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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27화 (27/121)

27화.

“네, 서준 선배.”

다경에 이어, 미국에 있는 서준 선배에게서도 1차 시험 잘 봤는지 톡이 하나 와 있어서 바로 답장을 했었다.

-선배, 답이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시험은 잘 봤는데 몸살이 좀 나서 이제 확인했어요.

톡을 보내자마자 국제 전화가 바로 걸려 와서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지금은 괜찮아요. 하루 푹 쉬니까 많이 나았어요.”

어느덧 날도 밝아져 평소라면 등교 준비를 했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뉴욕이 몇 시쯤 됐는지 시차를 계산하느라 머리를 굴리는데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착각일까. 한 손에 턱을 받치고 있던 서하가 어쩐지 귀를 쫑긋 세운 것 같았다.

혜서는 그의 경직된 눈빛까진 보지 못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다시 향했다. 짧게 인사만 하고 끊을 생각이었지만 동생인 윤서하가 듣고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저런! 많이 아팠나 보네. 계속 확인도 안 하고 답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지금쯤 학교 가는 중이 아닐까 해서 연락해 봤어.

“아, 오늘 개교기념일로 휴강이에요.”

-오늘이? 음……. 졸업한 지 한참 돼서 잊어버렸나 봐. 건강 잘 챙겨야 하는데 병원은 갔어? 약은?

서준 선배는 살뜰하게 이것저것 묻고는 2차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것으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창가에서 다시 돌아설 때였다. 윤서하가 팔짱 낀 자세로 문가에 기대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감시하듯 날 선 눈빛에 혜서가 헉, 숨을 들이쉬었다.

“노, 놀랐잖아!”

“형이에요?”

윤서하가 삐딱하게 기대선 채 담담하게 물었다. 심기가 언짢은 건지, 아무렇지 않은 건지 속이 읽히지가 않았다.

“응. 1차 시험 어땠는지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하셨대.”

“뭐 특별한 얘기라도 했어요?”

“어? 아니. 그냥 안부…….”

“근데 왜 방으로 들어가서 통화해요?”

“그건 네가…….”

하, 아니다. 혜서는 더 대꾸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등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윤서하의 기척이 느껴졌다. 비켜 줄 기미 없이 버티고 섰건만 홱 스쳐 지나자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선배.”

“이제 그만 가, 서하야. 정리도 해야 되고…….”

“내가 다 치울게요, 이제 약 먹고 다시 누워 있어야죠. 그보다 선배.”

윤서하가 혜서의 손에 잡힌 그릇을 부드럽게 잡아채 갔다.

“정말…… 아닌 거죠?”

“주어도 없이 뭐가…….”

“그 새끼, 아니 그 남자.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어서 아예 포기를 맘먹은 사람. 정말 윤서준, 아니죠?”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대체 왜 이럴까. 그 침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서하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혜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약을 손바닥에 탈탈 털어 들이부었다. 차라리 약 기운이 빨리 돌아 다시 잠들었으면 싶었다.

“너 이제 가. 하란 대로 약 먹었으니까 다시 잘 거야.”

“왜 대답 안 해요?”

“…….”

“응?”

커다란 그림자가 순식간에 혜서의 시야를 덮었다. 보폭이 얼마나 컸던지 한 발짝 더 다가섰을 뿐인데도 금세 코앞까지 와 있었다. 대답을 안 해 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아니야.”

“근데 왜 뜸 들이고 바로 대답 안 해요?”

“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제발 그만하고 이제 가- 너랑 같이 있다간 다시 앓아누울 것 같아…….”

손바닥이 훅 다가와 혜서의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열기가 그의 손바닥에서 나온 것인지, 제 몸에서 나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열은 확실히 내렸는데…… 알았어요. 그럼 어서 자요. 나머지는 내가 다 정리하고 갈 테니까.”

혜서가 밀어내기 전에 그가 먼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정리 안 해도 되니까 어서 가.”

