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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56화 (56/121)

56화.

혜서는 히끅거리는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고기 굽는 매캐한 연기와 냄새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뒷문을 열고 후미진 어둠 속에 발을 디디는 즉시, 다리가 꺾여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서하야, 제발……! 제발 그만해. 그냥 받아들여 줘…….

목소리가 꺽꺽대며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둔통은 귀에 바짝 붙인 귀부터 시작해 젖은 얼굴 전체에 서서히 번져 가고 있었다. 혜서는 이를 꽉 틀어 물었다. 빠개질 듯 저린 어금니 사이로 색색, 모래 알갱이처럼 건조한 숨이 삐져나왔다. 폰 너머로 무시무시하고 처절한 협박의 말들이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듣고 있어……? 너 절대 가만 안 둔다고. 안 놔 줄 거야. 어디 멀리…… 해외로 떠난대도 잡아서 끌고 올 거고, 다른 새끼 만나는 날엔 그놈 인생까지 죄다 망가뜨려 놓을 거라고. 내가 못 할 것 같아……?

이가 덜덜 떨려 왔다. 겁박이 아니다.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는 협박이 아니라 경고이자 예고인 것이다. 혜서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기어이 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야 깨달았다.

윤서하는 절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길고 험난한 터널에 몸을 들이게 되겠지. 보잘것없는 그녀 한 명과 가족 전체를 맞바꾸는 과정 동안 수많은 상처와 절망을 맛보게 될 터였다. 신효림이 말한 대로 그의 조부가 손주의 일탈을 가만두고 볼 리 없으니. 사업이든 뭐든, 손만 대면 회복 불가능할 경지까지 무너지게끔 손을 쓸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과 등지고 세상에 혈혈단신 남겨진 것 같은 고독감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부르짖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불행했던 자신과, 그 속에서 절대적인 애정과 행복을 누려 온 윤서하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 사람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재력과 배경의 차이, 그 이상의 것이었다.

윤서하를 그녀와 같은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태양처럼 밝고 찬란한 사람이다. 음지의 달 조각, 초라한 파편 같은 강혜서 옆에 나란히 설 존재가 아닌 것이다.

“서하야. 나…… 고백할 거 있어.”

그래서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강혜서란 암적인 존재를 윤서하의 인생에서 확실히 도려낼 수 있는 방법. 서하 스스로 그녀의 손을 놓고 뒤돌아설 수 있는 확실한 한마디.

“나…… 예전에 말했지. 너랑 이렇게 되기 전부터, 아니 과외로 만나기 전부터…… 실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맺어질 수 없어서, 그래서 포기했다고.”

폰 너머로는 정적이 감돌았다.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 맴도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혜서는 다시 입을 뗐다.

“내가 처음부터…… 졸업까지만 너랑 사귈 거라고 말했던 거…… 그 사람 때문이었어. 아무리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저도 모르게 다시 입술에 힘을 주었나 보다. 다시금 짙은 피 맛이 올라왔다.

“그리고 너랑 만나고 나서도…… 최근까지도…… 깨달았어. 내가 아직, 아직도…… 그 마음이 여전하다는 걸.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걸. 네가 아니라…….”

혜서는 죽을힘을 다해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였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이렇게라도 해야 서하가 그녀를 버려 줄 테니까.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결국은 배신감에 분노하고, 결국은 질려서 내동댕이쳐 버릴 터였다.

-웃기지 마. 강혜서. 너도 나 좋아하잖아. 씨발, 좋아하는 척하는지, 아닌지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

폰이 부서질 것 같은 고함에 귀가 먹먹했다. 혜서는 휴대폰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물론 너도…… 서하 너도 좋아했지만…… 미안해. 그 사람, 나는 역시 그 사람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

다시 적막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음색이 이어졌다.

-그럼…… 내가 기다릴게. 다 정리되고 나만 보일 때까지……. 그러니까 그냥 옆에만 있어.

