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점잖고 기품 있던 전 회장의 입에서 기어이 노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거냐?”
“윤서하! 너 지금 난데없이 무슨…….”
“야, 서하야! 갑자기 무슨…… 서준이 넌 알고 있었냐? 나랑 네 엄마는 금시초문인데.”
“아뇨, 저도 잘은…….”
서준은 난처한 듯 뒷머리만 긁었다. 그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그가 열애 중이란 건 알았지만 오늘 이렇게 갑자기 터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좋은 사람입니다. 미모, 학벌, 심성, 어디 빠질 데 하나 없어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낼모레면 입대고 그동안 군에 묶여 있으니 여유 있게 천천히 의논드리고 진행하면 되죠.”
“거, 앉아 봐! 어디 가려고!”
서하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자 조부가 호통을 쳤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우렁찬 고함이 쨍, 날카롭게 너른 실내를 울렸다. 서하가 아랑곳없이 달아날 태세를 취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니까요, 할아버지. 일단 전 혼맥 이을 생각 없으니까 포기하시고 최고의 혼처는 서준이 형한테 다 몰아 주세요. 저도 적극 도울 테니까요, 그럼 저 지금 공항 가야 해서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야, 윤서하! 너 베이징 출국, 내일이잖아!”
아버지의 고함에 그는 되는대로 둘러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하루 앞당겨졌어요-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결혼이 얼마나 큰일인데 어디 감히 네 멋대로 하겠다는 거야! 지금까진 네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게 뒀지만 결혼은 절대 안 돼!”
“예? 저 지금까지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진 않았는데요.”
귀가 멀 것 같은 노호에도 윤서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나름 정중하게 의사를 피력해 보려던 초심도 결국 본성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저 시키는 대로 다 했잖습니까. 대대로 모교인 학교로 옮기라 하셔서 꾸역꾸역 공부해 편입했고, 군대도 가라고 해서 간다고 했고, 이왕 가는 김에 폼 나게 해병대가 어떠냐 하셔서 예, 예, 그러죠, 두말 않고 해병대 지원해서 기어이 입대하게 됐는데요? 제가 언제 꼰……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원하신 대로 결국은 안 한 게 있습니까?”
“이놈아, 그러니까 네가 앞으로도 최고가 되게끔 결혼도…….”
“처가댁 덕, 인맥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혼은 제가 원하는 상대랑 하게 내버려 두세요. 정 싫으시면 호적에서 파시든가요.”
“뭐라고? 네 이놈!”
파삭, 뭔가 깨지는 소리에 다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윤동재가 노기를 누르지 못하고 골동품 담뱃대를 집어 들어 찻잔을 내리쳐 버렸다.
서하는 문으로 향하려다 황급히 바깥으로 연결된 격자창을 열어젖혔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담뱃대 끝이 다음은 제 대가리를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깨져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다 뒈지면 큰일이다. 강혜서만 이 험한 세상에 두고 하직해 버리면 죽어서도 혼이 구천을 떠돌게 되리라.
그는 창 아래로 사뿐히 뛰어내려 게이트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광대한 정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리는 귓전 사이 씽씽, 꽃샘바람이 스쳐 갔다. 아까부터 피가 통하지 않던 무릎 때문에 잠깐 휘청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고꾸라지진 않았다.
씨발, 그거 잠깐 꿇고 있었다고 저리네……. 하, 이 좆같은 땅은 진짜 쓸데없이 넓어 가지고…… 헉, 헉…….
“저 녀석이……!”
태인혜가 혀를 찼다. 재빨리 붙잡으려 했건만 아들은 이미 본채를 쏜살같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윤동재가 서슬 퍼런 얼굴로 협탁 위 인터폰을 눌렀다. 호암재를 총괄하는 집사가 정중히 응대해 왔다.
-큰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서하 못 나가게 막고 도로 들어오게 해라.”
-예, 알겠습니다.
