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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96화 (96/121)

96화.

작은 소동이 일단락되고 이제야 한숨 돌리며 얘기할 틈이 생겨 있었다.

“서하 씨, 미국 출장 취소된 거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왜. 갑자기 와서 싫었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어떻게 된 거야?”

“하루 미뤄졌을 뿐이야. 안 그랬으면 왔겠어.”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다시 냉기 흐르는 평소의 윤서하로 돌아와 있었다. 혜서가 티팟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럼 내일 오전 비행기로 가는 거야?”

“응. 그리고 앞으로 태성 쪽 애들은 초대하지 마. 어머니 입장이고 뭐고 내가 알아서 컷할 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그가 목소리를 낮출 기미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도대체 가정 교육을 어디로 받은 거야. 감히 내 딸한테.”

“아까 애들과 엄마 모두 원이에게 미안하다고 했잖아. 어린애들이 뭘 알겠어. 다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거지. 그보다…….”

혜서는 잠시 틈을 뒀다가 톤을 낮췄다.

“아까 서하 씨…… 해원이 안아 준 거 처음이었어. 아이가 많이 안심하고…… 좋아했을 거야.”

차분함 속에 감격이 어린 음색에 윤서하는 침묵만 지켰다. 어젯밤에 이어 두 번째 포옹이란 말도 굳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태성의 애새끼들을 기겁하게 해 주고 싶은 걸 꾹 참느라 애썼다는 말 역시. 가짜 아빠니 뭐니 어린애가 지껄이는데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강혜서가 낳은 제 아이가 감히 그따위 취급을 받다니.

어느덧 시간도 오후 다섯 시로 접어들어 다들 하나씩 자리를 파할 기색을 보였다. 윤서하는 송현에서 온 손님들 중, 아직 인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깍듯이 인사하고 감사를 표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혜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꾹 눌렀다.

그때 서하의 최측근인 임정석과 시선이 마주쳤고 그가 살갑게 묵례해 보이자 혜서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임 비서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용케 출장이 하루 미뤄지게 되었네요. 아빠가 늦게라도 와 줘서 해원이에겐 운 좋고 행복한 날이었지만…….”

“하하, 타이밍이 조금 급박하긴 했습니다. 공항까지 가셨는데 마음을 바꾸셔서 현지에 연락해 급하게 양해를 구했는데, 다행히 시차도 있었고 그쪽에서도 가족 행사라니 하루쯤은 미뤄도 괜찮다고 이해해 줬죠.”

“네?”

혜서가 눈을 깜빡였다. 공항까지 갔는데 일부러 계획을 변경해 여기 온 거라고?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임 비서가 뜨악한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빈틈없이 철저한 평소와는 달리 꽤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이거 참. 어쩌죠. 전 이미 아시는 줄 알고…….”

“괜찮아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혜서는 엷게 웃으며 다시 윤서하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원이를 돌봐 주신 집주인 할머니에 이어 사무실의 노 대표와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초면인 만큼 허물없는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깍듯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위화감이 없었다. 혜서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순조로운 마무리에 겨우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오늘 윤서하는 그녀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뭣보다 공항까지 가서 일정을 변경하고 여기 와 준 것이 고마웠고, 결과적으로 아이와 거리를 부쩍 좁힌 것 같아서 무척 안심이 되었다.

다들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가까운 시일 내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때였다. 다경이 장보미, 노예진 노무사와 함께 혜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혜서야-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방금 보미 씨가 꺼낸 얘긴데 오늘 밤 우리 밤샘 수다 떨며 회포라도 풀지 않겠냐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지? 해원이도 같이 데리고 자도 되는데.”

“그럼 안 돼? 아차, 밖에선 존대하기로 했으니까, 그럼 안 돼요? 회장님 부부가 잡아 주신 방이 죄다 프리미엄 객실이던데. 나랑 예진 언니 할머니 방도 거실이랑 방이 다 분리돼 있어서 엄청 넓어요. 해원이도 데려와서 재우고 거실에서 우리끼리 뭉쳐도 충분하겠더라고요! 내일 점심 먹고 바로 송현으로 내려간다는데 오전에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고요.”

그동안 묵은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아흑흑, 장보미는 혜서의 원피스 자락을 꼭 잡고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해원이도 이제 언제 또 봐요- 말이 쉽지 시골까지 또 내려오기 쉽겠어요? 응? 네?”

“음…… 알았어요. 그럼 해원이 아빠에게 허락 구해 볼게, 잠깐만.”

