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들어오지 말라고?”
예상치도 못한 거절에 문서윤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설마 여기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한 층에 가구가 하나뿐인 오피스텔이라 다른 사람과 마주칠 일은 없어도 문 앞이 대화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얘기하고 싶은 마음 없나 보네.”
하긴, 무턱대고 찾아오긴 했다.
“어쨌든 고마워. 피아노는 어디 있는지 말해 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
그렇게 헤어져 놓고 또다시 만나러 온 저도 저였다.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우연재가 팔을 낚아챘다.
“알았어. 들어와.”
생각보다 거센 악력이 아파 내려다보자 꽉 붙든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우연재가 천천히 뒤를 돌아 안으로 사라졌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지. 문서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내며 우연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약 두 달간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현관은 너무나도 익숙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우연재가 보였다. 그답지 않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피아노, 어떻게 알았어?”
문서윤은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우연재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아노에 고유 번호 있으니까. 혹시나 나오면 이쪽에 연락 달라고 했지.”
저절로 손끝에 힘이 실렸다. 소매를 움켜쥐자 축축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눈물을 닦아 내느라 젖은 흔적이었다.
“아버지가 처분하실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몰랐는데.”
“몰랐다고?”
그럼 그런 짓은 왜 했는데. 의문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우연재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그냥.”
대답은 간결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미리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왜?”
도대체 왜. 우연재에게는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제가 뭐라고.
“왜?”
도리어 우연재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같은 물음을 던졌다. 왜 이유를 묻는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서윤아. 내가 너 챙기는 데 이유가 필요해?”
치지도 않는 피아노를 가져가 고이 보관하려면 당연히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가의 물건이라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아무리 외양이 아름답다 해도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자리를 차지하는 관상용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굳이 그걸 왜.
“그럼 네가 쓰던 걸 다른 새끼가 쓰게 둘까?”
우연재가 입술을 씰룩이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서인지 아니면 제 눈물이 멈춰서인지 그제야 날카로운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보다 인상이 배로 사나워진 건 물론이고 누가 봐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 게 티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네가 울고불고 찾게 만들까?”
피아노 때문에 여기까지 왔고, 오자마자 눈물을 터뜨렸으니 우연재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네가 교수님한테 처분하라고 했어도 내가 가져왔을 거야.”
뇌까리는 목소리가 혼잣말에 가까워질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래야 네가 나중에 후회할 일 없을 거 아냐.”
친구 사이에서는 과한 배려였다.
우연재가 원래 이런 성격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저에게만 해당하는 행동이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렇다 해도 딱히 이상하다고 의식한 적은 없었다. 처음 만난 여섯 살부터 그래 왔으니까.
문서윤에게 우연재의 챙김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당연하다고.’
관계에서 당연함이란 있을 수 없는데 왜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너무 익숙해서 그랬나.’
우연재와 멀어져 객관적인 거리에서 서로를 볼 수 있게 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우연재.”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 설마 진짜…….”
꾹 다물린 입술이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함부로 내뱉을 만한 물음은 아닌 것 같았다.
한참이나 새까만 시선을 마주 보고 있던 문서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피아노와 우연재에 대한 생각이 스타카토처럼 튀어 다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숨 쉴 틈이 필요했다.
“응, 진짜 뭐.”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이어지지 않자 인내심이 닳았는지 우연재가 소곤거리듯 말을 받았다.
“……아냐. 나 잠깐 세수 좀 하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우연재는 욕실 방향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고집스레 응시했다.
“…….”
새까맣게 죽은 시선이 마침내 제 손을 향해 떨어졌다. 덜덜 떨리고 있는 손끝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이렇다 할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던 순간이 떠올랐다. 수십 수백 번을 붙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감촉이 생생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꿈이 아닌, 진짜 문서윤이라는 의미였다.
“하…….”
우연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느지막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욕실로 쳐들어가 문서윤을 붙들 것만 같았다. 그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발끝을 잠식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신중하게 굴어야 하는 상황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레 행동하면 놀라 달아날 테다.
애 겁먹이면 안 되지. 냉장고 문을 연 우연재는 생수병을 꺼냈다. 또 울렸으니, 물부터 줘야 할 것 같았다. 천천히 물을 따르는데도 미미하게 떨리는 손이 영 성가셨다.
몸 상태가 바닥을 치는 이유야 뻔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지가 벌써 며칠째이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더불어 연이은 불면이 신경을 뾰족하게 곤두세웠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복싱장을 찾은 것도 며칠 전이 마지막이었다. 우연재는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내리 오피스텔에 처박혀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 무미건조한 눈길로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응시했다. 그 광경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나서야 문서윤이 저와 한 공간에 있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꿈이라면 이렇게 떨고 있지 않을 테다. 오랫동안 꽉 눌러 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지체 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우연재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 선 곳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끊임없이 되뇌어야만 했다.
그는 잘 알았다. 제가 없어도 문서윤은 평온하게 살아갈 것이다. 보호자 같은 보호자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성인이고, 든든한 외가가 있는 데다 성격 자체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편이니 못 사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었다. 그는 문서윤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였다. 궤도를 잃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시시때때로 상황을 통제하려 한 것도 문서윤을 놓치면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는 직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체를 갖추지 않은 욕심을 억누르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스스로를 통제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겁먹은 문서윤은 도망칠 테니까.
때때로 어린아이의 직감은 그 어떤 어른들보다 날카롭고는 했다.
그러니까 놓치면 안 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예쁘게 굴어야 했다.
컵을 쥔 채 발걸음을 내딛던 우연재는 비틀거리듯 멈춰 섰다.
“하, 씨발…….”
순식간에 인 현기증이 모든 감각을 앗아 가며 그 빈자리를 두통이 메웠다. 컵을 테이블 위로 내려 두려던 손은 잔뜩 흔들리는 시야에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물이 가득 든 컵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몸이 말을 듣지 않자 눈을 깜박이는 속도 역시 느려졌다. 덕분에 깜짝 놀라 달려온 문서윤의 표정이 생생하게 들여다보였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망설임 없이 방향을 바꿨다.
도망가네.
그 뒷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을 범람한 확신은 오직 하나였다.
제 이런 꼴이 질린 게 분명했다. 그래서 도망가는 거겠지.
잡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흐물거리는 와중에도 우연재는 이성적으로 굴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빌 생각이었다. 한 번만 봐 달라고. 너한테서 배운 줄 몰랐던 감정이라 이때까지 의식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좋아한다고.
문서윤은 마음이 무른 편이니, 피아노를 빌미잡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볼 것이다.
그는 무작정 움직였다.
“우연재. 너 미쳤어?”
물에 젖은 유리 조각이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도 개의치 않았다.
“어디 가?”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오히려 문서윤이 황급히 달려와 팔을 붙들었다.
“너 진짜 미쳤…….”
“어디 가냐고, 문서윤.”
팔을 꽉 붙드는 거센 악력에도 우연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했던 말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가긴 어딜 가?”
“나 질렸어?”
비에 잔뜩 젖어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우연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 몸을 붙든 기다란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명백하게 저를 쥐고 있었다. 다른 새끼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