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배는 진화한다-18화 (18/121)

18화.

개강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4월 한가운데 금요일엔 아침부터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우산을 받쳐 든 강혜서가 저만치서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4층 높이에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걸음걸이다. 느긋함이라곤 없이, 일 분 일 초가 아깝다는 듯 늘 바쁜 몸짓이었다.

“어, 혜서다! 오늘 수업도 없는데 공부하러 왔나 봐. 진짜 부지런해, 강혜서.”

마침 경영학과 홈룸에 들른 송소희가 창가에 둔 컵을 들다 반가운 듯 외쳤다. 강혜서는 그들이 모여 있는 GK경영관과 도서관 건물 사잇길로 막 접어들고 있었다. 남정우가 노트북을 보고 있다가 소희 쪽을 돌아보았다.

“혜서 왔어? 부르지, 왜- 문자 보내든가. 본 지도 오래됐는데 점심 같이 먹자고. 요즘 수업 끝나기가 무섭게 인강 들어야 된다고 도서관 시청각실에서만 살잖아.”

“그냥 둬. 1차 시험,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잖아. 학기 중에 그런 공인 시험을 보는 게 어디 쉽겠어? 그때까지 컨디션 잘 관리하고 마인드 컨트롤도 잘하고 해야지.”

윤서하는 창에서 시선을 떼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강혜서의 모습이 더 보이지 않는 이상, 더는 바깥을 볼 이유가 없었다. 그가 문으로 다가서는 송소희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소희 선배, 정확히 며칠이에요? 혜서 선배 시험.”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투였다. 그녀가 나가려다 말고 휴대폰 스케줄러를 들여다보았다.

“음……. 셋째 주 토요일이라고 했으니까 17일. 그럼 나 스터디 간다, 이따 봐!”

“생일 일주일 전이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윤서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자리로 돌아가 잠시 놀려 뒀던 노트북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남정우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생일이라니 누구…… 앗, 혜서 생일이 24일이었냐? 그러고 보니…… 맞네. 작년 이맘때쯤 사무실에서 혜서 생일이라고 상품권 줬던 것 같아. 근데 서하 넌 어떻게 알았어?”

“어쩌다 보니. 그럼 2차는 언제야?”

“2차는 9월 초던가 그렇고 3차는 1월인가 그렇다더라. 원래 11월인데 시험 유형 살짝 바뀌면서 미뤄졌대.”

“3차까지 있어? 뭐가 그렇게 많아.”

윤서하가 혀를 차며 프린터기에 오류가 났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전문직 시험인데 3차야 애교지, 뭐. 근데 서하야. 너…… 요즘 사업이 잘 안 되냐? 그룹 말고 네 표현으로, 아담하고 작은 구멍가게 사업.”

“아니. 잘만 굴러가고 있어. 골치 아픈 거라면…… 아버지 생각해 라이벌 그룹 광고 안 넣는다니까 비상장 계열사인 척 들이미는 거 정도.”

“근데 요즘 왜 그렇게 저조해 보이냐. 요즘 다들 너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다더라.”

“별로……. 그다지 다운되지 않았는데. 이거 잉크 다 떨어졌네, 서랍에도 없고. 1층에 라운지 갈 테니까 수업 때 봐, 정우 형.”

윤서하는 노트북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문을 나섰다. 정우는 닫힌 문을 보고 흐아암, 기지개를 크게 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역시 이상해. 아무리 성가셔도 적당히 맞춰 주고 상대도 해 주는데 요즘은 불러 세우기만 해도 찬바람이 솔솔 부니…… 봄을 타는지, 뭔가 꼬이는 연애라도 하는 중인지.”

그는 제 끝말에 픽, 웃어 버렸다. 하긴 연애라니 그럴 리가. 저 새끼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하려면 보통 여자로는 안 될 텐데. 윤서하 머리 꼭대기에서 쥐락펴락, 들었다 놨다 요리할 깜냥이 있어야 되는데, 어지간해선 저놈 못 당하지.

“근데 저놈 자식은, 다 똑같이 저보다 한 살 위인데 왜 소희만 선배라고 존대하고 나한테는 반말 찍찍이야. 혜서는 과외 선생이었다니까 그렇다 치고……. 쳇, 학교 안에서만이라도 저 녀석한테서 선배 소리 좀 들어 보고 싶었는데.”

