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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28)화 (128/139)

128화

“유리 깨진 거 치우려고 한 거잖아. 근데 그걸 왜 밟아? 제정신이야?”

그제야 안도감이 몰려왔다. 통증 따위에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초 단위로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서는 것과 달리 온몸의 감각은 무뎌지기만 했다. 그가 선 곳이 현실임을 증명하는 건 살갗을 파고드는 통증이 아닌, 익숙한 체온이 팔을 붙드는 감각이었다.

“움직이면…… 하, 아니. 움직이면 안 되나? 일단, 발부터 떼야…….”

뺨이 창백하게 질린 문서윤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놓았다. 몸이 옆으로 돌아가더니 다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현실과는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에 우연재는 또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발바닥에 달라붙은 유리 조각이 바닥에 얌전히 놓인 파편 위로 겹쳐지며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낸 것만 같았다.

머리는 제가 선 곳이 현실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증명이 필요했다. 현실 감각과 멀어지는 순간 통제를 빼앗긴 이성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물에 빠진 사람은 통제력을 잃는다. 그렇게 저를 구하러 온 이의 머리를 짓눌러 숨을 욕심내다가 마침내 함께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우연재는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순간, 현실과 꿈을 혼동한 본능이 문서윤에게 해를 끼칠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순간이 현실임을 증명받아야 했다.

“가지 마.”

걷는 기척이 느껴졌는지, 아니면 붙잡는 목소리 때문인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문서윤이 눈을 크게 떴다.

“미친 새끼야! 너 돌았어?”

어울리지도 않는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발에 찔린 유리 조각이 서서히 둔해진 감각을 꿰뚫기 시작했으나 우연재는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또다시 저를 붙드는 손길에 만족했을 뿐이다.

“너 진짜 미쳤…….”

“내가 잘못했어.”

우연재는 최대한 비참하게 들리도록 속삭였다.

“내가 다 잘못했어, 서윤아.”

문서윤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가지 마.”

“아니, 하……. 안 간다니까?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왜 자꾸 움직여?”

네가 도망갈까 봐, 라고 하면 더 질리겠지. 우연재는 입을 다물었다. 바닥을 향해 힐긋 시선을 떨어트린 문서윤이 아찔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저를 붙들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잠깐 놔.”

“…….”

“어디 안 간다니까.”

놓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안 놓으면 싫어하겠지. 핏줄이 불거진 손이 마침내 제게 붙잡힌 존재를 놓았다. 동시에 폭우 속에 갇힌 지렁이처럼 온 숨구멍이 틀어막혔다. 우연재는 고요하게 호흡을 멈춘 채 눈동자만 움직여 문서윤을 좇았다.

차라리 발이 다쳐 다행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 들면 문서윤에게 도망칠 틈이 생길 테다. 뚝 떨어진 체력에 성하지 않은 발로 단번에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연재는 맨피부를 파고드는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문서윤만 주시했다. 몇 걸음 멀어지지 않은 문서윤이 의자를 빼 다가왔다. 적당한 위치에 의자를 내려 둔 그가 앉으라는 듯 까딱 고갯짓했다.

“앉아. 계속 밟고 서 있을 거야?”

우연재는 고분고분하게 의자에 앉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문서윤이 저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불안함이었지만, 앉는 편이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당연하게도 제가 정신을 놓았을 때 문서윤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 진짜 이게 무슨……. 병원 가야 할 것 같은데.”

문서윤은 무릎을 꿇어 우연재의 발부터 살폈다. 깨진 유리 위를 걸은 데다 멀거니 서 있어 유리 조각이 박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나마 육안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나 시뻘겋게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조각이 틀어박히는 게 더 큰 문제니, 병원에 가서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너 진짜 제정신이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문서윤은 인상을 구기며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머리를 식힐 겸 세수를 하고 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스쳤다. 황급히 욕실을 나왔을 때는 산산조각 난 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페 아르바이트 덕분에 익숙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 청소 도구부터 가지러 가려는데 돌연 우연재가 조각들을 밟으며 걸어왔다. 그게 고작 몇 분 전 일이었다.