혜서가 눈을 감아 버렸다. 눈물이 뺨을 적시다 못해 턱을 타고 옷깃을 적셨다. 당장이라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그녀를 놓지 않으려 하는 그를, 오히려 제 쪽에서 붙잡고 마구 매달리고 싶어 세포 하나하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안 돼……. 그러고 싶지…… 않아. 미안해, 서하야.”

그리고 그의 가슴을 찢어발길 한마디를 더 보탰다. 기다리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도록. 이번에야말로 윤서하는 확실히 물러설 것이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언젠가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놓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다 보니 마음이 더 깊어졌고…… 이제는 널 볼 때마다…… 흑, 으……흑…….”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살면서 그 사람과 다시 연이 닿을지. 물론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버렸지만.

덧붙임 뒤에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예전에는 터무니없다고만 여겼다. 노래 가사나 드라마, 영화 속에서 나오는 이별의 말들을 엉터리라고 치부했었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짓말까지 했던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윤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뜻 듣기에 기계처럼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그 메마름 너머의 감정이 혜서의 귀에는 어렴풋이 읽혔다. 모든 고통이 무색무취의 포장 속에 압축되어 조용히 아우성을 쳐 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새끼가 누군데. 날 볼 때마다…… 뭐가 어떻다고 말하려고 했었잖아.

설마. 설마 아니지? 지금의 관계가 되기 전 몇 번 떠보듯 물었던 상대가 있다. 하지만 그때 강혜서는 뭐라고 했던가. 어떤 반응을 보였었지? 그래. 아니라고 화를 내고 어이없어했잖아. 그러니까 아닐 거다. 그 사람만 아니면 누군들 상관없지. 어떻게든 혜서가 마음을 잡고 저만 볼 수 있도록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반드시…….

혜서는 그 짧은 물음 속에 함축된 그 감정을 오롯이 읽었다. 그래서 더는 흐느끼지 않았다. 남은 오열은 모든 것이 끝나고 토해 내도 늦지 않다.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부러 차갑고 싸늘하게 이름을 읊었다.

“서준 선배.”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말들은 오직 둘만이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알았겠지, 우리가 절대 안 되는 이유. 널 볼 때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윤서준이 떠오를 테니까.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 윤서준과 잘될 기회가 있다 해도, 이제는 그마저 불가능해진 이유를.

“서준 선배, 오랫동안 좋아했어…….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눈에 반해서 지금까지 쭉……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야. 지금도…… 지금도 사랑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서하야……. 우린 더는 안 돼.”

내가 그런 여자니까. 마음은 형에게, 몸은 동생과 붙어먹은 쓰레기니까.

“너에게 받은 거 다…… 돌려주진 못하겠지만 반지…… 반지만은 확실히 되돌려 놓을게. 이미 사무실 네 방에 가져다 놓…….”

쾅, 소리에 혜서의 말이 멈췄다. 뒷문이 덜컹 열리며 고깃집 직원이 기름에 찌든 철판이며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직원은 안쪽을 가리켜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맞다. 손님, 안에 단체석 자리에서 찾으시는 것 같던데요. 화장실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앗, 괜찮으세요?”

“아, 네. 괜, 괜찮아요. 들어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얼굴이 엉망이었을 것이다. 직원이 다시 안으로 사라진 후 폰을 내려다보았다. 통화는 끊겨 있었다. 혜서는 다시 후문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다시 구토가 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해 게워 낼 게 없는데도 속은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어 댔다.

서하야…….

장기가 뒤틀리는 괴로움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제 거짓 고백을 분명히 들었다.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하. 이제 정말 끝이구나.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었다. 진심을 다해 한 말이니 그 역시 허튼소리로 듣진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진심이었다. 윤서하의 이름을 윤서준으로 바꾼 것만 제외하면.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났다. 잠깐의 일탈을 끝내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제 서하는 본인의 세계로, 강혜서는 강혜서의 세계로, 처음부터 정해진 대로 각자 갈 길을 가야 한다.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서하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냥 그런 여자였다 생각하고 잊어버려. 충격과 아픔은 잠깐일 뿐, 금세 잊혀질 거야. 모든 게 다 괜찮아질 테니까 조금만 참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열을 흘려보냈다. 봄으로 넘어가는 따사로운 밤바람마저, 달아오른 뺨이며 목덜미를 칼날처럼 스쳐 갔다. 이대로 여기서 밤을 꼬박 새워도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뒤늦게 윤서준에 대한 죄책감도 밀려왔다. 아무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해도, 그렇게 윤서준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의 마음을 당사자도 모르게, 등 뒤에서 그런 식으로 기만하고 우롱하다니. 그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동생에게, 그렇게 비틀린 거짓말까지 하다니.

