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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66화 (66/121)

66화.

“오랜만이네요, 선배.”

삼 년 전 그날 같았다. 뇌리 깊숙이 각인된 첫 만남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그들 앞에 재생된 착각마저 일었다. 하지만 그날과는 달리, 지금의 윤서하는 웃고 있었다.

무람없이 텅 빈 동시에 꽉 찬 눈. 눈빛만으로 누군가의 실체를 도륙하고 갈가리 찢을 수 있다면 혜서는 지금쯤 창틈으로 흘러드는 바람결에 조각조각 날리고 있을 것이다.

“일 년 만이네요. 정확히 일 년 하고 석 달.”

“서…….”

목구멍이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혀보다는 눈시울이 멋대로 반응해 왔다. 뜨거워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벌써 흥건히 차올라 왔다.

“선배는 참 그대로네요.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이 훨씬 더 예뻐요.”

그렇게 말하는 윤서하의 미색이야말로 옅어지긴커녕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군 생활을 증명하듯 한결 날렵하니 도드라진 턱선, 거칠고 도색적인 음영이 날것을 한층 더 강조하듯 이목구비 전체에 너울거리고 있다. 정교하게 빚어진 아름다움,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관능미가 물씬 풍겼다.

숨 막힐 듯 위험한 공기가 흘렀다. 의로운 자의 것, 혹은 살인자의 것- 굳이 따지자면 단연 후자의 것에 가까운 위압감이 소리 없이 혜서의 목을 졸라 오고 있었다.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에 혜서의 눈이 조금 더 움직였다. 흐렸던 시야가 슴벅임 속에서 밝아지며, 윤서하가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질식할 듯한 그 존재감에 흠칫 놀라기도 잠시, 형형한 눈빛이 바로 눈앞에서 번들거리는 바람에 망연자실 얼어붙고 말았다.

한눈에 알았다. 그가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없는 감정들, 지나칠 만큼 적나라하게 전해지는 확실한 감정의 혼재들 틈에서 혜서는 살의를 보았다. 긴 속눈썹 그늘 아래, 살의로 불타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리는 달의 파편 같았다. 금방이라도 동공 전체를 새빨갛게 채워 버릴 것처럼, 증오가 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애도한답시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올 염치가 있었나.”

윤서하가 허리를 낮게 굽히고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속삭였다. 혜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노력은 한낱 무용지물이 되었다. 눈물 한줄기가 저절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윤서하가 다시 입을 뗐다.

“말해.”

“…….”

“형이 일부러 거기까지 간 이유. 그렇게 무리해서까지 그 시간에 널 찾아간 이유가 뭐야.”

“그…….”

그건,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갈라진 쇳소리만 나왔다. 하지만 목청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맨정신에 혀가 도려내진 인어처럼, 절박함에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하지만 윤서하는 그 눈물에 코웃음만 칠 뿐 악문 잇새로 집요하게 대답을 독촉해 댔다.

“말하라고. 왜 갔는지.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음산함을 넘어서서 공포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씨발, 들릴락 말락, 욕설도 혼잣말처럼 목 안쪽에서 긁혀 나왔다.

“나는……. 나도, 서준 선배가 그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모, 몰랐…….”

쾅! 주먹이 벽을 내리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단단한 벽이 등을 싸늘하게 눌러 오고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밀려 구석까지 몰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뭔지도 말했을 거 아냐. 둘이 30분이나 얘기를 했으니까.”

“…….”

“형은 밀회니 밀담이니 그런 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나완 달리.”

그는 과거형을 쓰지 않았다. 이미 고인이 된 윤서준이 아직 실존하는 인물인 것처럼.

“어차피 비밀스러운 대화 따윈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까 말해. 무슨 얘길 했어?”

혜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보다 정확하겠지만, 자꾸만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목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애써 위안이라도 해야만 했다. 막혀 버린 목구멍의 기능까지 대신하듯,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둘이 잘해 보기라도 한 거야? 음? 알고 보니 형도 너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였나?”