“병원부터 가.”

지나치게 놀란 탓일까, 그사이에 몇 분이 아닌 몇 시간의 간극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 진짜 애도 아니고…….”

절로 우연재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문서윤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어질러진 바닥을 힐긋 살폈다. 깨진 유리 조각은 물론 잔뜩 쏟아진 물, 거기에 더해 이리저리 뒤섞이는 피 때문에 바닥이 온통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업고 내려가서 차에 태울까, 아니면 구급차를 부를까 고민하고 있는데 우연재가 팔을 뻗더니 손을 붙잡았다.

“병원 가면. 봐줄 거야?”

“뭐?”

“봐줄 거냐고.”

따라가서 함께 봐 줄 거냐는 의미인지, 잘못을 봐줄 거냐는 의미인지 그 뜻이 모호했다.

“내가 잘못했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체온에 문서윤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더럽다고 한 것도, 네 감정 착각이라고 한 것도, 멋대로 묻으라고 한 것도 전부 잘못했어.”

우연재는 조심스레 문서윤의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만하자고 잘라 낸 것치고는 문서윤은 그대로였다. 제가 문서윤이었다면, 그리고 관계를 끊어 내기로 결정했다면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무시했을 것이다. 애초에 피아노 하나 때문에 집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로서는 다행이었다. 문서윤이 물러서. 그리고 천성이 착해 빠져서.

아직 여지가 남아 있음을 눈치챈 순간,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우연재는 제게 기회가 있음을 교활하게 알아차렸다.

해결하기 위해 지난 몇 주를 골몰했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상황 모면하려고 좋아한다고 한 건?”

우연재는 늘 문서윤에게 무섭게 집중한 상태였다. 망설임의 기색이 묻어 나오는 질문을 놓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상황 모면하려고 한 말 아니야. 좋아한다는 거 진심이었어.”

그는 여태 제 감정을 소유욕이라 치부해 왔다. 갖고 싶은 게 문서윤뿐인 건 그 외의 것들은 이미 가져서라고 여겼다. 소꿉친구를 향한 오롯한 집착은 그래서라고, 소유욕 외에는 제 감정을 정의 내릴 만한 단어가 없다고 착각했다.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성적으로 의식한 적이 없으니 그 소유욕을 좋아하는 감정에 가깝다고 의심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곤 하는 사랑이란 감정은 대개 아름답고, 온화했다. 문서윤이 피아노를 치며 제게 보여 준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연재는 늘 문서윤을 통해서만 배워 왔다. 그래서 도저히 그 순간을 제가 지닌 욕구와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랐던 것이다. 제가 느끼는 소유욕도 좋아하는 감정의 갈래가 될 수 있음을.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가 문서윤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소유욕 따위가 아니었다. 이 감정이 단순한 소유욕이었다면 문서윤이 도망치려 했을 때 짜증이 났을지언정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한다는 게 뭔지 잘 몰라서 내 마음도 몰랐어.”

“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옅게 내뱉어진 한숨에 우연재는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실었다. 자연스레 문서윤의 팔이 딸려 왔다. 그는 그 틈을 타 매끄럽게 손을 움직여 손바닥으로 하얀 손등을 덮었다.

“착각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봐줘.”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하얀 손에 뺨을 묻자 붙잡힌 손이 움찔 떨렸다.

여기서 놓친다면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꿈에서 본 일을 기어코 현실에서 실현시키거나, 아니면 문서윤을 보호하기 위해 완전히 멀어지든가. 둘 다 마음에 차는 결론이 아니니 애걸해서라도 붙잡아야 했다.

“내가…… 멀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우연재는 가까스로 힘이 들어가려는 손을 억제했다.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은 척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차분하게 내려다보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근데 너랑 연애하는 상상은 해 본 적 없어. 바란 적도 없고.”

