀가 숨막힘을 호소하자 팔 힘을 조금 풀었지만 놓아주진 않았다. 놓는 즉시 품에서 빠져나가 버리진 않을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앞으로도 평생, 늘 안고 살아가야 할 불안감일 것이다.

“앞으로는 네가 하란 대로 다 할게. 내가 잘못한 거 다 용서해 줘. 용서하고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뭐든 할 거야. 그동안 쓰레기처럼 굴었던 거, 매일 때리고 원망해도 다 받아들일게.”

“너 원망 안 해. 그동안 너도 힘들었잖아…….”

혜서는 제 눈가에 글썽한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그의 눈언저리도 닦아 주었다. 서하 역시 죽을 만큼 힘들었었다. 형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 부채감,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은 앞으로도 그의 가슴 한 귀퉁이에 영원히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어디 안 가, 서하야. 네 옆에 이대로 쭉 있을 거야. 네가 너 욕심 내도 된다고 했으니까…….”

원이와 앞으로 새로 태어날 아기, 그렇게 한 가족을 이루어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유일한 한 사람을 만났고 둘 사이에 사랑의 결실도 맺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행복해도 될 것 같았다. 감히 주제넘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닐 것이다.

“당연하지. 너 어디도 못 가. 나 없이는.”

윤서하의 입가에 그제야 웃음이 맺혔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감격에 어린 환희가 방금까지 눈물짓던 얼굴에 가득 퍼져 갔다.

“사랑해, 혜서야. 내 목숨보다 더.”

입술이 그녀의 것 위로 부드럽게 겹쳐 왔다. 그의 이름처럼, 여름의 풀 내음이 어디선가 흘러오는 것 같았다. 혜서의 두 팔이 그의 목에 천천히 감겨 들었다.

창 너머, 창틀 눈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가 퍼져 갔다. 겨울 박새들이 혹한 속에서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창 앞을 날아다니며 유영하고 있었다. 눈이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마저 잦아들 때까지, 평화롭고 안온한 고적함 속에서 부부는 오래도록 입을 맞추고 서로를 품에 안았다.

철마다 진화를 거듭해 가는 사계절 속 섬처럼, 알을 깨고 나와 세상에 적응해 가며 조금씩 진화하는 새들처럼, 둘의 행보도 그렇게 여러 굴곡을 거쳐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뒤돌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행복해질 시간만 남아 있다는 기약처럼, 서하가 혜서의 이마에 키스하곤 입술을 깊숙이 찾아들었다.

어디론가 비상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귓전에 살포시 닿았다 흩어졌다. 눈밭 위로 환하게 비쳐 드는 햇살이 그들의 머리 위에까지 찬란한 꼬리를 늘려 오고 있었다. 폭설 직후 축복과도 같은 빛무리였다.

-<후배는 진화한다>,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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