혜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젖은 두 눈 가득 경악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당연히 그와 윤서준, 둘 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녀가 윤서하의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도려내기로 결심한 바를,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서하는 몰라야 했다.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숨겨져야 했던 윤서준의 감정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김 비서에게 들었어.”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윤서준의 수행 비서였다. 당시 중태에 빠졌지만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쳐 조금씩 완쾌 중이라고 들은 바 있었다.

“작년 8월. 일부러 봉안당에도 들렀다던데. 꽃까지 준비해서.”

또 다른 충격이 혜서의 뇌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아, 그 사람이 서준 선배였구나.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 못 보던 프리저브드 수국과 여러 꽃이 있었는데 그게 윤서준이었다니. 자신을 향해 있던 감정이 조금 더 손에 잡힐 듯 느껴지자 다시금 가슴이 메어 왔다.

윤서준은 한 가지 기대감을 품고 그곳에 발걸음을 했을 것이다. 제 짝사랑의 감정을 거절하고 인사도 없이 멀리 떠나 버린 후배, 연락이 두절되어 안부도 모르는 채 모친의 봉안당을 수소문해 일부러 기일에 찾아갔을 것이다. 거기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산적한 업무 때문에 기일에 모친을 찾아가지 못했다.

“대답해. 둘이 서로 마음을 확인이라도 한 거냐고- 그래서 잘해 보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된 건지!”

혜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윤서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해명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실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사실 그대로 털어놓아야 하리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까닭에 그저 눈을 꾹 감고 윤서하의 이어지는 폭언을 견뎌 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솔직히 자백해. 형을 거기까지 오게끔 불러낸 거…… 정말 아니야? 처음부터 안 될 거 알고 포기하고 조용히 처박혀 살려고 해 봤지만…… 어떤 계기로, 형도 사실은 너한테 감정이 있었던 걸 뒤늦게 알고 그래서 둘이 만난 거 아니냐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제발…… 이러지…… 흑……!”

윤서하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뻗어 혜서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녀가 거칠게 몸부림을 치자 팔꿈치며 손목을 다시 부러뜨릴 듯 거칠게 쥐고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럼 말을 해, 무슨 얘기를 했는지! 형이 고백이라도 했어? 응? 그리고 너도? 말하란 말이야!”

악문 잇새로 밭은 숨결이 흘렀다. 혜서가 숨을 헐떡이며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무용한 몸짓일 따름이었다. 윤서하의 악력에서 벗어나기란 거대한 바위를 뚫고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해 보였다. 그는 혜서의 어깨를 부서져라 쥐고 마구 흔들어 대다 창 너머, 아래쪽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에 그 고문을 멈췄다.

“혜, 혜서야! 꺄악, 저 사람 누, 누구야! 누군데- 누가 좀 도와주세요!”

라운지와 이어진 정원을 거닐다 무심코 2층을 올려다본 다경이 이 광경을 목격한 것 같았다. 커튼이 반쯤 쳐져 있어 등을 돌리고 선 서하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혜서는 확실히 보였을 것이다.

“다, 다경이가…… 누가 오기 전에 나는, 나는 이만 갈…….”

“입 닥치고 조용히 해. 네가 이 방에서 나갈지 말지는 내가 정하니까.”

혜서는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비틀거렸다. 입 닥치고 있으라는 가차 없는 명령과 일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 사이의 간극이 너무도 컸다.

윤서하는 창 쪽을 흘깃 보고 다시 혜서를 돌아보았다. 두 손은 더 이상 그녀를 붙들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지도 않았다. 육중한 산처럼 혜서 앞을 우뚝 막아선 채로, 그가 오른손으로 혜서의 왼쪽 손목을 다시 움켜잡았다.

“아, 앗……!”

