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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22화 (22/121)

22화.

그 참혹한 현장은 바로 코앞에서 벌어졌다.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첫 내연녀와 둘 사이의 결실은 돌연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후 일 년도 되지 않아 부친에겐 두 번째 연인이 생겼다. 엄마는 또다시 시작된 절망 속에서도 끝내 이혼에는 응하지 않았다.

사업은 쇠락했고 아버지는 엄마와의 혼인 상태 그대로, 연인과 이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죽었다. 아들을 세상 끝까지 따라가려다 내쳐지고 고모 집으로 옮겨 살 준비를 하던 할머니는 세상이 떠나갈 듯 오열하며 이번에도 엄마 탓을 하기 바빴다.

-다 너 때문이야! 처음부터 너처럼 재수 없는 년이랑 만나지만 않았어도……. 아이고, 세상에! 집에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 망하는 게 아니라 아예 서방을 잡아먹어 버렸네, 세상에!

엄마는 타국에서 생을 달리한 아버지의 부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밤, 엄마가 안방에서 소리 죽여 우는 흐느낌을 들었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비혼을 넘어서서 사랑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엄마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헌신짝처럼 두 번이나 버려지고도 그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던 거다. 그날부터, 혜서에게 사랑은 모든 불행의 근간이자 행복의 반대어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좀 더 들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한 가지 사실 역시 절감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혜서의 주위 사람들은 하나씩 차례대로 죽어 갔다. 대학에 들어가고 맞은 첫 여름 방학 어느 날,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떠났을 때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걸.

미신이라 치부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믿는다는 것, 그리고 이 이상의 불행을 막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눈물이 자꾸만 나는데도 눈은 뜰 수 없었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렸던 몸이 조금씩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 저편에서도 제 몸을 뒤덮은 아늑한 체온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를 따뜻하게 꼭 안아 주고 있었다. 그 온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혜서는 무의식중에 그 따스한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살냄새가 코끝으로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다. 감기로 후각이 마비된 줄 알았는데 왜일까. 제 것이 아닌 익숙한 체향이 전신을 휘감고 돌며 강렬한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더 꼭 안겼으면, 간절히 바라며 매달렸다. 절대 이 품에서 놓여나고 싶지 않았다. 꼭 감은 눈 속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와, 늘 그 자리에 있는 짙은 외로움을 건드리는 듯했다. 그 서글픔에 혜서는 온기의 주인을 정신없이 부여잡고 제 몸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괜찮아.”

온기가 목소리의 형태로도 화한 것 같았다. 크고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가로질러 머리 뒤를 감싸고 토닥거렸다. 다정한 음성이 다시금 속삭였다.

“울지 마. 괜찮으니까.”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무슨 악몽을 꿨는지는 몰라도 다 괜찮아. 내가 이렇게 있으니까. 선배 괜찮아질 때까지 절대 안 갈 거니까 마음 놓아요.

반짝, 눈이 떠졌다. 말갛게 젖은 시야로 우람한 팔뚝이 들어왔다. 손을 더듬자 단단한 가슴의 맨살이 닿았다. 혜서의 눈이 몇 번 더 깜빡였다.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아까의 것이 진저리 나는 과거로 소환된 악몽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의 꿈이다.

성냥팔이 소녀가 죽기 전까지 창밖에서 엿본, 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족의 저녁 모습과도 같은 꿈. 화목한 가정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엄마는 같아도 아빠는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으면 좋겠어.

과거에도 사무치게 바랐던 소망처럼, 달콤한 꿈의 한 자락이 열기가 일으킨 환각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혜서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고 믿었다. 한 톨의 의혹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다.

꿈인데 뭐 어때. 꿈이니까…… 한 번쯤은 이래도 되잖아.

혜서의 입술이 가슴의 잔근육을 부드럽게 훑고 쓸어 올리다 굵은 목울대에 닿았다. 발칙한 입술은 그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장난치듯 누르다가 다시 더듬더듬 올라갔다. 턱을 지나친 입술은 반가운 듯 우뚝 멈췄다. 그리고 저와 같은 감촉에 제 살을 천천히 맞댔다. 조금 덜 보드랍고 더 촉촉한 그 아랫입술 위로 파르르 떨림이 일어났다.

서하는 미동도 없이 굳은 채 누워 있었다. 마주 본 채 끌어안고 있던 강혜서가 또 악몽을 꿨는지 퍼뜩 깨어나 서럽게 눈물을 흘릴 때만 해도, 이런 전개가 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아직 잠에서 덜 깼나.

