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윤서하가 명백한 날을 세우고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다 못해 오금이 저릴 만큼 서늘했다. 소리 없이 사나운 시선은 혜서를 떠나 차경현에게로 향했다. 경현이 놀라서 눈알을 굴리자 윤서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 좀 주워 줄래.”
“어……. 그래.”
차경현이 상체를 아래로 굽힌 찰나, 윤서하가 다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혜서가 움찔 놀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경현이 얼떨떨하니 노트를 주워 그 앞에 놓자 윤서하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고마워. 근데 협업에 나도 끼워 줘.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그때 저만치서 여학생 둘이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윤서하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쩌지? 미안하지만 너희끼리 해야 할 것 같은데. 방금 팀이 생겼거든.”
정중하게 확실히 쳐 내는 태도에 여자애들은 머쓱해져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옹기종기 모여서 화기애애 논의를 하고 있었다. 혜서는 마지못해 프린트를 들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윤서하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혜서의 태도에, 차경현도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돌아앉았다.
“누나 먼저 의견을 얘기해 주세요.”
윤서하의 시원스러운 제안에 혜서가 미간을 좁혔다. 누나라니? 내내 선배였다가 왜 갑자기 누나가 되는데? 언제였더라, 한 번은 가족도 아닌데 왜 누나라고 부르냐고 질색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마뜩잖은 시선에 윤서하가 차경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엷게 웃었다.
“다들 누나라고 부르는 것 같아서 저도 그랬는데…… 그럼 안 되나요.”
웃는데 웃음기가 없었다. 혜서가 아니야, 낮게 한숨을 내쉬며 프린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란 판단이 섰다. 교재에서 봤던 이론을 접목해 제각기 의견을 말하는 동안 분위기는 놀랄 만큼 바뀌어 있었다.
어색했던 공기가 사라지고 각자 허심탄회하게 담화를 나누던 중, 문득 혜서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윤서하가 거북한 분위기를 원하지 않아서였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에게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좌중을 휘어잡고 분위기의 색을 정하는 힘이 있었다. 타고난 감각, 혹은 기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수업이 끝나고 정우와 다경까지 넷이서 학생회관에 모일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아까보다는 누그러졌지만 그녀 혼자만의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외를 할 동안은 오히려 아무 감정도 들지 않고 편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저 애 앞에서는 자꾸 움츠러들고 당당해질 수 없는지.
역시 그날의 키스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혜서야, 맛없어? 왜 안 먹고 깨작거려?”
“어? 아, 아니. 맛있어.”
“그치? 어째 일 년 쉬고 왔더니 학식의 질이 더 높아진 거 같다.”
“야, 난 월요일마다 학식별 금주 메뉴부터 본다니까-”
다경의 물음에, 정우도 만족스러운 듯 수저를 열심히 놀렸다. 문득 대각선에 앉은 윤서하의 눈길이 그녀에게 향했다. 혜서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그릇에 코를 박을 기세로 먹는 데만 열중했다. 뜻밖의 문자가 온 것은 정우와 서하를 먼저 보내고 다경과 배식구 옆 정수기에서 물을 마실 때였다.
-선배. 오늘 오후 수업 공강이죠? C동 201호 지금 비어 있으니까 거기서 봬요.
이어지는 메시지에 혜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할 말 있어요.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꼭 오세요.
“혜서야, 4시 수업까지 뭐할 거야? 일찌감치 도서관 가서 마케팅조사론 과제나 할까?”
“어, 다경아. 미안한데 나 잠깐만 C동 쪽에 다녀올게. 3학년 후배가 잠깐 물어볼 거 있다고 해서…… 먼저 도서관 가 있어.”
다경과 떨어져 C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할 말이라니 도대체 뭘까. 돈 문제라면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전에 메신저로 보낸 돈은 그가 끝내 수령 버튼을 누르지 않아 혜서의 계좌로 자동 환불되었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2층 복도에 들어선 순간, 저만치 강의실 앞에 한 여학생과 마주 보고 선 윤서하가 보였다.
여자애는 혜서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올해 신입생 중 미모가 단연 돋보여 개강일부터 남학우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신효림이다. 아이돌 멤버 같은 얼굴로 윤서하 앞에 딱 붙어서 뭔가를 연신 재잘거리는 옆모습이 혜서의 눈에도 무척 예뻤다. 남자라면 누구나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외모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안도 엄청나다 들었는데. 아버지가 현직 여당 의원이라 했었나…….
천천히 속도를 늦추던 혜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윤서하가 신효림을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지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식 없는 미소만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도 명확히 보였다.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복도 한쪽을 가득 메운 창 너머로 무르익은 봄 햇살이 비쳐 들었다. 분명 따사롭고 훈훈한 빛인데도 어디선가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심장을 조이는 그 냉기는 혜서의 전신에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혜서는 그 습윤한 감정의 정체가 질투임을 알았다.
질투라니. 내가 왜 윤서하를 두고…….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 그랬다. 동시에 깨달았다. 과외 수업이 진행될수록, 그게 완전히 끝나고 나서는 점점 더, 이제는 그를 먼발치에서만 봐도 너무도 어색하고 거북한 그 긴장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감정을 가져 봤자 아무 의미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사람을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 불순한 마음은 늘 약간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해 왔다.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존재에게 혼자서 과몰입해 온 것은 일종의 죄였다.
둘은 여전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신효림이 아니라 다른 걸맞은 상대라도 누구든 그럴 것이다. 혜서는 황급히 돌아섰다. 주의를 끌지 않도록 천천히, 소리 없이 왔던 길로 돌아서 걸었다.