혜서는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녀도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 감이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달마다 최소 한두 번은 해원이를 데리고 송현을 방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명진가의 새 일원으로서 은근히 바쁜 일상에 치이다 보니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한 번도 내려가지 못했다.

윤서하는 막간을 이용해 연회실 한쪽에서 임 비서로부터 업무 보고를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다 혜서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중에 계속 듣겠다고 그를 손짓으로 물렸다.

“서하 씨. 혹시 오늘 밤…… 해원이랑 여기서 묵으면 안 될까 해서.”

그녀는 방금 장보미가 밀어붙인 제안을, 제 생각인 척 말을 꺼냈다. 아주 잠깐의 외출도 이유 막론,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던 결혼 초 강제 사항이 아니라 해도 외박 정도는 양해를 구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물론 손 비서도 사이드 룸에 있을 거니까 보안 걱정은 안 해도 돼.”

윤서하는 허락을 구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강혜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공항까지 갔다가 막판에 다시 차를 돌렸을 땐 다른 기대감도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시간에 들어와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게 된 만큼, 오늘 저녁은 그녀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는…….

입 안에 쓰디쓴 맛이 돌았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친정이 없는 그녀로서는 오랜 절친,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지인들이 남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뿐인가. 해원이가 이모, 이모 부르며 무척이나 잘 따르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배신감, 허탈한 상실감에 질투심이란. 그가 곁에 없었던 시간, 지난 2년간의 강혜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솔직히 늘 반갑지만은 않았다. 지독하게 속 좁고 졸렬한 줄 알면서도 그랬다. 그녀와 아이 없이 혼자 빈집에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벌써부터 내키지 않는다.

“아, 방금 아버님, 어머님께서 할아버님 모시고 본가로 막 떠나셨잖아. 서하 씨도 뒤따라가서 저녁 같이 하는 게 어때……?”

사실 저녁 식사까지는 친구들과 윤서하, 그녀, 모두 함께하기를 원했다. 다경은 본래 학교 후배라서 그런지 윤서하가 회사 상사거나 말거나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성격상 노예진 노무사도 기꺼이 합류를 권할 터였고, 장보미가 조금 염려가 되긴 했지만 눈치가 워낙 빨라 분위기에 크게 어긋나는 발언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겠지…….

아직도 그녀를 향한 분노가 두꺼운 잔설처럼 깔려 있는 상태에서 그런 자리에 끼겠다고 할 리가 만무하다. 정작 윤서하의 속도 모른 채 혜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서하 씨만 괜찮다면 보미 씨 객실에서 다 같이 자고 내일 점심 전에 들어올게. 아, 서하 씨 내일로 미뤄진 비행기 시간은…….”

“새벽 네 시엔 나가야 돼.”

“아…….”

그래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그녀와 단둘이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누고, 그리고 두세 시간 눈을 붙였다가 바로 공항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집에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은 그냥 해원이 데리고 우리끼리 집에 가자. 친구들은 다음에 또 만나면 되잖아. 호텔이고 어디고 다 예약해 줄 테니까 오늘은 나와 같이…….

“그럼 출발할 때 전화하면…….”

“됐어. 새벽 비행기 하루 이틀 타 본 것도 아니고. 그럼 해원이 데려올 테니 다른 사람들 마저 배웅해. 난 아이만 데려다 놓고 알아서 집에 갈 테니까.”

아이는 그새를 못 참고 다시 키즈 존에 가 있었다. 아직 남아 있던 직계 사촌 둘도 함께인 듯, 요란한 웃음소리가 홀 반대쪽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윤서하는 돌아서서 빠른 보폭으로 그쪽을 향해 사라져 갔다. 혜서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간에 잘린 말을 힘없이 안으로 삼켰다.

출발할 때 전화하면 배웅 나갈게. 해원이는 이모들, 할머니랑 오랜만에 자도록 손 비서에게 맡기고 다른 기사 편에라도 갈게. 이렇게 오래 출장을 간 적은 없었으니까.

왼손이 찌릿, 욱신거렸다. 강혜서로 인한 정신적 동요가 극심할 때마다 번번이 찾아드는 환상통이다. 애써 통증을 억누르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아이들은 커다란 짐볼 필드에서 볼을 마구 굴리며 놀고 있었다. 하지만 해원은 거기 없었다. 시선을 들어 보니 높은 구름다리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 내려오려 애쓰고 있었다. 호기롭게 올라가긴 했지만 내려올 때는 아무래도 겁이 나는 모양이다. 윤서하는 피식 웃고는 다리 아래까지 다가가 아이를 불렀다.

