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로비의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무릎이 저절로 꿇렸다. 조금 전 먹은 것들을 죄다 게워 내는 동안,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에 눈물이 다시금 흘렀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고 식은땀을 닦아 내고 나서야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바탕 구토를 하고 나니 위경련은 멎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칸에서 나와 화려하기 그지없는 세면대에 머리를 수그리고 입 안을 헹궜다. 고개를 들자 VIP 라운지에나 어울릴 법한 거울 너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제 얼굴이 보였다.
어떡하지, 이제…….
화장실과 이어진 파우더룸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는 순간 서하가 다시 떠올랐다.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뒀던 사람이 그녀임을 알게 된다면. 갑작스레 정적을 찢는 벨 소리에 흠칫 놀라 폰을 들어 올렸다. 윤서준이다. 혜서는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혜서야, 괜찮니?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 역시 데려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는데 안 보이네.
“아, 저 이미…… 가고 있어요.”
-괜찮아?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는데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니? 지금 어디 있어?
“선배님, 저 정말 괜찮아요.”
혜서는 입술을 꼭 물었다가 용기를 쥐어짜 덧붙였다.
“그리고…… 저 아까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아……. 그래. 알겠어. 당연하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까 그렇게 해 줘. 하지만 입사 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나와는 별개로 네 커리어를 위해서.
“죄송해요. 과분한 제안……. 좋게 봐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원래 예정된 곳에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구두 약속이지만 그쪽에서도 그렇게 알고 계실 거라서…….”
상처를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윤서준 같은 사람을 감히 상처입힐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한결같이 선하고 좋은 사람이기만 했던 그에게. 자신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다. 그 신실한 호의 중 이성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을 줄은, 혹은 생겨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자격이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래, 알겠어.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답해 왔다. 여전히 다정했지만 상심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여러 가지로 많은 부담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 공명에서 일해 보고 잘 맞지 않는다든가……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 줘. TO 여부만 알려 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오늘 저녁 정말 감사했고…… 여러 가지로 감사했어요. 정말로요.”
중간중간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인사말을 건넸다. 평범한 작별 인사가 아니란 사실은 혜서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윤서준도 막연히 느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다시 유쾌함을 가장하며 밝게 웃었다.
-그래. 내일 미국 들어가면 한동안 또 못 보겠네. 늦어도 4월엔 영구 귀국하니까 그때 정우랑 소희랑…… 다 같이 만나자.
“네, 기회 되면…… 그럴게요.”
-혜서야.
애써 톤을 올렸을 어조에선 아까보다 더한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그때쯤이면 나도 마음 정리했을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보자. 꼭.
“…….”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그럼 건강하게 잘 지내.
“네, 선배님도 내일 출국 잘 하시고…… 건강히 지내시길 바랄게요.”
통화가 끊겼다. 그때쯤이면 마음 정리했을 테니까- 그 한마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부디 그렇다면 좋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럼 서하와 나는…….
그때 파우더룸의 문이 덜컥 열리며 또각또각 굽 소리가 다가왔다. 망연자실 앉아 있던 혜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지금쯤이면 출구로 나가도 선배와 부딪치진 않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소파를 휘돌아 온 굽 소리가 혜서의 앞에서 뚝 멈췄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혜서 선배.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저야 여기 멤버지만.”
“아, 안녕…….”
신효림이 그녀를 아랫사람 보듯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앉아 있고 그녀는 서 있기 때문에, 단지 위치상 물리적인 눈길로만 여겨지진 않았다. 늘 그렇듯 곱게 색을 입힌 눈이 혜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괜찮으세요? 아까 하얗게 질려서 뛰어들어 오는 거 봤거든요.”
밍크 퍼 코트에 각종 하이엔드 액세서리를 두른 그녀에 비해. 장례식에라도 가는 것처럼 온통 검은색인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런 눈빛만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자괴감이 크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다 해도,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시선을 앞두고 오연하게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속이 안 좋아서…… 이제 괜찮아졌어, 그럼 이만…….”
