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뺨을 스치는 봄바람의 방향을 따라 남자 역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길가는 차량과 행인들로 북적였다. 그가 사무실을 나와 한참을 걸어왔던 길이기도 했다.
징-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떨림에 강태정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름이 화면 위에 인이 박이듯 새겨져 있었다. 상대가 보낸 메시지를 빠르게 훑으며 강태정은 익숙한 손길로 답신 내용을 적어 갔다. 마지막 전송 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후련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부지런히 가야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했다.
***
이십여 분쯤 더 걷자 길모퉁이로 붉은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빈티지한 간판과 간결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소규모 가죽 공예 공방이었다. 그의 목적지였다.
깔끔하게 니스 칠한 나무문을 열자 맑은 차양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멀찍이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공방 주인이 삐쭉 고개를 들었다. 일어서려던 주인은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최근 빈번하게 방문하던 단골임을 알아차리곤 수인사로 인사를 대신했다. 편히 구경하라는 제스처였다. 마찬가지로 짧게 수인사 후, 강태정은 느리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주인 외에 다른 이가 없는 가게 안은 숨소리 하나까지 선명히 들릴 만큼 고요했다.
실력으로 유명한 공방답게 진열된 물품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었다. 물건을 보는 시선 또한 꼼꼼했다. 사용할 상대를 생각하는 탓이다.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새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한동안 재질과 색상 등을 따져 가며 물품을 살피던 시선이 멈췄다. 눈길이 닿은 곳에는 빈티지한 색상으로 마감 처리된 카메라 가방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었는지, 가죽이 아닌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단순한 디자인이었으나 은근히 내부 구성은 실용적이었다. 그 순간, 강태정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
망설임을 담은 손끝이 움찔거렸다. 꾹 다문 입술은 미소를 짓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모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공중에 멈춰 있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가볍고 까끌까끌한 재질의 바디와 달리 가죽으로 마감 처리된 작은 포켓에 손끝이 닿았다. 가죽의 질감은 수천 번 무두질한 듯 부드러웠다. 거친 야생의 흔적은 그저 태초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이 걸렸으리라.
다시 처음 망설였던 만큼의 시간을 들여 손끝이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러모로 상등의 상품이었으나 강태정은 제가 저 가방을 구매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상대에게 영원히 전해 줄 수 없는 탓이었다.
간간이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따로 관심을 둔 적도 없고, 의식적으로 관심을 껐던 적도 없었지만, 여러 채널을 통해 상대의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왔다. 여전히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부였으나 그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관심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가끔 퇴근 후 습관처럼 뉴스를 보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이 좋지 않은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피하고 괴로워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일에 관심을 갖고 때로는 걱정을, 때로는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다. 괴롭지 않은 건 아니나, 그런 감정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트라우마임을 알기에 과거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마음조차 시간의 무게에 퇴적되어 언젠가는 흔적만 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문득 잔혹한 현장 어딘가에서 제 인생 전부를 걸고 잊히지 않기 위한 현실을 기록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너는 여전할까.
여전히 올곧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조금은 더 네 삶에 미련을 갖게 되었을까.
차마 직접 묻지 못한 물음이 어지러이 떠돌았다. 질문 속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색채는 과거와 많은 부분에서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막연했던 가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법 확실한 사실로 굳어갔다.
전혀 다른 속도, 다른 궤도로 돌아가는 삶이 그러했고, 서로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불현듯 너를 생각해 본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찰나의 자극처럼 그렇게.
지잉--
그 순간 다시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쉽사리 유추했다.
“음.”
곤란한 눈으로 액정을 보며 강태정은 제게로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특유의 따뜻한 마음은 부드러운 눈빛과 섬세한 손길 곳곳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한참 장문의 답신을 찍던 강태정은 이내 다시 원래 관심을 두던 진열대로 시선을 옮겼다. 시야 안으론 다시 소기 방문했던 목적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한동안 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찾던 그의 손길은 어느 한 진열대에 가서야 완전히 멈췄다. 고민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제가 생각하던 그대로의 디자인의 제품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지어졌다. 망설임 없이 물건을 빼내고는 슬쩍 몸을 틀었다. 그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매장을 울렸다.
“고르셨어요?”
식사를 마친 듯 주인장이 느긋한 걸음으로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긴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헤어스타일이 범상치 않았다. 익숙한 듯 강태정은 빙그레 웃으며 오랫동안 고민하며 고른 물건을 건넸다.
“이 지갑으로 할게요. 포장 부탁드립니다.”
“선물하시려나 봐요.”
되묻는 말에 강태정은 잠시 뺨을 긁적이다 고개를 주억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어련히 잘해 드리려고요. 조금만 앉아 계세요.”
넉살 좋게 말한 주인이 포장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잠시 그를 보던 강태정 역시 한구석에 놓여 있던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그닥.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창을 흔들었다. 뺨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아,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한낮의 나른함이 깃든 틈을 타 단단히 묻어 두었던 마음 한줄기가 몰래 흘러나왔다.
아마도 오래도록 볼 수 없고, 오래도록 말해 줄 수 없을 누군가를 향한 그 마음.
아마도 너를 영원히 잊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더 친애의 감정을 담아,
조금은 더 우정의 감정을 담아,
조금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가족으로서의 마음을 담아 네게 전한다.
행복하라고.
나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겠다고.
살포시 포개진 두 손이 서로서로 헐겁게 얽혔다. 꽃이 만개한 봄의 향기가 공기 사이사이로 망울져 퍼졌다. 그리운 기억의 흔적을 좇듯, 마음은 먼 궤적을 그리며 휘어졌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행복했던 인생의 어귀에서 이제야 비로소 지친 어깨의 짐을 훌훌 털어 내린다.
봄.
찬란한 봄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