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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29)화 (129/139)

129화

허리 위로 엉겨드는 무게에 문서윤은 어렴풋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가를 간질이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손을 뻗어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을 정도였다. 제 허리를 꽉 껴안은 채 잠든 남자가 보인 건 그다음이었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문서윤은 픽 웃었다. 저나 우연재나 울다가 병원에 다녀온 뒤 잠든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들이었다.

몇 주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고작 한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을 뿐인데도 머릿속이 깨끗했다. 자연스레 지난 몇 시간이 둥실거렸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병원에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 다녀왔다. 유리를 밟은 상처라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이물질이 들어간 상태는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물론 상처가 크게 벌어진 바람에 꿰매긴 해야 했다.

우연재는 붕대를 휘감은 발로도 잘만 걸어 다녔다. 겉보기에는 다친 게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감쪽같았으나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할 듯했다.

‘어떻게 그걸 참고 있었지. 피도 많이 났는데.’

의사에게 왜 이제야 왔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먼저 대화를 끊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성적으로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재에게 휩쓸려 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대화가 꽤 길기는 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대화를 끊어 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문서윤은 잘못했다며 우는 소꿉친구를 두고 단칼에 대화를 끊어 낼 정도로 냉정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하물며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재였다. 어릴 때도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데, 다 큰 성인이, 그것도 우연재가 저 때문에 우는 걸 외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

문서윤은 조용하게 우연재를 응시했다. 며칠 동안 자지 못한 사람처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더라니, 많이 피곤했는지 저보다 훨씬 깊게 잠든 것처럼 느껴졌다.

‘진통제 먹어서 더 그럴 수도 있겠네.’

고개를 내렸으나 허리를 감싼 팔 때문에 안겨 있다시피 한 자세라 발 쪽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붕대에 칭칭 감겨 있으니 내려다보더라도 상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했다.

문득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손목이 다칠까 봐 무작정 넘어져 깁스를 한 저보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선 우연재가 더 바보 같았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이성적이지 않으니 벌인 짓이겠지만, 여전히 저 머릿속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 질렸어?’

당황해 몸을 붙들자마자 우연재가 내뱉은 질문이었다. 가끔 말장난을 치듯 툭툭 던지던 물음이기도 했다.

더 이상 친구 관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좋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지극히 노골적이고, 지나치게 솔직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속을 모르겠네.’

문서윤은 다시금 물끄러미 우연재에게 시선을 보냈다.

몰랐다고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잘 몰라서 제 마음도 몰랐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한편으로는 얼핏 그 의미가 와닿았다.

‘난 정상이었던 적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린애가 어른스러우면 얼마나 어른스럽겠냐만, 또래 친구들을 약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커 가면서 그런 부분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잘 감춰 두었던 모양이다.

새삼스레 우연재가 낯설게 느껴진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한 부분만 보며 좋아한 건 아니니 그 부분은 별 상관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의문만 들었다.

문서윤은 좋아한다는 말에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기가 버거웠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우연재 때문에 당황했고, 그 이후에는 그를 병원으로 끌고 가느라 깊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울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제 앞에서만 울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문서윤은 단 한 번도 우연재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린애들끼리 장난을 치다 걸핏하면 싸우곤 하던 유치원 시절에도, 막 초등학교에 적응하던 시기에도, 은근히 서열 아닌 서열이 생기던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기 때부터 잘 우는 편은 아니라고 들었으니,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놀랐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런지 아직도 그 순간이 선명했다.

불쌍하게 여겨서라도 좋아해 달라 조르는 구걸 아닌 구걸 뒤로 눈물이 떨어졌다. 언제나 여유를 달고 다니는 얼굴에 눈물이 맺히자 문서윤은 크게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우연재 역시 울 수 있는 인간이구나 싶어 약간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거 보면 나랑 별로 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

문서윤은 햇빛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여전히 하늘에 고여 있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으나 팔이 아파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일어나자 싶어 몸을 뒤척이는데 돌연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실렸다.

“도망가지 말라니까…….”

언제 일어났는지 우연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졸린 듯 눈을 감은 채였다. 자고 일어나 둘 다 정신을 차리면 어색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덕분에 문서윤 역시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었다.

“놔 봐. 눈부셔.”

팔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으나 그렇게 쉽게 물러날 완력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밀어내자 우연재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는 햇빛이 비친 문서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키득거리듯 웃으며 그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놓으라니까. 무거워.”

“무거워?”

이내 허리를 감싼 팔이 좀 더 깊숙이 들어오더니 우연재가 몸을 굴렸다. 덕분에 문서윤은 꼼짝없이 끌어안긴 채로 침대 위를 반 바퀴 정도 굴러야만 했다.

“뭐 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연재와 자리가 뒤바뀐 채였다.

“그쪽에 누우면 눈 안 부시잖아.”

조금 전과 달리 햇빛을 등진 자세였다. 덕분에 눈가를 괴롭히던 햇빛은 제가 아닌 우연재에게 달라붙었다.

그래서 갑자기 굴렀다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제야 우연재가 완전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시긴 한지 눈매가 슬쩍 찡그려졌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너 껴안고 있어서 그나마 잠든 거니까.”

“……너 그동안 잠 제대로 못 잤어?”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낮잠을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한껏 나른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인상이 제법 날카로웠었다.

“어떻게 자.”

눈부심을 피하듯 우연재가 다시금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커다란 대형견이 몸을 한껏 구긴 모양새라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문서윤이 그만하자고 하는데.”

그날 이후 문서윤은 의식적으로 우연재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어쩔 수 없이 머릿속이 침략당하는 날이 있었지만, 전부 과거의 편린들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제가 잠을 설치고 있을 때 우연재는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저나 살 빠졌네.”

우연재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 걸 알고 대화 주제를 돌린 게 분명했다. 문서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누구 때문에.”

“아, 좋네……. 나 때문에 마음고생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고개를 떼어 낸 우연재가 살살 웃으며 대답했다. 얄밉다기보다는 지극히 우연재다운 뻔뻔함이라 입술 사이로 피식,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고민 좀 했어?”

“뭘.”

“한 번 봐줄지, 말지.”

허리를 감싼 팔이 물러나더니 우연재가 가뿐하게 움직여 몸 위로 올라타듯 자세를 바꿨다. 무릎을 꿇고 팔로 상체를 지탱한 자세라 기대 오는 무게가 없어 무겁진 않았으나 영락없이 그에게 갇힌 모양새였다.

말없이 올려다보는 시선만 보내자 의중을 가늠하듯 기다란 눈매가 가늘게 좁혀 들었다.

“문서윤.”

제 망설임은 언제나 우연재에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까이 다가온 손이 뺨을 쥐더니 엄지가 입술을 향해 미끄러졌다.

“키스해도 돼?”

문득 언젠가가 떠올랐다.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

섹스 내내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그 뒤를 따라왔다.

“…….”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돌이켜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너는 왜 매번 그랬을까.

좋아하는 걸 몰랐다는, 애걸에 가까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게 과연 모를 수 있는 감정인가. 제게는 너무나도 명백해 도저히 모를 수가 없던 감정이었다. 좋아하게 된 순간도, 풋사랑이 아님을 인정하던 순간도, 사소한 일에 마음을 앓던 순간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무나도 명확하고 선명한 감정이었다.

문서윤은 말없이 우연재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슬쩍 찌푸려지는 눈썹에 초조함이 배어들었다. 초조한 우연재라니, 눈물을 흘리던 때처럼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입술이 절로 달싹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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