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로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동장군도 달이 바뀌며 서서히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2월로 넘어가며 기온은 예년 평균보다 훌쩍 올라가 있었고, 강추위에 움츠러들어 있던 행인들의 옷차림과 발걸음도 한결 가벼움을 띠고 있다.
혜서를 둘러싼 모든 것도 그랬다.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여유로운 동시에 즐겁게 바빠 보였다. 복학생과 후배들, 다경과 동기들도 그렇게 느꼈다. 모처럼 다 같이 만난 자리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축하한다, 혜서야! 진짜 고생한 보람이 있어.”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꽃길만 걸으세요, 선배!”
“그 바쁜 와중에도 혜서처럼 성실했던 학생도 없을걸. 교수님들, 조교들도 다 그러더라. 학점 4.0 꼬박꼬박 넘으면서 시험 공부까지 하고 있었다니. 진짜 대단해.”
어렴풋이 가정사를 대강 알고 있는 친구들은 앞다퉈 혜서를 응원해 주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이제야 성공적인 자립을 앞둔 동기였기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그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잘 되길 빌어 주고 있었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선을 긋긴 해도, 그녀만큼 강의 노트 선선히 빌려주고 모르는 것도 잘 가르쳐 주는 동기가 없었던 탓도 컸다.
“다들 감사합니다. 모두 고마워. 나보다 더 좋은 곳에 들어가는 애들도 있는데 뭘…….”
혜서가 민망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과 세계적인 외국계 회사나 금융권, 날다 긴다 하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해외 명문대에 유학을 떠나는 동기들도 많아서 굳이 축하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웠다.
“이 자리엔 없지만 재영이도 로스쿨 합격했대고, 다경이랑 소희만 해도…….”
혜서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임다경과 송소희 역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 명진그룹의명진물산, 호텔 MJ 계열사에 제각기 입사가 결정되어 있었다. 후배 중 하나가 술기운에 흥분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와, 주요 계열사에 나란히 합격! 다경 선배는 메이저사 세 군데 다 합격하시고도 그냥 가업을 잇는 게 나을까, 고민도 많이 하셨는데 결국 마음을 정하셨네요. 다들 진짜 멋지다. 선배님들, 졸업하고도 꼭 연락 받아 주셔야 돼요? 저도 MJ에서 뼈를 묻는 게 목표거든요!”
“커리어 제일 짱짱하게 쌓으려면 물산이 코어지. 나보다는 여기 다경이가 더 도움이 될걸?”
“야,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듣자니 거긴 월화수목금금금이고 자정 전에 퇴근하는 역사가 없다더라. 골병들 것 같으면 때려치우고 낙향할 거야.”
“어휴, 어떻게 들어간 명진인데 때려치우냐.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아 맞다, 혜서 너도 나중에 로스쿨이 목표라고 하지 않았어? 하긴, 그럴 수만 있다면 노무사 커리어 좀 쌓다가 법무사나 변호사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게 좋긴 하지.”
복학생 선배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긴 하지만…… 일단 노무사 일부터 열심히 배워야죠. 일하다 바빠지면 실행에 옮기기 어렵겠지만요.”
혜서는 애써 밝게 웃으며 열심히 잔을 비워 나갔다. 술자리가 파하고 꽤 불콰해진 일행을 하나씩 배웅한 뒤, 다경과 소희 셋이서만 24시간 커피숍으로 들어갔을 때는 열 한 시가 넘어 있었다.
토요일이라 강남역 일대는 인파로 북적여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향한 매장은 살짝 후미진 곳에 있어 비교적 덜 시끄러운 편이었다. 다 같이 커피를 들고 소희가 가리킨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한 데서 알콜 스멜 좀 없애고 들어가자. 다경이랑 혜서는 가까우니까 같이 택시 타면 되겠다. 난 지하철 막차 타면 돼.”
“너 요즘 좀 심란하겠다. 정우 곧 입대하잖아, 서하랑 같이. 그래도 요즘 군대는 짧기도 하고 해병대라니 멋지다. 곰신 카페는 가입했어?”
다경의 물음에 소희가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직. 난 남정우 진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허우대만 좋지 비실비실하는데 대체 왜 해병대를 지원한 건지. 윤서하야 해병대 아니라 특전사 간대도 수긍이 가는데 말이야.”
“갔다 오면 그 허약한 체력도 단련되어 오겠지. 근데 아까 소개팅 얘기 나온 거- 혜서 너 한 번 나가 봐. 응? 그쪽도 로스쿨 막 끝내고 로펌 인턴 들어간다니까 스펙도 좋고 상경대 선배니까 서로 얘기도 잘 통할 거고.”