남정우는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소파에 잠시 기대 누웠다. 복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서 새벽같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도 춘곤증인지 자꾸 졸음이 밀려왔다.

* * *

“근데 혜서는 만나는 사람 없겠지? 요즘은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더더욱.”

서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1층 라운지 구석, 벽과 벽 사이 앉은뱅이 의자들 틈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그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프린터에서 출력된 종이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벽 너머를 살피자 2학년 여자애들, 귀대하고 복학한 이름 모를 선배, 그리고 차경현이 나란히 앉아 수다 중이었다.

“혜서 선배, 이성 교제나 남자 진짜 관심 없지 않아요? 화장도 거의 안 하고 꾸미는 것도 완전 무관심이고. 안경 벗고 자세히 보면 엄청 예쁜 얼굴이라 작정하고 힘주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신효림만큼?”

“야. 우리끼리니까 말이지만 신효림은 다 머니 파워지. 피부 케어 짱짱하게 받을 텐데. 과학의 힘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만, 아무튼 혜서 선배는 분명히 모쏠일 거야. 내가 장담해.”

“나, 나! 혜서 선배 힘준 거 봤어. 작년에 김 조교님 결혼식 때. 진짜 눈 돌아가게 예뻤어! 내가 볼 땐 신효림보다 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차경현이 언성을 높였다. 옆에 있던 선배도 그다지 진중한 타입은 아니었는지 꺼들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야, 안 그래도 나랑 같이 복학한 옆 건물 김상현 있잖아? 경제학과 톱에 아버지가 김&박 파트너 변호사- 이번에 강혜서 시험 끝나면 고백해 볼까 고민하는 눈치더라. 혜서가 최종 합격만 하면 부친 빽으로 좋은 데 소개도 시켜 줄 수 있다던데.”

“와, 진짜요? 김상현 선배 진짜 멋있는데. 집안, 인물, 스펙 뭐 하나 빠지지 않잖아요. 그래도 전 우리 과 서하 선배가 더 좋지만.”

“맞아. 서하 선배가 최강이야. 인물, 집안, 스펙 다 넘을 수 없는 철옹성이고 자기 힘으로 만든 회사도 있잖아. 고등학생 CEO로 언론 물타기 할 때부터 난 완전히……. 꺅, 서하 선배다! 선배님 언제부터 거기에-”

“선배.”

윤서하는 차경현이나 여학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딘가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인데 콕 짚어서 지적할 수 없는 그 무람없는 시선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 복학생에게 붙박여 있었다.

“강혜서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 하면 일침 놔주시는 게 좋을걸요.”

다분히 즉흥적인 거짓말이다. 하지만 짧은 찰나,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내놓은 최선의 허언이기도 했다. 강혜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혜서가 좋아하는 사람, 그 표현이 좀 더 애매하면서 파장도 더욱 클 것이다.

실은 혜서 선배, 만나는 사람 있어요- 이편이 보다 더 확실하겠지만 신빙성이 없었다. 강혜서를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봐 온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로만 들릴 터였다.

“네? 정말요? 혜서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설마! 전혀 모르겠던데- 누굴 만나고 있다는 기색은 전혀…….”

“에이- 서하 선배도 그냥 추측인 거죠? 근거 없는 소문이라도 들었거나.”

“아니에요. 사람 속사정은 겉으로 봐선 모르는 거죠! 비밀 연애,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다들 소희 선배, 정우 선배처럼 오픈하란 법도 없고!”

차경현을 비롯해 다들 입을 쩍 벌리며 놀라다가 의혹을 품기를 반복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아무튼 혜서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건 확실하니까 누가 됐든 헛발질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서하가 냉랭하게 일침을 놓고 돌아섰을 때였다. 화제의 주인공이 프린터 옆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앗, 혜서 선배…….”

“에잇, 난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물어볼래! 궁금해, 궁금하다고-”

차경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뻣뻣하게 서 있는 혜서에게 다가섰다.

“혜서 누나, 혹시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진짜로?”

“…….”

강혜서는 말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흔들리는 동공이 눈앞의 차경현, 저만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주목하는 복학생 선배와 후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서하에게 차례대로 향해 갔다. 그는 차경현 뒤에 서서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헛소문이죠? 에이, 그럼 그렇지……!”