귓불까지 데워지는 열감에, 두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인간이 가까이 오면 왜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지. 감기가 아니라도 발열은 늘 일상이었다.

침대에 눕자 윤서하의 냄새가 물씬 흘렀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자 체취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이틀 전, 그와 나란히 여기 누워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심장이 들썩이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사이, 그의 잔향은 드러난 살갗마다 더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 * *

서준은 혜서와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다른 단축 번호를 눌렀다. 이 시간이면 판교 본가의 이른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차를 드실 시간이다. 아침잠 없이 꼭두새벽부터 바지런히 움직이는 습관은 집안 유전자에 대대로 인이 박여 있었다.

“어머니, 집이세요?”

-어유, 우리 장남! 보름만이네. 난 지금 아버지랑 P리조트 필드 나와 있다. 너희 아버지는 가만있자……. 나 참, 언제 저기까지 가셨대. 그나저나 본가에 할아버지께도 전화 올렸니?

“아뇨. 아직. 통화 끝나면 전화 드릴게요. 다들 건강하시죠?”

-우리야 늘 똑같지. 할아버지도 정정하시고 서하 그 녀석도 뺀질뺀질, 양아치처럼 노는 건 여전해 보이는데 학교는 꼬박꼬박 잘 다니고. 주말에도 과제 한다고 선배 집에 삼 일째 들러붙어 있는 모양이더라.

“그렇지 않아도 서하 얘기 좀 하려고 했어요. 요즘 연락도 잘 안 되고 문자 답도 늦던데…… 원래 연락 씹고 무한정 잠수 타는 성격이긴 했지만. 학교 다니기 바빠서겠죠?”

-원래 그렇게 싹바가지 없는 놈이잖니. 내가 열 번 전화하면 한 번 받을까 말까 하는 게 윤서하란 물건이다. 언제 철이 들어 식구들 귀하게 여길지…… 네 절반만 돼도 소원이 없겠다. 나긋나긋 상냥하지, 점잖지, 세상 속 깊지.

모친이 혀를 차자 서준이 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전 서하가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러운데 왜요. 저처럼 물렁한 성격이었으면 그 나이에 CEO에다 제힘으로 더 키워 가지도 못해요.”

-처음은 몰라도 지금은 아니란다. 이번에 모교 편입하면서 기어이 제 아버지에게 투자금 다 받아 갔다- 원금만 회수해 가는 투자가 세상천지 어디 있냐고, 쥐꼬리만큼이라도 이자 받으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안 받으신다더라. 하여간에 말씀만 거칠지 뒤로는 아들 바보인 양반이야.

“그건 어머니도 같으시잖아요.”

서준이 쿡쿡 웃었다. 창 너머 내려다보이는 마천루 야경이 번쩍거리는 별세계 같았다.

“서하는 상처 잘 안 받고 꿋꿋하니까 앞으로만 뭐라 하시는 거고, 전 상처 받을까 봐 앞뒤로 똑같이 하시는 거고…… 우리 집에선 그나마 할아버지가 제일 솔직하신 편이죠.”

-아냐, 내가 무슨. 아무튼 서하 그놈은 그렇게라도 좀 눌러야 덜 천방지축이 되니까. 그나저나 네 아버지는 도통 저기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시네. 전화 왔었다고 할 테니까 어서 본가에 전화 올려 보렴. 할아버지가 틈만 나면 네 결혼 얘기하시는데 내년 봄에 들어오는 대로 좀 바빠질 거야. 그건 미리 알아 두렴. 너도 이제 스물여덟인데 서른 안 넘기는 게 좋잖니.

“네? 아……. 에이. 선 같은 거 보기 싫은데. 이제 세상이 변했는데 저랑 서하 둘 중 하나는 혼맥 생각 안 해도 되잖아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분히 이어졌다.

“서하는 제 입으로도 자긴 야망가라고…… 대한민국 정·재계 최고 집안의 사위가 될 테니까 제대로 다리 놔 달라고 옛날부터 그랬으니까요.”