“그래. 나이도 딱 맞아! 네 살 차이. 이젠 이중 공부에 알바에, 여유 없던 일상도 끝이니까 너도 연애를 좀 해야지. 안 그래도 자꾸 작업 거는 남자들 많잖아. 한 조교도 아까 과사 들렀을 때 은근 집안 자랑, 돈자랑 하면서 밥 먹자고 끈덕지게 달라붙었다며?”
“야, 한 조교는 절대 안 된다- 그 인간 명품만 두르고 다니지 은근 음침하고 안 좋은 소문도 있어!”
당사자인 혜서를 중간에 둔 채 다경과 소희 사이에서 열띤 의견들이 오갔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여동생을 연애 코치하듯 정신이 없다.
“아냐. 난 소개팅 생각 없어…….”
“왜 번번이 안 하겠대? 혹시 누구 사귀고 있는 거 아냐? 강혜서, 너 좋게 말할 때 우리한텐 다 말해라-”
혜서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실을 알게 될 때의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다름 아닌 윤서하와 1년 남짓 만나 오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이 두 친구는 어떤 얼굴을 할까. 경악은 둘째치고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아니야. 아무도 안…….”
찌르는 듯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경의 어깨 너머, 대각선 쪽 테이블에 신효림이 앉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친구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에 등골이 쭈삣 섰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화려한 남자가 다가오자 신효림은 시선을 떼고 뭐라고 속삭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매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뭔가 심부름을 시킨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친구는 다경의 지난번 소개팅 상대가 얼마나 경악스러웠는지 저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다시 혜서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아무도 없는데 왜 안 한대? 해, 그냥. 아무래도 한 번도 경험이 없으니까 자꾸 몸 사리게 되는 것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워.”
“그래, 혜서야. 이젠 사회인도 되는데 언제까지 연애랑 담쌓고 살 거야? 사귀라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만나 보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 선배가 다리 한 번만 놓아 달라고 적극 공세한 게 벌써 일 년 전부터라는데. 3차 끝난 거 알고 하루가 멀다 하고 네 얘기를 한다잖아.”
또각또각, 힐 소리에 이어 신효림이 이쪽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찰나 부딪쳤다 떨어졌다. 신효림은 죽일 듯 노려보던 눈빛을 상냥한 가식으로 바꾸곤, 뻣뻣하게 굳어 버린 혜서 앞의 두 여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어…… 효림이구나. 혼자 왔어?”
“아뇨, 친구가 잠깐 뭐 사러 갔어요. 근데 혹시 소개팅하시는 거예요?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들리길래 선배님들이신 줄 알고 반가웠죠!”
눈웃음을 살살 치는 신효림의 태도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전에 그녀를 못마땅하게 말하던 다경조차, 선배들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후배에게 뭐라 하진 못했다. 신효림은 더 활짝 웃으며 혜서 쪽을 돌아보았다.
“혜서 선배, 소개팅하시는 거예요? 오래전부터 선배님 멀리서 지켜보고 짝사랑했던 분인가 보다. 와, 제가 막 설레네요!”
“…….”
“어머,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려서……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혜서가 경직된 채 말이 없자 신효림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연기 지망생이라 해도 믿을 정도라 무섭기까지 했다. 분명 웃고 있지만 그녀를 볼 때만은 눈 속에 한 점의 미소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혜서 선배, 정말 만나는 분 없으세요? 저번에 학교 뒤에서 봤는데 서…….”
“아니, 없어. 소희야, 소개팅 언제야?”
혜서가 꾹 물고 있던 입술을 급박하게 떼 냈다. 신효림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동행 남자가 다시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 진짜 할 거지?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주말 동안 연락해서 시간 조정해 볼게. 너 언제 시간 되지? 주중에는 인턴 나가니까 아무래도 토요일이 낫겠지? 아니면 금요일?”
소희가 반갑게 나서자 신효림이 다시 살갑게 끼어들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미소가 혜서의 눈에만 섬뜩해 보였다.
“선배님들, 친구가 와서 저 이만 가 봐야겠어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러고는 혜서 쪽을 향해 더 크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혜서 선배님, 소개팅 잘됐으면 좋겠어요. 응원할게요!”
신효림이 사라지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혜서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벽에 몸을 기댔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토기가 치밀고 위장이 쥐어짜듯 아팠다. 잠시간 버텼지만 기어이 저녁에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고 말았다. 괴로움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데 재킷 주머니 속 폰이 울기 시작했다.
