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배는 진화한다-39화 (39/121)

39화.

-파티가 너무 지루해서요. 진짜 좆같은 게 1초라도 더 있다간 죽겠더라고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품격 넘치는 슈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머리도 벅벅 헝클어뜨렸다. 그러더니 생일처럼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콜라 잔에 와인을 따르더니 기껏 켰던 불을 꺼 버렸다.

어둠 속에서 촛불에만 의지해 비틀거리다 주저앉은 자리는 서로의 옆구리며 허벅지, 무릎 위였다. 와인을 엎지르고 양호의 꼬리를 밟을 뻔하는 둥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케이크를 서로의 입에 떠 넣어 주고 키득거리길 한참, 윤서하가 크림을 입술에 묻힌 채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차분한 경직, 달아오른 뺨의 열기가 촛불 위로 어른거렸다. 익히 아는 기운에 주저하며 떠보았다.

-윤서하. 설마…….

-뭐가요.

역시. 절로 흘러나온 한숨이 은은한 어둠을 적셨다.

-너무 이르잖아. 아직 열 시도 안 됐는데.

-허. 서는 게 시간 가리나요? 언제는 할 때마다 시간 따져 했던가…….

어쨌든 서 버린 건 맞다는 소리다. 다음 순간, 그의 입가에 묻었던 크림이 그녀의 혀로 옮겨 왔다. 등이 카펫 위로, 뒤통수는 방금까지 기대고 앉았던 쿠션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중력을 잃은 상태에서 빨간 니트가 훌렁 벗겨졌다. 어제 마트 세일에서 주워 왔다며 윤서하가 가져온 수상한 옷과 부츠 중 하나였다.

-하아, 강혜서……. 혜서야…….

거친 숨, 들끓는 열기 속에서 그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삽입한 순간부터 파정하기까지, 때로는 완전히 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예외는 없었다. 제 소유물인 양 이름을 부르고 온갖 상스럽고 저열한 말을 해 대는 건 윤서하 고질적인 습관이다.

-젠장할……. 왜 이렇게 예뻐. 너 내가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다른 새끼들 앞에선 눈물 한 방울도 비치지 마. 씨발.

-올라와. 허리 들고 직접 넣어 봐. 그래, 그렇게. 이제 알아서 박혀 봐.

-하, 기분 어때……? 흣…… 올려 쳐지는 맛이 어떠냐고…….

-아주 날 조여 죽일 참이지? 이러다 끊어지겠어, 씹……. 아니, 풀지 마, 다리…… 그대로 감고 있어.

-집중 안 해? 뭘 그렇게 생각해. ……다리 들어. 잡념 들 여유도 없이 박아 줄 테니까.

욕실 거울에 비친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고 민망했다. 그러다가도 몸이 떨어지고 정신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선배, 선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도를 전환했다. 그 뻔뻔스러움에는 이골이 난 줄 알았건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일 오후쯤 도착이겠지……?

무심결에 달력의 마지막 숫자에 눈길이 갔다. 윤서하는 유럽에서 보름째 출장 겸 휴가를 보내고 있는 부모님과 마지막 며칠만 합류했다가 31일 귀국할 예정이다. 1월 1일 오전, 직계와 방계까지 온 일가가 조부의 호암재에 모여 떡국을 먹는 게 관례라 반드시 새해 하루 전에는 서울에 와 있어야 한다고 했었다.

어제도 현장 사진과 함께 요란하게 톡을 보내왔었다. 취리히에 갔다가 마지막 사흘은 빈에 있는데 낭만은 개뿔, 답답해서 혼자 도나우 강변에 나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고 투덜거릴 땐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좋겠다. 빈이라니. 나도 꼭 가고 싶은 곳인데.

-같이 오면 되죠. 내년에…… 아, 나 군대 가야 되는구나. 그냥 입영 미룰까요? 아예 자리 먼저 확실히 잡아 두고 서른 줄에 갈까나.

그 말에는 아무 답도 보내지 않았다. 혜서는 욕실에서 나와 시리얼과 우유, 사과 한 알을 꺼내 들고 거실의 TV를 켜 보았다.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고 모의 Q&A를 들여다볼 요량이었다. 3차 시험인 면접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이 없지는 않았지만 매해 난이도가 더 올라가고 있어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에서 현지 시각 29일 밤 10시경 벌어진 총기 테러 및 폭발 사고의 부상자와 사망자 중 한국인 관광객과 기업 사절단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관광객 중 숙소에서 나와 야경을 감상하던 세 명의 청년이 성 슈테판 대성당의 맞은편에 있던 시나고그 유대인 교회당 앞에 있다가 총소리에 놀라 달아나던 중 폭발물 잔해에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양호의 밥그릇에 습식 캔 사료를 부어 주고 일어날 때였다. 화면에서 한국인 외신 기자가 을씨년스러운 이국의 거리를 배경으로 심각한 보도를 전하고 있었다. 성 슈테판 대성당이라면 서하가 지금 있는 곳인데.

[기업 사절단 및 사적인 휴가를 즐기던 한국인 관광객 중 다섯 명이 사망하여 큰 충격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일행은 총기 테러가 있던 유대인 교회당의 폭발 사고가 아닌, 쇤브룬 궁전에 면한 도로 쪽에서 참변을 당했습니다. 궁전 건너편의 호텔 임페리얼 비엔나 안에서 틸 펠너의 리사이틀을 감상하고 호텔로 이동하던 중, 예술별관 건물 쪽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갑작스러운 희생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사망자 명단은 대사관 측 관련자가 입수했으나 보안상 현재 공개되진 않았습니다.]