역시 그것밖에 답은 없다. 강혜서의 의식은 새로운 꿈속에 막 발을 디딘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입술을 가슴에 댈 때만 해도 그대로 다시 잠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보드라운 표피가 쇄골로, 우묵한 목 안쪽으로 대담하게 올라가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강혜서는 저만의 꿈속에서 완전히 다른 인격처럼 굴고 있었다.

입술이 그의 것과 맞닿는 순간, 다리 사이가 순식간에 단단해지며 기둥이 꿈틀거렸다. 페니스가 빠르게 몸통을 불려 가며 얇은 드로즈 천 아래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룩하게 솟은 천 위로 강혜서의 매끄러운 허벅지가 스치는 순간, 악문 잇새에서 신음이 터졌다.

당장이라도 음부를 가린 속옷을 내리고 제 것을 처박고 싶었다. 그 욕구를 자제하느라 팔뚝에 터질 듯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성을 부여잡고 혜서의 입술을 제 것에서 떼어 내려는 순간, 그녀가 날숨처럼 속삭였다.

“좋아해…….”

좋아. 제정신 아닌 입술이 서하의 입술 틈을 좀 더 강하게 눌러 왔다. 그는 입술이 봉인된 채, 벌리지도 꽉 다물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섹스는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키스는 강혜서가 처음이었다.

입술을 나누는 행위는 뭐랄까, 섹스와는 다른 차원처럼 여겨지는 강박 관념 같은 것이 있어 왔다. 따지고 보면 성기를 몸 안에 쑤셔 넣고 살을 섞다 체액을 토해 내는 쪽이 훨씬 더 은밀하고 바닥없는 행위다. 그런데도, 혀를 섞고 타액을 나누는 키스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 교류처럼 느껴졌다.

보다 진실한 애정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의식 같다고 할까. 입 밖으로 말하기엔 너무 오글거리는 표현이지만 서하에겐 그랬다.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드로즈 안에서 팽팽하게 일어난 성기가 강혜서의 치구 아래서 압사될 것 같았다. 그 순간 조금 전 강혜서의 잠꼬대가 떠올랐다. 좋아해- 꿈을 빌어 은연중에 뱉어 버린 고해 성사는 당연히 그에게 행한 고백이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좋아한다는 새끼한테? 어차피 이뤄질 수 없어서 혼자 삭히다 끝나고 말 그 상대에게 말한 건가.

갑자기 뒤통수에 열이 뜨끈하게 올랐다. 서하는 제 목에 둘러진 두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손바닥 하나만큼의 간격을 두고서 강혜서의 눈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아기처럼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꺼풀을 슴벅이는 모양새가 다시 잠에 빠져들 것처럼 보였다. 그냥 두면 알아서 다시 잠들 것이다. 열도 많이 내렸고 한숨 더 자고 나면 완쾌까진 아니라도 끙끙 앓진 않을 터였다.

서하는 제 다리 사이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페니스가 금방이라도 천을 뚫고 나올 기세로 무람없이 발기해 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이성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와,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강혜서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고 방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본능과 충동은 저 혼자 극렬하게 정점으로 치달아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만의 애정과 집착, 제 것 위에 입술을 비비며 다른 새끼에게 좋다고 지껄이는 죄를 다스리고픈 파괴욕은 순수한 육욕까지 집어삼키며 제 몸집을 더 부풀려 댔다.

확대된 욕망은 즉각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강혜서의 몸속 깊이 들어가 제멋대로 날뛰고 싶다고.

지금…… 가져 버릴까.

허리를 곧추세워 드로즈를 벗어 던졌다. 푹 젖어 있던 속옷에서 날것의 냄새가 풍겼다. 그는 제 다리 사이에 꼿꼿하게 솟은 페니스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이 욕망과 뒤섞여 피를 끓게 했다.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는 새끼가 누군지 몰라도 어차피 이어질 수 없다고 했었다. 경험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지만 아직은 없을 것 같았다. 있다 한들, 지금껏 문란하게 좆질해 온 자신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설령 강혜서가 그동안 이중생활 요부로 살아왔대도 저와 비할 바는 못 된다. 절대로.