번호를 확인하자 속이 더 뒤틀리는 느낌에 눈을 감아 버렸다. 오전에 저녁 약속이 있어서 연락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톡을 보냈더니 일부러 이 시간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도저히 받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저번처럼 보안 업체 여직원을 집 근처로 보내서 별일 없는지 확인해 볼 터였다. 일정이 예정보다 2주나 미뤄져서 오래 떨어지게 되니 자정 전까지 연락이 안 되면 걱정된다는 것이다.
“서하야. 나 지금…… 자고 있던 중이야.”
-그랬어요? 목소리가 울리는데. 욕실에 있는 거예요?
“응? 응…… 내일 다시 연락하자.”
-오늘 저녁 자리는 잘 끝났어요? 술 많이 안 마셨죠.
“응. 많이 안 마셨어.”
-목소리가 어째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냐. 자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나 들어가서 잘게.”
-아…… 알았어요. 어서 자요, 선배. 내일 다시 연락할게요.
폰이 화장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한참을 토했더니 탈수 증상이 일어났는지 전신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흐린 의식 속에서도 앞으로의 일정이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다음 주 금요일이나 토요일 소개팅, 그리고 일요일에는 윤서하가 귀국한다. 다음 날인 23일은 그의 생일이고 이틀 뒤가 졸업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었다. 학교뿐 아니라 다른 것 모두.
소개팅을 하게 되면 서하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질렸어. 이제 설레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아. 내 마음이 떠났으니까 그만하자- 단순한 거짓말로는 절대 먹힐 리가 없다. 최대한 통화를 짧게 끊어 내고자 거짓말을 하는 동안에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 정도의 사소한 거짓도 뻔뻔하게 하지 못하는데 눈앞에서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명분이자 트리거가 되어 주길 바랐다. 낭떠러지를 향한 질주를 가속화시키는 액셀처럼.
얼굴도 모르는 소개팅 상대에겐 파렴치한 짓이 될 것이다. 아무리 한 번 만나 보기만 하는 게 소개팅이라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순수하지 못한 목적이라면 상대를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한두 시간 안에 거절과 양해를 전하는 것만이 최선일 터였다.
벨이 다시 울렸다. 화장실에서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묻는 다경의 문자다. 혜서는 간신히 일어나 몸을 추슬렀다. 세면대 거울 앞에 서자 눈물범벅에 엉망진창인 몰골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다 못해 피부가 벗겨질 기세로 세수를 하고 나서야 혜서는 화장실을 나섰다.
“혜서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별일…… 없는 거지?”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다경이 불쑥 물었다.
“응? 별일 없지, 당연히.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서 정신이 좀 없었어.”
혜서는 부러 밝게 웃었다. 다경은 중학교 때부터 가족 같은 친구다. 집안의 치부까지 죄다 아는 그녀가 모르는 것은 윤서하와의 관계, 그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요즘 너 좀…… 너무 밝아 보여서. 뭐라고 해야 되나……. 억지로 더 크게 웃고 오버하면서 꽁꽁 숨기고 참는 느낌이 있어서 그래.”
“……그런 거 없어. 시험도 끝나서 홀가분하고, 인턴 들어간 회사는 아시던 분들도 계시고 다들 잘해 주셔서 너무 좋고…… 진짜 다 좋아. 그러니까 다음 주에 소개팅도 하겠다고 한 거잖아.”
그제야 다경은 수긍하는 듯 물러섰지만 한 번 더 강조하길 잊지 않았다.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재깍 말해야 돼?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기만 해 봐.”
“알았어. 걱정하지 마.”
택시는 그녀의 집 앞에서 먼저 멈춰 섰다. 혜서는 다경에게 도착해서 문자를 보내라고 이르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양호가 냐항, 반갑게 울며 현관 앞까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양호야, 잘 지냈어? 엄마가 오늘은 많이 늦었지……?”
혜서는 그대로 신발장 앞에 주저앉아 고양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이럴 때의 양호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폭 안겼다. 작은 털 뭉치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애정에 새삼 가슴이 뭉클하다. 골골거리는 소리마저 따뜻했다.
그대로 양호의 털 속에 코를 묻고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안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소리 내서 울었다간 양호가 깜짝 놀라 눈을 등잔만 하게 뜨고 그녀를 볼 것이다.
하루가 그렇게 또 지나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을 가장하느라 안간힘을 쓰느라 속으로는 지독하게 곪아 들어가는 평화롭고 순탄한 하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