혜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호텔 임페리얼 비엔나라면 그의 가족이 묵고 있는 숙소다. 어제 음악회 얘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전에 말했던 외사촌 태 씨 있잖아요, 피아니스트 태이한. 독감으로 여기 국립 오페라 극장 공연이 취소됐다나. 그래서 혼자 케른트너가에서 쇼핑이나 할까 했는데 태 여사님이 기어이 다른 공연 잡아 놨더라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빈 출신 음악가의 연주를 들어 봐야 한다고.

-쇼핑? 쇼핑 질색하고 관심도 없었잖아……. 하긴 외국이니까 재밌을 수도 있겠다.

-새삼스럽게 무슨 재미요. 선배 사다 주려는 거지.

-아냐. 괜찮아. 난 신경 쓰지 않아도…….

-왜요. 명색이 빈인데 모차르트 초콜릿이나 기념품 하나쯤은 괜찮잖아요.

당시의 대화를 하나씩 되새기는 동안, 혜서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리모컨을 켜서 볼륨을 높여 봤지만 뉴스는 다른 도시로 넘어가 있었다. 급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그녀는 휴대폰을 쥐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보일러가 꺼져서 바닥이 냉골인 것도 모르고 검색하길 한참, 사고 현장에서 리사이틀 중이었다던 연주자는 빈 출신 피아니스트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사망자 명단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래 고위직 정치인이나 재계의 거물이 타국에서 변을 당할 시에는 여러 가지 보안과 이해관계상, 언론 공개가 최대한으로 미뤄지기 마련이다. 명진그룹처럼 국내 재계 톱 5 정도라면 더더욱 예외가 될 리 없었다. 혜서는 정신을 차리고 윤서하랑 나누던 대화창을 열었다.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경황이 없어서 어떻게 국제 전화를 하는지 막막했다.

-서하야. 방금 빈 테러 뉴스 봤는데 넌 괜찮지?

답이 없어서 시차를 확인해 보았다. 정오인 서울과 8시간 차이니 빈은 지금 새벽 4시일 것이다. 아무 일이 없다면 당연히 자고 있을 시간이다. 그래서 읽은 흔적 없이 아직은 답이 없어도 이해했다. 적어도 두 시간, 늦어도 세 시간만 기다리면 답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부는커녕 시리얼과 우유도 식탁에 그대로 둔 채, 양호만 쓰다듬어 주며 멍하니 앉아 있길 반복했다. 아무것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절실히 바랐다.

마침내 세 시간이 지나서 현지 시각이 오전 일곱 시가 되었을 때 다시 톡을 보냈다. 국제 전화도 걸어 봤지만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 미칠 것 같은 초조함을 억누르고 이번엔 뉴욕의 윤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는 일정상 가족 휴가엔 합류하지 못하고 뉴욕에 있다가 내일 조부와의 신년 모임을 위해 일시 귀국한다 들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이번에도 전화를 걸어 보았다. 뉴욕은 지금 새벽 한 시였지만 깨어 있다면 받을 것이다. 톡을 주고받을 만한 심적인 여유조차 없었다. 신호만 갈 뿐 윤서준도 받지 않았다. 이미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북소리가 들려 주위를 돌아보던 중, 그게 제 심장 박동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중학생 때 성유란이 제 앞에서 튀어 오르던 순간이 악몽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웅덩이를 이루던 피와 양수,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광경이 지금까지도 선하다.

숨이 천천히 가빠 왔다. 타국에서 날아든 아버지의 비보, 세상을 잃은 것 같던 엄마의 사고, 반쯤 혼을 놓고 있었던 장례식에 이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자기네는 멀리 이민을 떠난다고 차갑게 전화상으로 알려 오던 고모의 음성이 하나씩 차례대로 귓가에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엄마 장례식에서 악에 받쳐 토해 냈던 힐난 역시.

-재수 없는 년! 넌 앞으로도 주위 사람들 하나씩 잡아먹고 말 거야, 암!

“서하야…… 괜찮은 거지. 그렇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폰 리스트를 정신없이 뒤지던 중, 태인혜 관장이란 이름에서 뚝 멈췄다. 서하의 모친이다. 국제 전화로 연결되는 숫자를 꾹꾹 누르는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러다 손에서 폰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쿵, 둔중한 울림과 함께 몸이 다시 튀어 올랐다.

태인혜 관장에게 용기를 쥐어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서하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대관절 왜 국제 전화까지 걸어 당신의 막내아들 안부를 묻는지, 뉴스에서 보았대도 이렇게까지 염려하는 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적당한 구색을 갖춰 볼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호만 갈 뿐 응답은 없었다. 또 누가 있더라. 명진그룹, MJ계열사나 일가 사람들. 서하와 가깝게 지내는 남정우는 친구들과 홍콩에 가고 없었다. 윤서하의 휴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만 그 역시 여행 중이다. 바로 몇 시간 전, 먼 유럽에서 일어난 폭발 테러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했다.

휴대폰을 꼭 쥔 손끝이 경련을 일으켰다. 자꾸만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혜서는 그대로 패딩 점퍼만 걸치고 황망히 길을 나섰다. 정신을 차렸을 땐 윤서하의 한남동 본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조여드는 가슴을 움켜잡고 뒷좌석에 앉는데 창밖으로 하얀 보풀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와, 눈이다! 올해 첫눈이네!”

“며칠만 더 일찍 왔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인데. 너무 예쁘다-”

다른 승객들의 입에서 제각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송이가 탐스럽게 흩날리는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뿌옇게 보였다. 젖은 시야가 흐려서인지, 정말로 하늘이 탁해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왜…… 아무 일도 없을 텐데 어째서…….

미칠 것 같았다. 다른 때였다면 그녀 역시 감회에 젖었을 첫눈마저 어떤 전조처럼 느껴졌다. 할머니의 매섭던 시선이 다시 떠올랐다. 아주 더러운 것을 보듯 환멸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눈빛.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