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입술을 달싹였다.
“이모. 감사해요. 피아노 맡아 주신 거요.”
재차 고마움을 전하자 서연희가 안쓰럽다는 듯 눈썹 끝을 떨어트리며 웃었다.
“고맙다는 말 그만해도 돼, 서윤아.”
“그래도 자리 차지하는 물건이라…….”
“얘는. 어차피 공간도 넓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따지고 보면 연재가 들여온 거고, 걔가 걔 마음대로 자기 방에 두겠다는데 뭐가 어때. 정말 괜찮아.”
문서윤은 제 팔을 토닥이는 여자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우연재가 제 고집대로, 그리고 1층이 아닌 제 거실에 들인 물건이라지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인간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피아노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묻지도 않고 받아 주신 게 감사했다. 심지어 조율사를 불러 조율까지 마치신 것 같았다.
‘피아노…… 어쩌다 여기 왔는지 우연재가 말했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세한 이야기를 꺼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통보했으면 또 모를까.
어른들 입장에서는 궁금하실 법도 한데 아직까지 묻지 않으시는 걸 보면 이대로 넘어가려 하시는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약한 안도감이 스며들어 문서윤은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말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얽혀 있어 상세히 말씀드리기가 민망했다.
“핑계에 자주 놀러 오면 더 좋지.”
“자주 올게요.”
“둘이 무슨 얘기 해?”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서윤이한테 자주 놀러 오라고 했어. 겸사겸사 아들 얼굴도 좀 볼 겸?”
“문서윤이 뭐라고 했는데.”
“자주 놀러 온다던데? 너도 자주 좀 와. 엄마 아빠 바쁜 거 알면 아들이 얼굴 비쳐야지. 엄마가 찾게 만드니?”
서연희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우연재의 등을 툭 치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나저나 왜 올라왔어?”
“둘이 놀게.”
“자식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니까.”
얄궂게 눈을 흘긴 그녀는 이내 잘 놀라는 말과 함께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서윤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셨다.
“애인 얼굴이나 봐 줘.”
우연재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조르듯이 칭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문서윤은 파드득 놀라 제게 몸을 구기는 어깨를 밀어냈다.
“미쳤어?”
“뭐가.”
고작 그 정도 밀어냄에 떨어져 나갈 우연재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연재는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목덜미에 이마를 묻으며 키득거렸다.
“이모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이 거리에서 안 들려.”
문서윤은 무심결에 문가를 살폈다. 진작 내려가셨고 집도 워낙 넓어 대화 소리가 들릴 리는 없지만, 그래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조심…… 읏.”
목덜미에 입술이 달라붙자 간지러움이 흩어지며 절로 어깨가 튀어 올랐다.
“알았어. 조심할게.”
목소리는 귓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이게 조심하는 사람 태도야?”
어이가 없어 묻자 우연재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단정하게 뻗은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좋은데 어떻게 참아.”
문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대놓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면 제가 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더 능청스럽게 구는 게 분명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직도 멋쩍게 구는 저와 달리 우연재는 좋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했다.
사실 문서윤은 연애 초기만 하더라도 우연재와 저 사이에 크게 달라질 만한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간 붙어 있던 시간이 길었던 데다 함께한 시간이 오래된 만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귀고 나서부터는 안 그래도 잦던 스킨십이 더욱 자잘하게 늘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비슷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차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굴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우연재의 말버릇이 귀에 익은 만큼, 그가 습관처럼 이상한 말을 던져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오히려 마음을 들킬까 무서워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어졌으니 예전보다 평온하게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이나 애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굳어 곧바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좋은 마음이 훨씬 컸지만, 한편으로는 얘는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지, 싶어 쑥스럽기도 했다. 짝사랑을 오래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문서윤도 좋은 것 같은데.”
또다시 뺨을 쥔 우연재가 고개를 젖히게 하더니 입꼬리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쯤 되자 그만하라는 경고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단 포기가 밀려들었다. 도저히 우연재의 고집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문서윤은 옅게 웃고 말았다.
“무슨 얘기 했어?”