“서준 오빠랑 식사는 잘 하셨어요?”
혜서가 일어났지만 신효림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티가 역력했고 눈빛도 곱지 않았다.
“잠깐 차나 한잔하려고 들어왔는데 어쩌다 보니 두 분 뒷자리더라고요. 엿들으려던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들린 거지만 일부러 귀를 더 세운 건 맞아요.”
혜서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리다 꾹 다물렸다. 제삼자가 윤서준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알아 버렸다는 사실, 더불어 조금씩 드러나는 적의에 당황했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신효림과 윤서준 사이에는 개인적인 교류를 떠나 집안끼리 두터운 친목 관계에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는지 몰라도 그 정보로 뭔가 시비를 걸거나 수작을 부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를 상대로는 가능하겠지만 윤서준을 건드릴 순 없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니……?”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선배,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MJ는 아직도 윤동재 전 회장, 현 명예 회장님이 실질적인 가주예요. 서준 오빠, 서하 오빠 할아버지 말이에요. 그 집이 어떤 집안인지 아세요? 명진그룹은 세간에 알려진 그냥 재벌이 아니에요.”
“…….”
“초대 회장이 명진을 창립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평당 제일 비싼 땅과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일가라고요. 강남은 말할 것도 없고 명동, 종로, 판교와 분당, 용인까지 금싸라기 땅과 산은 죄다 윤동재 전 회장님 소유란 말이죠. 우리나라를 조용히 좌지우지하고 있는 극소수 실세 중 하나인데…… 그런 집안 아들 둘 다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 못해 지하급인 여자 하나를 동시에 좋아하고 있다니 참, 진짜 요즘은 드라마에도 안 나올 일이네요. 놀라워요, 정말.”
혜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껏 가라앉혔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보다 조금 작은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제야 신효림이 전하고자 하는 요지를 알 것 같았다.
“둘 다 모르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네요. 하하…… 기막혀.”
“어떻게…… 알았어?”
넘겨짚는 게 아니었다. 신효림은 서하와 자신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작년 12월 30일. 서하 오빠 오피스 1층에서 마주친 게 아무래도 수상쩍었죠. 그래서 그날 이후로 알아봤더니 아주 가관이던데요. 새벽마다 학교 뒤 선배 자취방에서 나오던데. 문 앞에서 애잔하게 작별 인사 포옹도 하고…… 시치미 뗄 생각 말아요. 증거 다 확보해 뒀으니까.”
신효림은 팔짱을 끼고 취조하듯 혜서를 당당하게 쏘아보았다. 사람을 붙여서 뒷조사를 한 쪽이 감시당한 사람을 되레 죄인 취급하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감정보다 서하의 입장이 더 걱정되었다. 윤서준과 윤서하, 둘 다 신효림이 건드릴 리 없을 거라 믿었지만 사진까지 찍혔다니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 시치미 뗄 생각 없어. 죄지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감시 행위는 불법이니까 당장 멈추고 사진도 파기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하를 위해서.”
혜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꼭 주먹 쥐고 담담하게 맞섰다. 신효림은 재미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야 언젠가 다경이 한 말이 확실히 체감되었다. 신효림의 의식에는 자신의 세상에 속한 동류, 그렇지 못한 이들을 분리하는 특권 의식과 우월감이 뿌리 깊이 배어 있었다.
“지금 누가 누굴 위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진짜 서하 오빠를 망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은 강혜서 선배예요, 내가 아니라!”
“…….”
“서하 오빠 부모님까지 갈 것도 없어요. 그 할아버지, 보통 무서운 분 아니라고요. 애지중지하는 손자 둘 중 하나라도, 선배 같은 처지의 여자랑 엮이는 걸 두고 보실 것 같아요? 게다가 형제들 관계까지 어그러지게 되는데! 어머니는 달라도, 얼마나 돈독하고 우애 깊은 형제인데 그걸 선배가 하루아침에 다 무너뜨리고 연까지 끊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냐고요.”