아픔은 잠깐, 그제야 서하의 왼쪽 손등을 가로지른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걸 더 살펴볼 겨를은 없었다. 다음 순간 그가 혜서의 소맷자락을 들추고 팔찌를 강제로 비틀어 빼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우악스럽게 빼냈던지, 가느다란 손목의 툭 튀어나온 뼈에까지 새빨갛게 테두리 자국이 찍혀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이건 왜 아직도 차고 다녀. 이런 싸구려를. 다이아몬드도 곱게 상자째로 돌려보낸 네가. 그 고고하고 잘나신 강혜서 님이.”

혜서는 입술만 달싹거리며 조용히 떨기만 했다. 울혈처럼 붉게 자욱이 그려진 손목을 방어하듯 움켜쥔 채,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윤서하는 재앙의 표식이나 되듯 팔찌를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랑 나랑 연관된 건 다 버려야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안 그래? 다 짓밟히는 게 맞아. 나도 그 반지 진작에 불태워 버렸거든.”

고저 없이 온화해서 더 섬뜩하게 들렸다. 다음 순간 윤서하는 팔찌를 열린 창 너머로 던져 버렸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건물이 위치한 곳은 웬만한 언덕 높이였고 팔찌는 1층의 테라스 옆으로 비껴가 저 아래, 울창한 숲 어딘가에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혜서의 시선은 망연자실 창 너머로, 그리고 다시 윤서하의 왼쪽 손등으로 되돌아왔다.

“왜. 이거…… 궁금해?”

그가 손등을 들어 보였다. 조금 전 다경이 비명을 지른 후, 책상 위 인터폰에 연신 불이 깜짝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혜서의 재킷 주머니에서도 진동음이 계속됐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는 즉시, 그것마저 낚아채 창밖으로 던져 버릴 것 같았다.

“혹시라도 착각하지 마. 전에 지껄였던 그런 건 아니니까.”

전화로 마지막 이별을 고했을 때 자해, 탈영 시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 아무 말이나 내뱉었던 기억이 혜서의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시선이 맞춰진 그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윤서하는 혜서의 머리가 다시 내려가지 못하도록 턱 아래, 목 안쪽을 받치곤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어, 너 때문에. ……형 때문에.”

젖은 눈이 빠르게 붉어졌다. 그의 두 눈에서도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혜서 쪽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는 그녀의 뺨 위를 다시 그어 대는 눈물을 노려보며 물었다.

“물론 슬프겠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남자가 죽었으니…… 얼마나 슬퍼? 얼만큼 괴롭냐고.”

“…….”

“나보다 더해? 나만큼 슬프고, 괴롭고, 절망스럽냐고!”

혜서는 입술만 달각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파들거리며 떠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느다란 목 안쪽을 틀어쥐려던 윤서하의 손이 흠칫 아래로 떨어지며 대신 어깻죽지를 움켜잡았다. 그 꿈에서처럼, 저도 모르게 목을 잡고 힘을 가하려던 자신에게 한순간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현실에선 차마 저지를 수 없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몰랐다.

“자그마치 이십오 년이야. 이십오 년 동안 내 형으로 살아온 인간이야. 그것도 좆같이 아주 다정하고 좋은 형으로.”

그의 뺨에도 기어이 투명한 선이 어렸다. 혜서는 그에게 붙잡힌 채 조용히 흐느꼈다. 윤서하가 이렇게 우는 건 두 번째였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던 그 시절, 제발 저와 사귀어 달라고 무릎 꿇고 매달렸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이런 비참한 기분을……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상실감을 네가 알기나 해……?”

하지만 그때의 눈물과 지금의 것은 너무도 달랐다. 간절한 소망과 애절한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미움과 증오,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라면 혜서도 못지않다. 오히려 부모님과 할머니, 가족을 아예 송두리째 잃은 그녀 쪽의 아픔이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그런데도 혜서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아니, 너 따윈 절대 몰라. 몸은 동생이랑 실컷 질척하게 붙어먹고, 마음은 형을 내내 품어 왔던 너 같은 게 알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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