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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진화한다-10화 (10/121)

10화.

찬바람이 일어나는 골목, 방금 살생을 자행했을지 모를 차체가 장대비 속으로 멀어져 갔다. 둔탁한 음은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범퍼를 맞고 떨어진 소리 같았다.

고양이는 무사했다. 죽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멀쩡하지도 않았다. 차체에 치이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건너편 구덩이에 착지할 때 다리를 접질린 모양이었다. 가냘프게 울기만 할 뿐 앞다리를 살짝 치켜들고 바짝 얼어 버린 모습이 처량맞았다.

서하는 우산을 내려놓고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자그마한 낙엽색 동물은 발목을 다쳐서 잔뜩 겁이 나 있었다.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면서 야옹, 구슬픈 소리를 내며 벌벌 떨어 댔다. 측은한 마음에 코트 속에 폭 넣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덩치를 보니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된 모양이다.

대차게 퍼붓던 장대비가 숨이 죽어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건너편을 보니 강혜서가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그를 보곤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았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보였다. 물방울이 알알이 맺혀 진주처럼 반짝거리는 예쁜 미역.

서하는 커다랗게 펼쳐진 우산을 다시 집어 들고는, 코트 안에 넣은 무게를 한 손으로 받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강혜서가 들릴락 말락 속삭임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은 아니다.

“야…… 양호야.”

“얘가…… 양호였어요?”

씨발. 진작 좀 말해 주지. 양호란 새끼가 누군지 실컷 궁금하게 만들고는.

“무슨 고양이 이름을 그렇게 지어요? 혹시 고양이라서 고양호, 이렇게? 하, 네이밍 센스 진짜 대단하다.”

“살았어? 괘, 괜찮은 거지? 무사한 거지?”

양호가 나 불렀어? 말하듯 귀를 뾰족하게 세우곤 코트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재차 일어나려던 강혜서의 몸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안도감에 다시 힘이 풀린 모양이다. 머리뿐 아니라 조그만 얼굴이 온통 빗물에 젖어 있었다.

“선생님 고양이예요? 아까 그 사람이 선생님 고양이 공격했고? 어디 갔어, 이 씹…….”

그는 집주인이 사라졌던 골목을 흘깃 노려보곤, 주저앉은 혜서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보슬비가 그의 머리칼, 부드러운 컬을 빠르게 적셔 왔다. 서하는 몸을 굽혀 혜서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렇게 비 맞고 있으면 어떡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손잡아 줄까요?”

혜서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떨궜다. 희미한 어깨의 들썩임 아래, 머리카락도 미풍에 흔들리듯 일렁거렸다. 강혜서는 울고 있었다. 서하는 그녀의 머리에 닿지 않게 한 손에 든 우산을 좀 더 위로 세우고는 몸을 바짝 기울여 왔다.

“쌤.”

“흐……윽……. 흐, 고마워……. 미안……. 너무, 너무 놀, 흐윽…….”

그는 흐느끼는 혜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족 같은 고양이가 공격을 당해서 맞아 죽거나 로드킬 당할 뻔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트럭이 지나가기 직전의 상황을 짧게 목격했기에 안도감에 더 눈물이 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제 심장이었다.

“쌤. 선생님.”

강혜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철벽을 허물고 오롯이 감정을 드러낸 것은. 세상의 절망과 희망이 한데 녹아든 표정. 보석 같은 눈물을 서럽고도 처연하게 한 방울, 한 방울 떨구는 얼굴. 부서질 듯 투명하고…… 눈부시게 예쁜 강혜서.

“그만 울어요. 이렇게 무사한데.”

그리고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그냥 울어요. 실컷. ……가려 줄 테니까.”

서하가 우산을 조금 더 높이 치켜들어 도로 쪽의 시야를 막았다. 우산 속의 강혜서는 이제 그의 반경 안에만 있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강혜서의 흐느낌이 좀 더 커졌다. 몇 년 동안 꾹꾹 누르고 참아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았다.

그는 혜서의 울음이 잦아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어릴 적 서준이 형이 그랬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벌 받고 나서 자존심에 이 악물고 참았을 때, 그냥 울라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냥 울어, 서하야. 여기 아무도 없잖아. 형이랑 둘뿐이니까. ……비밀로 해 줄게. 울음도 웃음처럼 감정의 하나야. 감정은 가끔 확 터뜨려 줘야 좋은 것이거든.

강혜서도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을 후련하게 토해 낸 적은 거의 없을 터였다. 항상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자제만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녀의 가정사가 떠오르자 마음 한편이 아릿해 왔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가족을 하나씩 그렇게 잃고서, 이렇게 혼자서 버티기까지.

가슴이 시려 왔다. 동시에 뻐근해졌다. 보듬어 주고 지켜 주고 싶다는 갈망과 다짐이 흘러넘칠 듯, 몸속을 휘감은 감각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심장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지그시 눌러 왔다.