그러니까 지금 강혜서의 처음을 가져 버리고 천천히 공략해 나간다면. 그럼 그 짝사랑한단 새끼도 잊고 나한테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학교에서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는지, 돌아보면 헛웃음만 나왔다. 강혜서의 그 짝사랑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었던지. 상경대는 물론 인문대의 복학생 선배들이며 후배들, 하다못해 조교와 젊은 교수들에까지 레이더를 무한대로 뻗어 가며 탐지했었다.

제일 인기 많고 젊은 축에 속하는 30대 초중반 교수들도 매의 눈으로 살피다 못해, 그가 수강하는 전공 기초 과목 교수에겐 수업 중 일부러 곤란한 질문들을 퍼부어 진땀 빼게 한 적도 있지 않았는가. 물론 딱 저 새끼다, 짚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능숙하게 풀어 내리자 하나로 모여 있던 뽀얀 상앗빛 가슴이 살짝 흔들리며 숨겨져 있던 볼륨감을 드러냈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며 심장 박동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의 것이 강혜서의 안쪽을 힘차게 박을 때마다 저 동그란 가슴이 위아래로, 옆으로 출렁거릴 생각을 하니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서하는 똑바로 누운 강혜서의 위로 올라와 무릎을 세운 채 복부 위에 올라타듯 자리를 잡았다. 두 손은 음부를 덮은 조그만 레이스로 뻗어 가 다음 동작을 충실히 이행해 나갔다. 그는 손가락을 속옷 가장자리에 걸고는 아래로 살며시 당겼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치구 아래, 갈라진 틈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그대로 멈춘 채 비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스탠드 불빛이 희붐한 일출처럼 방 안에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릴 만큼 사위가 고요했다.

뭔가 거슬리는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여 보니 제 숨소리였다. 몽정한 적도 없던 십 대 시절로 돌아가 욕정을 다스리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 우스웠다.

“……선배.”

손을 들어 강혜서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곧바로 정정했다. 선배, 누나, 뭐가 됐든 이름 외엔 부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혜서야.”

“음…….”

강혜서가 달뜬 숨결과 함께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너른 어깨와 가슴이 보였다. 근육과 핏줄마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지며, 혜서의 머릿속 현실감이 한층 더 퇴색되어 갔다. 그녀는 여전히 꿈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하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눈앞에 있을 리가…….

허리 양옆을 짚고 있던 손이 시트를 거칠게 스쳤다. 가슴팍이 순식간에 혜서를 덮쳐 오며 특유의 기분 좋은 살냄새가 물씬 다가왔다. 코에 익은 윤서하의 체향이다. 꿈속에서도 냄새를 느낄 수 있던가, 몽롱하게 생각하던 중 저도 모르게 읏, 신음을 뱉었다.

뜨거운 혀가 귓불을 핥고 뺨으로, 이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말캉한 살점이 입 속을 한 바퀴 느른하게 핥아 대는 감각이 너무 짜릿하고 선연했다.

그의 혀가 더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그녀의 혀를 잡아챘다. 거세게 휘감는 농밀한 감촉, 아랫배가 간지럽고 다리 사이에 뭔가 뜨거운 것이 흐르는 감각에 혜서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머리를 뒤로 빼냈다.

“흐……. 이거…… 꿈이지……! 꿈 맞지…….”

이상해.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해……. 이렇게 뜨겁다니 다시 열이 오르는 걸까.

“응.”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속삭임이 이어졌다.

“맞아. 꿈이야. 그러니까 안심해. 힘 빼고. 착하지……?”

어린애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깻죽지를 움킨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괜찮아, 다정한 음성에 이어 혀가 다시 밀고 들어왔다. 열에 달뜬 설단이 혜서의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찔러 들며, 기어이 작고 귀여운 혀를 찾아내고 말았다. 혓바닥을 비비고 마찰하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귀가 멀 것 같다.

한 방울도 아깝다는 듯,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을 정신없이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강혜서의 것이라면, 이 예쁜 몸에서 내보내는 것은 죄다 제 것이라는 소유욕이 들끓고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아무렴 미쳤지, 제정신이겠어. 조금만 잘 달래면 진짜로 내 것이 될 수 있는데.

서하는 혀를 얽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당장이라도 다리를 벌리고 제 것을 찔러 넣고 싶었지만 애써 자제했다. 강혜서가 놀라서 도망가지 않게 천천히 밀어붙여야 했다. 제 성질대로 했다가 얼마나 큰 미움과 원망을 받을지, 욕망만큼 짙은 두려움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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