신효림은 혜서가 움찔 동요하는 걸 놓치지 않고 더 매섭게 몰아붙였다.
“설마, 속으로 누가 더 나을지 재 보는 건 아니겠죠? 형은 이미 그룹 후계자로 내정된 만큼 대외적으로나 집안에서나 일인자가 될 거고, 동생은 영원히 이인자겠지만 그릇은 형보다 우위라는 평이 많으니 모르죠. 자기 사업 펼쳐서 결국 MJ보다 더 쟁쟁한 기업을 일으켜 세울지. 어느 쪽을 택하든 이런 행운이 어딨겠어요. 하지만 그래 봤자 누굴 택하든 선배가 집안 망쳐 놓는 건 똑같아요.”
신효림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혜서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등에 닿는 벽의 감촉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선배가 누굴 확실히 목표하든 그 집 어르신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막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형제간 우애는 박살 나겠죠. 결국 척까지 지게 될지도 모르고. 세 명 다 아주 힘들게 되겠지만, 제일 불행해질 사람은 오빠들이 아니라 선배가 될 거예요.”
소파 너머 기역 자로 꺾인 벽 뒤에서 문고리를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효림이 들어올 때부터 문을 잠갔던 모양이다.
“말했죠, 할아버지가 엄청 무서운 분이라고. 마음만 먹으면 선배 같은 사람 하나쯤, 원하시는 대로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공명정대하고 정도 있으시지만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혈육에게 폐가 되거나 흙탕물 한 방울이라도 튀게 만드는 사람, 가만 놔두실 리가 없거든요.”
혜서는 시선을 떨구고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모욕적인 말이라도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한 까닭이었다.
“서하 오빠가 뭐에 홀려서 정말 선배에게 진심이라 쳐요. 그것도 얼마 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빠가 집에서 쫓겨나도 자기 회사 있으니까 사랑의 도피라도 하자고 잡아끌 수는 있겠죠. 서하 오빠 능력 출중하고 머리 비상하고, 사막에 혈혈단신 던져 놔도 어떻게든 잘 생존해 낼 인물인 건 선배도 잘 알겠죠. 하지만 어르신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신효림은 숨이 찬지 잠시 말을 끊었다. 혜서는 내려뜨린 시선을 휘황찬란한 보석 위에 고정한 채 목석처럼 서 있었다. 신효림의 가슴께에 매달린 물방울 모양 목걸이가 위협적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더 듣지 않아도 이제 충분히 인지했다. 하지만 신효림이 다시 으르렁대듯 이어 가는 말을 막지도 않았다.
“어르신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서하 오빠 앞길 막을 거예요. 집안을 떠나 아무것도 이룰 수 없도록. 하나씩 하나씩 걸림돌을 만들고 훼방 놓고…… 유언장도 최대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촘촘히 발목이 묶이게끔 변경하실 거란 말이죠. 난 벌써부터 서하 오빠가 걱정돼요. 결국은 선배와 갈라져서 탕아처럼 돌아가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여자 하나 때문에 잠시라도 좌절하고, 구르고, 오점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먼 길 돌아오게 될 거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죠!”
“그만…… 이제 그만해 줘.”
다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제발 그만 말해. 혜서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신효림의 앙칼진 눈매에 만족한 빛이 어렸다. 하지만 아직 결정타는 남아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선배를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외동인 저로서는 어릴 적부터 친오빠들처럼 지낸 사람들이 잘못되는 걸 볼 수 없거든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혜서 선배…….”
그리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혜서의 심장 깊숙이 비수를 쑤셔 넣었다. 그 어떤 협박이나 회유보다 더 효과적으로 강혜서를 무너뜨리고 윤씨 형제, 특히 윤서하에게서 확실하게 떼어 낼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