할 말이 뭔지는 몰라도 여기서 멈추는 게 현명하다. 그편이 그녀와 윤서하, 둘 모두에게 최선일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등 뒤에서 쿵쿵,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렁찬 외침도 함께였다.
“혜서 선배! 어디 가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쨌든 여기서 마주치긴 싫었다. 계단을 휘돌아 내려오던 중 머리 바로 뒤에서 숨소리가 씨근거렸다. 악에 받친 부름도 함께.
“야, 강혜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팔꿈치가 와락 잡혀 버렸다. 그녀를 돌려세운 윤서하가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신효림은 반대쪽으로 사라졌는지 어디에도 없었다.
“왜 도로 가 버리냐고요! 씹, 사람 아주 빡돌게 만드시네.”
“그게…… 모, 못 간다고 문자 보내려고 했어. 지금 바빠. 도서관에…….”
“선배.”
그가 계단 중간에서 눈을 부라리며 씹어 뱉듯 물었다. 묻는다기보다 겁박에 가까운 으르렁거림이다.
“알아서 택해요. 질질 끌려갈래요, 자루처럼 들쳐 메져서 갈래요. 아니면 두 발로 나랑 도로 올라갈래요.”
혜서는 겁에 질려 미간을 좁혔다. 윤서하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다.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뭐든 할 것이다. 미쳤어, 정말로. 곧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른 강의실로 학생들이 몰려올 텐데.
“그냥 여기서 얘기…… 아냐, 그래. 올라갈게.”
혜서는 포기하고는 앞장서서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여기서 확실히 말하고 끝을 내 버리는 게 나으리라. 다시는 접점이 없도록. 그가 무슨 속셈이든 간에 더는 질질 끄는 일이 없게끔.
빈 강의실에 들어와 창가에 섰다. 혹시나 바깥에 말소리가 새어 나갈까 일부러 창 쪽으로 간 것인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윤서하는 그녀를 뒤따라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강의실 문을 잠가 버렸다. 달칵, 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동시에 혜서의 심장도 삐걱거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문은 왜 잠가?”
“중간에 누가 들어올까 봐. 단둘이 조용히 할 얘기라서요.”
윤서하는 창가와 문 사이, 정확히 한가운데 책상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퇴로는 차단되었고 얘기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 여기서 나갈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혜서가 창틀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서 운을 뗐다.
“말해, 용건.”
“선배. 나 왜 자꾸 피해요?”
윤서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사도 잘했고, 양호도 잘 데려갔고, 태 여사나 김 비서댁 어르신들에게 한 분 한 분 예의를 다해 답례하고 인사할 것도 다 하고. 그래서 이젠 볼 장 다 봤다 이거예요? 나한테는 더 이상 볼 일 없다 이건가?”
그는 뻔뻔할 정도로 노골적이며 직설적으로 제 의혹을 하나씩 입에 담고 혜서의 의중을 까발려 나갔다.
“말이 다르지 않나? 언제는 편입해서 학교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아는 척하자고 해 놓고…… 그래 놓고 마주칠 것 같으면 꽁지 빠지게 줄행랑이나 치고. 원래 그렇게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간이셨어요? 그렇게 파렴치한 입술은 아니었는데…….”
“뭐, 뭐라고?”
또다시 그날의 키스를 상기시키는 발언에 혜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자기가 한 말 지키지도 못하는데 앞으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너 지금 도대체…….”
“아직 학생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사회생활은 첫째도 신뢰, 둘째도 신뢰거든요.”
“윤서하.”
혜서가 제 뺨의 열감을 느끼며 간신히 쏘아붙였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이 보일 때마다 혜서가 일부러 돌아서서 우회한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입술이 어쩌고저쩌고, 잊으려고 애쓰는 순간을 재차 들춰내다니.
“나 대학 1학년 때부터 이것저것 알바하면서 지금까지 사회생활 쭉 이어 오고 있어. 너야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바는 알바일 뿐 정규 사원하고는 다르죠. CEO하고도 다르고. 사회생활도 급이 있다면 알바는 하수 중의 하수 아니겠어요. 아, 오해는 마세요. 알바가 별거 아니라고 폄하하는 게 아니라 역할에 따른 책임과 의무상, 굳이 사회생활의 경중을 따지자면 아래쪽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니까. 아무튼 이 얘기하려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니고.”
그가 한쪽 무릎을 세워 앉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나 왜 자꾸 피하냐고요. 다시 역병 환자 된 건가.”
“그게 아니라…….”
“뉴욕에서 연락 끊긴 거, 귀국해서도 한동안 잠잠했던 것 때문에 화나신 건 아니죠.”
그의 물음에 걱정 한 자락이 실려 있었다. 혜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녀가 뭐라고 연락이 없는 것에 화가 났겠는가. 하지만 이삿날 남정우가 했던 말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걱정됐던 건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뭐 안 좋은 일이 있는지 계속 연락도 안 되더라고.
며칠 뒤, 새벽에 돈 송금 문제로 문자가 몇 번 오갔다. 그리고 개강일에 멀리서나마 그를 보고 나서 안도했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혹시 미국에 있는 동안 뭐…… 안 좋은 일 있었니?”
혜서가 조금 전까지 화가 났던 것도 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뉴욕의 윤서준이나 다른 친인척의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윤서준은 그녀에게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 안부 문자를 보내 왔다. 그때마다 경조사나 별다른 사건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