선배, 정말 죄송해요……. 미안해요. 아무리 사과해도 충분하지 않겠지만…….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다. 책망도 비난도 모두 기꺼이. 적어도 그녀 때문에 형제간 우애가 갈라질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괜찮다. 그녀가 아는 윤서하라면, 원망의 화살을 형에게도 겨누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1년 반의 시간이 충분하기를. 군에 있는 동안 최대한 희석되고 스러져서 갈무리가 되기만을 바랐다.

다경이 그녀를 찾고 있는지 휴대폰이 여러 번 울렸다. 혜서는 억지로 울음을 그치고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망연자실, 어두운 골목길 저편을 공허하게 응시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릴까. 그럼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도 사라질 텐데. 한순간 그런 끔찍한 충동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충동은 다시 헛구역질로 이어져 몸의 고통으로 변이되었다.

“야, 강혜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계속 찾았잖…… 어어, 혜서 너 왜 그래? 괜찮아? 아니 뭘 제대로 입에 넣는 거 보지도 못했는데 왜 이래?”

후문이 벌컥 열리고 다경의 외침에 이어 등을 두들겨 주는 감각에, 간신히 숨을 토해 냈다. 다경이 그녀를 간신히 부축하며 혀를 찼다.

“야, 너 병원은 가 봤어? 응? 저번처럼 나오는 것도 없이 욱욱대기만 하는데 진찰 받아 봤냐고- 얼굴도 이렇게 창백해서 진짜…….”

“아니…… 괜찮아, 그냥 소화 불량이라…….”

혜서는 다경의 염려를 애써 불식시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억지로 웃는 척하는 내내 얼굴 근육이 파열될 것처럼 아팠다. 내가 이런데 윤서하는 얼마나 아플까, 그 생각 때문에 아픔마저 죄의식에 잠식되고 있었다.

서하야, 제발 빨리 괜찮아져. 그리고 잊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상의 누구보다 더. 만약에 내가 더 불행해지는 대신 네가 더 행복해진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 불행해질게. 그러니까 제발 빨리 잊어 줘. 처음부터 우리가 만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일행이 자리한 방 안쪽은 적당히 화기애애하고 경쾌하게 떠들썩했다. 혜서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다시 신발을 벗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오늘 너무 감사했다고 인사하고, 가방이랑 옷을 챙겨 들고나와서…… 그리고 집에 가야지. 아 참, 집엔 이제 갈 수가 없으니까 노무사님 댁으로 가야지…….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택시를 타야겠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동물 병원에 들러 양호를 데려와 트럭에 같이 타고…….

“꺅! 혜서야, 너 괜찮아? 왜 이래!”

다경의 외침, 방 안쪽에서 후다닥 일어나 다가오는 발소리들이 들리는 걸 보면 귀는 멀쩡했다. 그런데 눈은 왜 이럴까. 시야가 순식간에 까맣게 명멸하고 있었다. 다경이 어깨에 손을 올리기 무섭게 몸이 기우뚱, 중력을 잃는가 싶더니 차디찬 바닥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다경아, 비켜 봐!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다경 아버지의 외침에 이어 여러 손길이 와닿으며 상체가 똑바로 세워졌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종잇장처럼 다시 풀썩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몸뚱이를 누군가 들쳐 업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냥 내려놓으셔도……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시야가 저절로 질끈 닫혀 열리지가 않았다. 그게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의식도 까맣게 점멸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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