“해원아. 이리 와, 아빠가 내려 줄게. 이제 나갈 시간이야.”

아이가 그를 돌아보곤 순순히 응, 팔을 뻗었다. 두 팔을 활짝 벌려 그에게 기울어지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때늦은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분명 처음부터 이런 사랑스러움이 보였었는데 왜 부정하고 외면하려고만 했는지.

아이의 어깻죽지를 들고 읏차, 안아 들려 할 때였다. 화상을 입었던 부위, 왼쪽 엄지와 검지가 맞물리는 쪽이 욱신거리며 손에서 힘이 확 빠져 버렸다. 그 순간, 아빠의 손에만 의지해 몸에서 힘을 뺐던 아이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풀썩 떨어져 버렸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나 손 쓸 틈이 없었다.

“해원아!”

한 박자 늦게 소리쳤다. 심장이 쿵, 크게 낙하하며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예전에 아이가 본가의 트램펄린에서 떨어질 뻔했던 순간을 창 너머로 봤을 때,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을 때처럼 심장이 크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해원아! 괜찮아? 어디 봐-”

아아! 흐아아앙- 수습할 새도 없이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필 넘어진 바닥엔 폭신한 안전 매트가 깔려 있지 않았다. 한쪽 무릎이 바닥을 내팽개쳐져 있던 장난감 트럭 위로 내리꽂혀 피가 나고 있었다.

“아아! 아흐, 피- 무서워어! 흐아아아-”

아이는 피를 보자 놀랐는지 더 크게 울었다. 한쪽 무릎은 까져서 피가 나고 다른 쪽 무릎엔 벌써부터 멍이 시퍼렇게 떠올라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별거 아니야. 병원 가자, 어서…….”

해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싫어, 싫어, 혀짧은 소리로 세상이 떠나간 듯 울어 댔다. 나 제대로 잡아 주지도 않고 다치게 한 아빠가 싫어! 미워! 그렇게 들려서 순간 목이 콱 메었다. 윤서하는 아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조그만 몸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 아빠가 놓쳐서…… 미안해. 잘못했어.”

아이의 울음이 조금 잦아드는 것도 같았다. 그는 딸을 부둥켜안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해원아, 아빠가 잘못했어. 울지 마……. 어서 병원 가서 약 바르자. 그럼 금방 나을 거야. 해원아…….”

용서를 비는 음색이 푹 젖어 있었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가슴속, 깊은 곳의 뭔가가 확 터져 나오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닥쳐 그의 심장을 휘감아 왔다. 이 압도적인 해일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막 건넌 전율이 온몸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 자식 위해서라면 내 한 몸 던져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내 한 몸 뼛가루가 되도록 부서져도 애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그게 부모 마음이야. 조건 없는 희생, 절대적인 헌신.

주위에서 가끔 말할 때마다 내심 코웃음을 쳤었다. 심지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JB나 서광의 2세들이 비슷한 소리를 지껄일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냉소적인 생각만 들었다.

아무리 제 새끼라도 그렇게까지 헌신적인 마음이 된다고? 제 배 아파 낳았으니까 모성애는 인정하지만 부성애가 그 정도라니 글쎄.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란 감정이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불쑥 닥쳐오는 것처럼 부성애란 것도 그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지금 막 깨달은 셈이었다.

아이를 아프게 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은 시간을 빠르게 거슬러 첫날, 부녀가 처음 서로를 눈에 담았던 순간까지 닿아 있었다. 새삼 후회가 격렬히 일었다. 왜 그렇게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자 애쓰고 있었을까. 보면 볼수록 제 엄마를 닮아 있었는데. 눈, 코, 입, 보송보송한 귓불의 솜털까지도, 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혜서의 흔적으로 가득했었다.

송현 병원에서 처음 마주했던 순간이 떠오르자 심장이 먹먹해져 왔다. 남의 애 보듯 냉담했던 그 날의 제 모습을 돌아볼수록, 그리고 그런 저를 낯설고 무서운 아저씨 보듯 잔뜩 경계하며 올려다봤던 딸의 눈망울을 되새길수록 회한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차갑게 대할 수 있었을까. 안아 주기는커녕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았다. 심지어 길 가다 마주친 어린애에게도 그보다는 더 따스했을 것 같았다. 오죽하면 임 비서가 저 대신 먼저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어 주고, 매점에 데려가 이것저것 사 주었을까. 정작 아빠인 저는 아이가 성가신 짐짝이나 되는 양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목이 메어 왔다.

해원아. 아빠가 미안했어. 그때도, 지금도…… 이렇게 널 다치게 만들고.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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