-그랬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께 툭하면 제 선 자리는 최소 대통령 딸이나 손녀로 잘 알아보시라고 건방지게 훈수 둬서 꿀밤 맞고, 나한텐 뒤지게 처맞고. 그놈은 조건만 최상이면 없던 애정도 만들어 낼 물건이니.

“하하……. 그러니까 저는 선 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사람이랑 결혼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혼맥은 서하가 스스로 욕심내서 적극적이니까…….”

-응……?

짧게 정적이 흘렀다. 서준은 아차, 뒤늦게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호랑이, 산부처, 철의 여인 등 다양한 별칭을 지닌 태인혜 여사는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인물이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 한해서는 더 그랬다.

-서준이 너…… 누구 있구나.

“아, 그게…… 어머니.”

-만나는 사람 있구나. 가만있자, 하버드에서 만났어? 아니면 교포 2세나 3세?

모친은 설렘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어느 집안 아가씨야? 나만 알고 있을게. 네 아버지한테도 함구할 테니까 믿고 말해 봐. 엄마가 비밀 지킨다고 하면 꼭 지키는 거 알잖아? 응?

“사실은 맘에 둔 여자가 있긴 해요. 그런데 지금 학생이고…… 아직 어떤 사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관계라서요. 그러니까 귀국해서 어머니께만 살짝 말씀드릴게요.”

-어머, 세상에!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였구나? 잠깐만. 너 아까 혼맥이니, 서하 얘기까지 한 거로 봐서는 아무래도…….

서준은 모친이 말끝을 흐린 까닭, 그 너머의 의문 모두 잘 알았다.

“네, 솔직히 어머니는 결혼에 관해서는 저나 서하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해 주시리란 것 알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기대치에는 못 미칠 수 있어요. 일단 거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건 집안 배경 말하는 거지? 그럼 사람은? 사람 자체는 어떠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람 됨됨이, 인성, 학력 모두 훌륭해요.”

-그럼 됐어. 너도 알다시피 난 태어날 때부터 선택권이 없거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달라질 수 없는 것들에는 연연치 않아. 직업과 학벌은 노력에 따라 좌우되는 요소지만 집안 환경은 그게 아니잖니. 사람만 좋고 네가 좋아하면 난 상관없다. 사실 서하도 어릴 적부터 혼맥이니 족벌혼이니 미친 소리 하지만, 그 애의 결혼 상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어요.”

-일단 내년 봄에 귀국해서 얘기하자. 약속대로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 갑자기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네. 우리 아들 여태 연애도 제대로 안 하더니 갑자기 누구 생겼다니까 좀 묘하다. 이런 게 아들 둔 엄마 마음인가?

모친은 조금 쓸쓸하게 웃더니 그럼 어서 본가로 전화 올리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서준은 본가의 집 번호를 누르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5월마다 열리는 트라이베카 영화제, 화려하고 경쾌한 페스티벌의 여파가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심의 불빛이 휴대폰 액정 위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무심코 눈을 들어 보니 거울 속에 제 얼굴이 비쳐 보였다. 친아들이나 다름없이 귀애해 주시는 새어머니, 그녀가 낳은 배다른 동생과 닮은 외양이었다. 사람들은 형제가 닮았지만 분위기는 대조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주인공과 빌런이 투톱으로 양대 산맥 존재감을 드러내는 할리우드 멜로물과 액션물의 콜라보 같다고. 문득 동생이 떠올라 본가 연락을 잠시 미뤄 두고 서하의 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때 알림음이 울려서 톡을 들여다보았다.

-나 엄청 바빠. 나중에 연락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만방자한 태도가 평소의 윤서하였다. 어쨌든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니 다행일 따름이다. 서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본가 번호를 다시 화면에 띄웠다. 지금쯤은 조부도 오전 티타임을 마치고 붓글씨나 독서 중이실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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