“우리 손주 머리털 하나 다치게 하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일 년…… 아니 이 년 전부터 최근까지 누구랑 만나고 뭘 했는지, 그 녀석 주위를 샅샅이 캐 보라고 시켜라. 입대 전까지도 상시 보고하고.”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딸칵, 경쾌한 음을 끝으로 집사는 자취를 감췄다. 윤동재는 침착하게 좌중을 둘러 보았다. 깨진 다기 조각은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용인이 재빨리 치우고 사라진 뒤끝은 말끔했다.
“다들 앉아라, 금세 돌아올 테니.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 봤자 벼룩이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태인혜가 제일 먼저 무릎 꿇고 다시 착석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품이 정중하고 깍듯했다. 아까 눈웃음을 치며 애교를 부리던 것과는 또 다른 면모다. 그녀는 남편 윤희명에게 눈짓해 보이곤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와 애들 아빠는 전혀 몰랐어요. 원체 학교에, 제 사업에,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 출장에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제가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겠습니다.”
“사업, 출장 그것보단 여자 집에서 살다시피 해서 집에는 코빼기도 안 보인 것이겠지. 안 그러냐? 여자한테 홀딱 빠진 모양이구만. 쯧쯧…….”
윤동재는 혀를 차곤 서준에게 다시 이목을 돌렸다.
“서준이는 들은 게 전혀 없진 않은 눈치구나. 말해 봐라, 아는 대로 다.”
“저도……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할아버지. 하지만 서하가 진심인 건 확실해요. 치기 어린 한순간의 그런 감정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입대 전에 다시 한번 얘기를 들어 보시는 게…….”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게 무어 중허냐. 여긴 그렇게 감정으로 굴러가는 세계가 아니란 거, 너희 중에 모르는 사람 있는고?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구나.”
윤동재의 주름진 이마에 노기로 인한 핏줄이 벌겋게 섰다. 안경 너머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갑고 싸늘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아이구만. 눈앞에 대령 못 시키고 저렇게 운만 띄우는 걸 보면.”
윤희명은 혀를 차며 한숨을 뱉었다. 반면, 훨씬 더 눈치가 기민한 태인혜는 차분하고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도 내심 같은 추측을 한 까닭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시부의 말 또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선언이었다.
“말하나 마나 뻔한 거다. 조건 자체가 안 맞으면 사람은 볼 필요가 없어! 어쨌든 서준이, 서하, 둘 다 가능한 대한민국 최고의 집안과 연을 맺어 혼맥을 이어야 한다. 그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니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확고한 법칙이야.”
조부의 호령에, 서준은 자리에 앉은 채 침묵만 지켰다. 한편으로는 서하가 걱정되면서도, 결국은 윤동재를 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서하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조부가 정말 호적에서 도려내 가문에서 추방을 한다면, 그러시라고 호기롭게 수긍하고 제 갈 길 갈 터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서하를 그렇게 포기하실 리 없지……. 어떻게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헤어지게 만드실 텐데…….
서준은 다시금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고 초조한 눈으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조부의 화가 극에 달한 지금은 잡히지 말고 무사히 빠져나갔으면 싶었다.
게이트를 오십 미터쯤 남겨 뒀을 때였다. 앞으로는 게이트에 면한 보안실, 등 뒤로는 별채에서 출동했을 비서들이 그를 순식간에 에워싸기 시작했다. 나 원 참. 내가 무단침입했다 도망가는 도둑놈 새끼도 아니고.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작은 도련님. 큰 회장님 분부입니다. 안으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이봐요, 비서님들.”
서하는 이를 빠득 갈고 주위를 차분하게 훑었다. 185에서 190cm, 떡대처럼 건장한 체격에 하나같이 우람한 근육 덩어리들이다. 저 역시 체력적으론 꿀리지 않았다. 한두 명쯤은 제압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라도 숙련된 요원들 여덟 명을 혼자 상대하긴 역부족이다.
“여기 일, 몇 년 하고 잘릴 겁니까? 예? 아니면 환갑까지 안락하게 종신 고용되고 싶습니까? 장기적으로 좀 보라고요.”
그는 팔짱 끼고 여유로운 척,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후레자식이고 뭐고 신성한 자연 불변의 법칙이니까 솔직하게 지껄여 보죠. 앞으로 크게 떠오를 태양, 지는 해- 말인즉슨 작은 도령과 큰 회장, 둘 중에 어딜 줄 설 건지 지금부터 잘 생각하시라 그 말입니다.”