왜. 우연재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숨을 골랐다.

“차라리 친구 관계 유지하는 게 나으니까. 좋아하는 감정은 언젠가 퇴색돼도 친구 관계는 멀어졌다가도 가까워질 수 있잖아.”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멍청하게 굴 때의 얘기지,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문서윤을 향한 마음이 퇴색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꺼먼 무채색은 바래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나는 그런 관계가 나은 것 같아.”

“그럼, 이대로 멀어지자고?”

“…….”

“그래서 네 옆에 다른 새끼가 서는 꼴까지 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향한 증오심이 들끓었다. 호흡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새끼 동물처럼 우연재는 숨을 헐떡였다. 절로 뺨이 찌푸려지며 턱에 힘이 실렸다.

“나 사고 치는 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그런 게 아니라…….”

“문서윤.”

설마. 순간적으로 뇌리를 직격한 가정에 손끝으로 힘이 실렸다.

“그새 싫어졌어?”

“뭐?”

“나 불쌍해서 아직도 좋아한다고 말해 줬어?”

우연재는 눈을 깜박였다.

“그럼 앞으로도 불쌍하게 생각해서 좋아해 줘. 지금처럼 동정해.”

체온이 느껴지는 손에 더욱 깊숙이 뺨을 파묻자 문서윤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우연재, 너…….”

저를 부르는 소리에 우연재는 또다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울어?”

그는 자신이 운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문서윤 외에는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다. 유리 조각의 통증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식할 수 있는 건 문서윤이 전부였다.

그래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문서윤은 동요하고 있었다. 고작 제 눈물 하나에.

부러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네 앞에서만 운댔잖아.”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든 말든 우연재는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난 이제 친구 관계에서 만족 못 해.”

그는 맞닿은 손가락에 은밀하게 힘을 실어 넣었다. 완강한 태도에 당황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던 문서윤이 망설이는 기색 끝에 한숨처럼 속삭였다.

“너 좋아하는 거…… 나한테는 죄짓는 기분이야.”

우연재는 그런 제 소꿉친구를 집요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처음 느껴 보는 격양된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문서윤이 이대로 저를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지 연신 눈물이 뺨을 적셨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지 알아. 이번에 피아노 얘기만 하는 거 아니야. ……엄마 기일 날 꽃다발 가져다준 것도 고마워.”

문서윤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서 더 괴로워. 내가 ……아무 문제 없던 너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아서. 내 마음만 안 들켰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잖아, 우리.”

우연재는 오히려 지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서윤의 마음을 모르는 채로, 제 소유욕의 이름을 모르는 채로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면 언젠가는 억눌러 둔 욕구가 터졌을 것이다. 불시에 그리고 삽시간에.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너한테 죄짓는 기분이라서.”

“죄 좀 지으면 어때서.”

문서윤의 죄는 우연재에게 죄가 되지 못했다.

“그 죄책감으로 나 사랑해 줘.”

그는 문서윤이 제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기꺼웠다. 제게 품은 마음이 친구 이상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느낀 미칠 듯한 희열처럼, 문서윤의 죄책감 한 조각도 제 것이어야만 했다.

대놓고 사랑을 구걸하자 찡그려진 눈매에 눈물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안도했을 뿐이다.

“우연재 넌 진짜…… 개새끼야.”

“왜 울어?”

그는 문서윤의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나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발의 통증은 처음부터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 상관없었지만, 문서윤이 또다시 저 때문에 운다고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미워하지 말라더니 못 미워하게 하잖아, 네가.”

욱했는지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결국 미워하지 못하겠단 소리였다.

“응.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 줘.”

우연재는 문서윤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무러지듯 눈꼬리를 접었다. 처음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남자 좋아하는 거 정상 아니라며.”

“괜찮아.”

우연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말했다.

“난 정상이었던 적 없으니까.”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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