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통신사 TPA 소속 종군기자인 하조윤은 내전지역 취재 중 사고에 휘말려 5년 간 혼수상태에 빠진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고 귀국해 옛 연인을 찾아가지만 연인의 옆은 이미 다른 누군가로 채워져 있었는데… 갓난 시절부터 친구였고, 머리가 굳고 나서는 사랑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별을 생각해본 적 없던 연인에게 내가 아닌 다른 연인이 생겼다. 세상은 모든 결과가 나의 이기심과, 나의 무책임 탓이라 손가락질한다. 헤어짐에도 시간과 방법이 필요했지만, 한 번도 이별을 경험하지 못한 하조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자신을 잊으려는 옛 연인에게 매달릴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마음은 필요 없고 오로지 몸만 즐기자는 이 남자. 서른 한 해 동안 살아온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하조윤은 사랑과 헤어짐, 그리고 책임감을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다. [본문 중] 사랑이 끝났다. 인생의 절반이 생살 째 그대로 도려내졌다. 연인 관계가 된 지는 팔 년. 아니, 의식을 잃었던 시간까지 포함하면 십삼 년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였으니 알아 온 시간만 따지면 자그마치 서른한 해였다.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평생을 함께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서른한 해 동안 이어진 사랑의 끝은, 그렇게 쉽고, 그토록 허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는 아이의 웃음이 남아 있었다. 사진만은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는 누군가의 삶을 기록해야만 했다. 그것이 슬프고, 행복하고, 비참하고, 감사하며, 고통스러워서, 종국에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하조윤은 엎드려 바닥에 얼굴을 묻곤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죽을 것 같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는 모든 감정이 끝나기를 바랐다. 이대로 다 잊을 수 있기를,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랐다. / “너 처음부터 나 그런 눈으로 봤어.” “무슨… 음….” “나 좀 봐 달라고. 도와 달라고.” “그런 적….” 고약한 말과 달리 입술과 뺨, 눈꺼풀 위를 정신없이 훑는 키스의 느낌은 매우 모호해서 상대의 마음을 조금도 가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하조윤은 재빨리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머리에도 들어 있는지 뇌 전체로 커다란 북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꽉 누르듯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뭘요.” “어설프게 꼬시지 마. 아는 것도 없는 게.”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라 생각하며 하조윤은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남자의 얼굴을 망막에 담았다. 조금 전과 달리 잔뜩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은 분명 제 작품이 틀림없다. 짜증 날 법한데도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어 이상했다. 공기는 잔뜩 달아 있었고 어둠 속 마주친 눈빛들은 뜨거움을 담고 서로에게 얽혀 갔다. 어둠 속 창백한 손이 덜덜 떨며 남자의 재킷 깃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곧 별다른 거부 없이 그가 자연스레 제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권주가 한 말은 사실 제가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봐요. 왜 꼭 나를… …처럼…. / 부재가 길어질수록 추억만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존재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제로섬의 지점에서 그는 제 발밑이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공포를 경험했다. 근원 모를 시커먼 아귀의 바람이 폭풍우처럼 불어 닥쳤다. 모든 생각과 마음은 박살이 나고,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황폐해진 잿빛 땅만 남아 있었다. 무생물처럼 살아 숨 쉬는 나날은 끝없이 반복됐다. 어떠한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삶의 시간이었다. 살아 있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나날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그의 생존본능이 귓가로 속삭였다. 잊으라고. 그를 잊으라고. 사랑을 죽이고 그를 잊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