냐옹, 양호가 답답한지 코트 위로 다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울음이 잦아든 혜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 바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빨려 들 듯, 맑은 심연과도 같은 동공이다. 너무도 예뻤다. 소유욕을 부추기는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갖고 싶었다.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불가항력에 이끌린 것 같았다. 이성은 한순간 날아가고 그저 본능에 따르고만 싶었다. 그게 숨을 쉬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로 느껴졌다. 그래서 강혜서의 턱을 잡고 그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따스한 숨결이 입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강혜서의 입 속은 갓 만들어진 솜사탕을 연상시켰다. 서재 책상에 마주 앉을 때마다 늘 아련하게 풍겨 오던 꽃내음 비슷한 향이, 혀와 점막의 달콤함에 섞여 서하의 오감을 꽉 채웠다. 몸속의 열이 일시에 들끓으며 머릿속이 핑 돌았다.

혜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반사적으로 감겼다. 미친 걸까.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응당 입술을 떼고 밀어내야 할 텐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그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숨결에 이어, 데일 듯 뜨거운 혀가 제 것을 천천히 휘감아 왔다. 얼음처럼 경직된 몸과는 달리, 그녀의 혀도 열감을 띤 채 느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혀로부터 옮겨 온 온기가 혜서의 입 안을 통해 전신에 퍼져 가고 있었다. 막 날갯짓을 시작한 나비처럼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참을 흐느꼈던 동통이 사라지며, 새로운 종류의 둔통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 왔다. 점막과 치열을 무지근하게 쓸던 혀가 그녀의 혀를 처음에는 간 보듯 섬세하게, 점점 가열하게 비벼 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타액이 넘어가며 살점이 스치고 빨리는, 젖은 소리가 우산 속 가득 흘렀다.

미쳤어……. 말도 안 돼.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혀를 빨리는 감미로움 속에서 혜서는 도리질 쳤다. 벌건 대낮에 길 앞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그것도 윤서하와 벌이고 있다니. 과외 선생과 학생이, 아니 그렇진 않았다. 오늘부로 더 이상 선생과 학생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된다. 아무런 접점도 없는 윤서하와 이런 짓은…….

눈을 뜨고 밀어내려다 다시 감아 버렸다. 뒤통수에 피가 확 몰리며 아찔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키스란 게 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말할 수 없이 황홀해서 다들, 첫 키스란 것에 그토록 큰 의미를 두고 모든 로맨틱한 행위의 시작으로 여기는 것이구나, 실감이 났다.

냐아아옹, 새된 울음에 혜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팔이며 어깨를 닿는 대로 밀어내자 드디어 입술이 떨어졌다.

“아, 아야! 알았어, 알았어.”

더는 갑갑해서 못 참겠다는 듯 양호가 코트 자락을 비집고 나오려다 그의 손등을 긁은 모양이다. 서하가 고양이를 품속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다시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우산을 집어 들고 혜서의 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요.”

“가, 가다니. 어딜?”

몽롱하니 서 있던 혜서가 어버버 물었다. 조금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꿈속을 헤매다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반면 윤서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덤덤하게 답했다. 조금 전의 키스는 정말 꿈이 아니었을까, 착각이 일 정도로 태연자약한 태도다.

“이 근처에 동물 병원 없어요? 없으면 우리 동네로 가요. 공영 주차장에 차 세워 놨으니까.”

“동물 병원? 왜? 양호, 다, 다쳤어?”

“심각한 건 아닌데 앞발이 좀 이상해서요. 일단 가요.”

빗줄기는 이제 가랑비보다 못한 정도로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우산을 넘기고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앞장서서 주차장 쪽으로 바삐 걸었다. 그래서 혜서는 보지 못했다. 후들거렸던 다리를 열심히 가누며 그의 뒤를 따라가는 그녀의 눈에 윤서하의 낭패한 얼굴이 보일 리가 없었다.

씨발. 미쳤나……. 내가 왜 그랬지.

하지만 후회되진 않았다. 후회는커녕, 더 오래 하지 못한 것에 짙은 아쉬움이 일었다. 서하는 눈을 질끈 감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혀를 내밀어 말라 버린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강혜서의 보드랍던 혀, 사탕처럼 녹아내릴 듯 달콤한 냄새가 떠오르자 입술이 금세 다시 촉촉해졌다.

잠시 후 고양이를 혜서에게 넘겨주고 운전석에 앉는 동안에도 바지 속 사정은 그대로였다. 한순간 피가 몰려 달아오른 제 물건은 이제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다리 사이에 바윗덩이를 품은 기분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 동네로 갈게요. 아는 수의사가 하는 데 있어요.”

“어……. 응.”

얼떨떨한 대답이 들려왔다. 룸 미러로 보이는 강혜서의 얼굴과 머리는 여전히 물방울투성이였다. 콘솔 박스 속 티슈를 꺼내 줄까 하다가 대신 히터의 온도를 높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뺨이 예뻐서 아직은 물기를 닦지 않았으면 싶었다.

신호가 걸려서 잠시 차가 멈췄을 때 다시 룸 미러를 보았다. 강혜서가 고양이를 꼭 안고서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뭔가 난처한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얼굴이다. 아까 그 기습적인 키스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기를 바랐다. 그녀도 그만큼 그 키스를 뇌리에서 떨치지 못하고 있기를. 돌아보니 키스가 좀 더 길었다면, 아쉬움에 끊임없이 반추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가 이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데 혼란스러워하고, 그리고 애태우길 절실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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