우연재는 부러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뺨에서 떨어져 나가는 손길에 미련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게 빤히 보여 문서윤은 괜히 그가 짓누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피아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피아노 어떻게 관리하냐고 물어보셔서 얘기해 드렸어.”
“돈으로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문서윤은 순순히 수긍했다. 지난 2년간 피아노를 방치하다시피 한 주제에 정성이라느니 그런 말을 덧붙이는 것도 우스웠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문제없나 확인해 봐.”
우연재가 턱 끝으로 피아노를 가리켰으나 문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봐서 뭐 해. 그리고 이모가 조율사 불러서 조율도 하신 것 같던데.”
어머니의 유품이라 예민하게 반응한 거였지,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에 대단한 애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악기이니만큼 헛되이 망가트릴 생각은 없지만, 피아노를 고르는 상황도 아니고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이 물건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습관적으로 서늘한 온도가 맴도는 악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우연재가 뒤에서부터 끌어안듯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어깨에 턱을 기댔다. 사귀기 전부터 익숙했던 스킨십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리자 눈이 마주쳤다.
“피아노 쳐 줘.”
우연재가 몸을 구겨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내온 덕분이었다.
“지금?”
뜬금없는 요청에 문서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가에서도 쳐 달라고 한 적이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 없는 부탁이기는 했다. 그래도 갑자기, 라는 의문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적 없는데.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거 아냐?”
“아닌데.”
우연재가 턱을 떼어 내며 실실 웃었다. 피아노는 보통 듣는다고 하지 않나, 도통 저 머릿속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어려운 요청은 아니었으나 문서윤은 선뜻 알았다고 대답하는 대신 피아노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망설였다.
“좀 그런데.”
“뭐가.”
“아래층까지 들리잖아. 두 분 얘기하고 계실 텐데.”
“우리 엄마는 네가 안 치면 더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
문득 몇 분 전 그녀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끔 와서 쳐 주고 그래. 악기도 안 쓰면 녹슨다잖아.’
사전적 의미 그대로 녹슨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섬세하게 조율해도 쓰지 않는 악기는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럼 내려가서 허락받고 쳐 줄게.”
아무리 그래도 우연재와 저만 있는 상황도 아니고, 아래층에 어른들이 계신데 무턱대고 피아노를 치기가 뭣했다. 본가면 또 모를까, 우연재의 집이었다. 손님으로 온 입장인데 혹시라도 제멋대로 피아노를 쳤다가 소음처럼 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치부할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곧장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움직이려는데 허리를 감싼 완력이 강해졌다.
“무슨 허락을 받아.”
우연재가 픽 웃었다.
“네가 우리 집 한두 번 와?”
문서윤은 얼떨결에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반쯤은 우연재의 힘에 끌려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너네 집에서 피아노 쳐 본 적은 없잖아.”
예전처럼 곧잘 치는 것도 아니었다. 우연재 앞에서 치는 일이야 어렵지 않아도 어른들이 계신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만 듣는다고 생각하고 쳐.”
우연재가 옆자리를 꿰찼다. 혼자 앉기에는 넉넉해도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앉기에는 비좁은 의자였다.
“왜 옆에 앉아?”
“애인 피아노 치는 거 가까이에서 보려고.”
“이러고 어떻게 쳐.”
못 칠 거야 없지만, 지나치게 몸이 밀착되어 있어 팔을 마음대로 뻗기가 어려웠다. 밀어내듯 맞닿은 팔에 힘을 싣자 우연재가 어깨를 슬쩍 뒤로 빼더니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하게 눈썹을 끌어 올렸다.
“이모 올라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일어나, 빨리.”
“너 부끄러워할까 봐 안 올라오실걸.”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저를 배려하겠답시고 가만히 계시다가 연주가 끝난 뒤에야 알은체하실 테다.
“애인 피아노 치는 거 보기 어렵네…….”
작전을 바꿨는지 우연재가 불쌍한 체를 해 왔다. 눈썹꼬리가 축 떨어지더니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극적인 변화에 문서윤은 결국 한숨을 내쉬듯이 웃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져 주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