“맞아.”

“예에?”

위로 번쩍 치켜들었던 차경현의 두 팔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그렸다. 강혜서는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시선이 차경현의 어깨 너머,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고 선 윤서하의 것과 한순간 맞닿았다. 그녀의 두 눈은 그의 것을 떠나 두꺼비 눈알처럼 크게 홉뜬 차경현의 것으로 되돌아왔다.

“맞아.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엑? 우와, 진짜요? 선배 그럼 교제 중이었던 거예요?”

“도대체 누구예요? 아, 비밀이니까 그건 말해 줄 수 없는 건가-”

강혜서는 좌중의 동요를 뚫고 말을 이었다. 아연실색하던 처음과 달리 완연한 침착을 되찾은 얼굴이다. 어느새 여학생들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들 눈이 호기심과 흥미에 가득 차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거렸다.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맞아.”

“알았어요, 누군지는 절대 안 물어볼게요! 그럼 이것만…… 고백은요? 안 사귀는 거면 아직인 거죠? 그쵸?”

“고백…… 못 해.”

“네? 왜요? 설마! 드라마처럼 불륜이나 그런…… 악! 야, 왜 때려!”

“미쳤냐, 거기서 불륜이 왜 나와! 혜서 선배가 그럴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니야.”

강혜서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후배들을 보는 표정이 어딘가 미묘했다. 평소처럼 차분한 가운데서도 다 내려놓고 해탈한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건 아닌데…… 처음부터 안 되는 사람이라서. 다시 태어나면 모를까…… 절대 이뤄질 수가 없거든. 미안한데 나 이만 가 볼게, 그럼…….”

강혜서는 프린터 앞에서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라운지 너머, 출구와 이어지는 복도로 빠르게 사라지는 동안에도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우, 우와……. 대체 누구길래? 그동안 선배한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야. 너희들.”

차경현이 후배들의 탄성을 가로막고 나섰다. 까불거리는 평소와는 달리 정색한 눈빛이다.

“여기저기 소문 퍼뜨리지 마. 혜서 누나, 거짓말에 능하지 못하니까 엉겁결에 말해 버린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데 퍼뜨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

“아, 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여학생들은 다소 뜨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꽁꽁 입을 다물고 있을 참새들은 아니다. 너만 알아, 너한테만 알려 주는 거야, 우리끼리만 알자,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퍼질 건 불 보듯 뻔하다. 본래 소문의 칠할 이상은 악의 없이, 발 없는 말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여전히 이어지는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서하는 너른 보폭으로 라운지를 벗어났다. 복도를 가로질러 출구까지 닿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워낙 걸음이 빨라 금세 도서관이나 다른 데로 가 버린 모양이었다.

숨이 조금 가빴다. 그제야 허겁지겁, 강혜서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붙잡아서 뭘 하려던 건지 답은 뻔했다. 미친놈처럼 우악스럽게 붙잡고 다그쳤을 것이다.

-진짜예요? 좋아하는 새끼가 있다고요? 그게 누군데-

“웃기지 마. 당연히 거짓말이지. 진짜일 리가…….”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입구를 들어오려다 흠칫거렸다. 장대 같은 체격에다 누구보다 존재감 뚜렷한 인간이 험악한 얼굴로 떡하니 서 있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 서하 선배, 안녕하…….”

그를 알아본 학생들이 인사를 더듬거리다 재빨리 지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씨발…….

하지만 이성은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쪽으로 점점 더 기울고 있었다. 강혜서처럼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만 말하고 답답한 여자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할 리가. 사실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따위 없었다면 제 입으로 시인할 이유가 없다.

어디까지 들은 걸까. 내 말을 들었으면, 그리고 그게 진짜라면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분명히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왜 내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서하는 그 자리에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뒤통수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 때문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무력감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보다 더 나빴다.

오래전 아버지 도움 없이 처음 창업하겠다고 평범한 고등학생 신분으로 동분서주했을 때 맛봤던 현실의 벽보다, 사람으로 인한 자괴감에 휩싸인 지금이 훨씬 더 분하고 절망스러웠다. 새삼 처음이란 각성에, 꽉 틀어쥔 주먹이 덜덜 떨려 왔다.

오롯이 타인으로 인해, 그 마음 때문에 이렇듯 제 마음이 지옥처럼 변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