장정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그에게로 다시 바짝 다가섰다. 큰 회장의 분부에 따라,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되 어떻게 하면 머리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할지 번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서하의 말을 알아듣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실존하는 큰 회장의 서열과 권력이 훨씬 강했기에 거스를 수 없다.
“죄송합니다, 작은 도련님. 이만 안으로 들…….”
“김 실장님.”
그가 여덟 명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요원 앞에 몸을 바싹 붙이고 들릴 락 말락 속삭였다. 이번에는 느물거리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나 지금 막잖아요? 그럼 내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김 실장님 명진그룹 떠나시게 만들 겁니다. 진짜예요. 나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 오셨잖아요? 내가 그럴 수 있는 놈인 거, 뜻대로 안 되면 제정신 아니게 되는 거 아시잖아요. 예? 10년 전 그 일, 기억 안 나세요?”
아주 회까닥 돌아 버리는 거 알잖아요- 그가 한 손을 제 머리에 대고 빙그르르 원을 그렸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숨 막히는 위압감, 신경이 끊어질 듯 팽팽한 공기 속에서 다른 비서들은 어느새 한 걸음씩 물러나 있었다. 김 실장이라 불린 남자가 마침내 맞닿았던 시선을 떨구고 뒤로 물러섰다.
“……놓쳤다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 보답은 꼭 하죠.”
윤서하가 싱긋 웃었다. 삼촌뻘 되는 김 실장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서는 웃음이 광기를 머금고 싱그럽게 빛났다. 봄빛 만연하던 정원 아래, 한순간 해가 기울며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 * *
혜서는 동물 병원에 양호를 하루 위탁을 맡기고는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출발을 위할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제 학교로 떠나 졸업식만 마치면 모든 것은 순조롭게 마무리될 터였다. 그때 등 뒤에서 병원 문이 끼익 열렸다. 원장 와이프였다.
“혜서 씨! 마침 잘 됐다. 태워다 줄게요. 급하게 물품 구매하러 가는데 중간에 혜서 씨 대학교 지나가게 되거든요.”
“아…….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그럼요. 우리 고객이신데. 졸업식이라고 모처럼 예쁘게 정장도 입었는데 편하게 차로 가는 게 좋죠.”
원장 와이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원 건물 옆에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운전석에는 병원일을 돕는 남동생, 뒷좌석 오른쪽에는 직원이 앉아 있었다. 여자는 운전석 옆문을 달칵 열고는 뒤에 타라고 손짓해 보였다. 혜서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저…… 급한 볼일이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먼저 가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머, 그랬어요? 그럼 할 수 없지, 오늘 졸업 축하해요! 먼저 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뵐게요…….”
혜서는 빠르게 점으로 변해 가는 차 후미를 한참 동안 보고 있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차마 직원에게 왼쪽으로 옮겨 앉아 달라거나, 원장 부인에게 앞자리를 양보해 달라 청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트라우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1년 전, 정신과 담당의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달래 주었다.
-우리 뇌와 마음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단다. 말도 안 되는 증상, 그런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현재 공식적인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어 있진 않지만, 반복되는 문양이나 밀집된 원형을 볼 때의 환 공포증, 뾰족한 것을 보면 공포를 느끼는 첨단 공포증, 물고기나 조류 공포증, 타인들이 볼 때 이해되지 않는 심리적인 불안 증상은 수없이 많아.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증상들도 부지기수인데 네 경우는 원인이 명확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괜찮아질 거다.
하지만 11년이나 흘렀는데도 나아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도 일종의 핸디캡은 핸디캡이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한숨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지금은 차를 얻어 탈 기회를 놓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다. 이 말도 안 되는 증세 때문에,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거나 중요한 일에 지장을 주게 되진 않을지 두려웠다.
역시 나란 인간은…… 여러모로 재수 없고 불길한 존재인 걸까.
혜서는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늘 고대하던 졸업식인데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뿌듯한 성취감, 감격과 기쁨과는 거리가 먼 비애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