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불면은 생소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시작됐더라. 우연재는 시간을 곱씹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영국에서부터였다. 처음엔 시차 적응이 문제겠거니 했으나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지칠 때까지 몸을 움직이거나 버틸 수 없는 피곤이 몰려올 때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물론 그때만 잠이 든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문서윤에 대한 소식이 닿아 올 때면 그럭저럭 질 좋은 숙면이 이어졌다. 잘 지내고 있다는 보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면이 나아진 건 2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개강 이후부터 다시 도지긴 했으나, 그래도 문서윤이 제 오피스텔에서 잘 때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건 다시금 불면이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우연재는 침대에 앉아 뚫어져라 창밖을 응시했다.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이었다. 여우비가 괜히 지나간 게 아닌지, 다시금 빗방울이 창문 위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침대의 본래 주인을 떠올렸다.
‘첫사랑 같은 거 좆도 아니라고 한 건 너야.’
담담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여태 귓가를 맴돌았다.
설마하니 그 타이밍에 제가 내뱉은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순간 우연재는 고요하게 숨을 멈췄다. 스스로가 호흡을 멈춘 걸 몰랐으니 고요하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을 테다.
그다음은 어땠더라.
나가 달라는 문서윤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애를 붙들고 내가 첫사랑이었냐고 묻고 싶었으나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바스러질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곧바로 뒤로 물러날 게 뻔했다. 제 손으로 깨트린 향수의 잔해가 맨살을 파고들어 상흔을 남길 터였다.
그렇게 우연재는 한참을 꽉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서윤을 보호한 공간은 오피스텔과 달리 손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계속해서 이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기숙사를 찾기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불면증은 익숙해 괴롭지 않았으나 머리를 쪼아 대는 두통은 신경에 거슬렸다. 두통 사이사이로 음습하고 거뭇거뭇한 생각들이 끼어들었다.
그럴 때면 우연재는 몸을 움직였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나 튀어 나가려는 충동은 억제할 수 있었다.
‘나랑 자고 싶어서 그래?’
물기가 가득한, 헛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또다시 스며들었다. 기억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
비이성적으로 굴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문서윤이 풍겨 대던 낯선 냄새의 출처를 확인한 순간, 이성이 순식간에 제어를 엇나갔다. 그나마 문서윤을 붙들고 매섭게 몰아붙이지 않은 게 최선이었다. 향수 주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기어코 사고를 쳤을 것이다.
“하.”
그런 관계가 아니라던 말이 떠올랐다. 곧바로 수긍한 말은 아니었다. 차게 가라앉은 머리가 이제 와 상황을 납득한 것에 가까웠다. 똑바로 마주 보는 시선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으니, 섹파가 아니란 말도 거짓말이 아닐 테다.
그렇다 해도 안심이 되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문서윤이 제게서 벗어나길 선언한 순간부터 우연재는 안심한 적이 없었다.
‘씹, 도대체 뭘 그만하자는 건데?’
결국 그는 내내 되새김질하던 의문을 내던졌다.
‘다.’
대답은 명료했다.
다. 전부 그만하자고.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헤집었다. 저는 새로운 관계를 정의 내리려 하는데 문서윤은 완전한 종말을 고했다.
하나뿐인 소꿉친구에게 연애를 제안한 건 그게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 좋아하겠다는 말도 오피스텔을 나간 행동도 결국은 제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우연재는 분명하게 알았다. 기대하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돌려받지 못할 기대라는 걸 알기에 도리어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연애를 시작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좋아하는 감정에는 연애라는 기대가 동반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다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데다 몸까지 섞었으니, 연애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런 관계가 문서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간섭할 권리도 생기고.’
우연재는 문서윤과 관련된 일이라면 거리낄 게 없었다. 한국은 보수적인 나라이니 미국에서 생활하면 될 일이었고, 문서윤이 제게 질려 도망가는 것만 아니라면 평생을 그런 관계로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중요한 건 문서윤과 저 사이에 놓인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연결점 그 자체였다.
‘너는……. 그게 쉬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결코 쉽게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연인은 친구보다 조금 더 내밀한 관계로 포장되고는 했다. 그 명사를 내세우면 문서윤을 조금 더 거리낄 것 없이 옭아맬 수 있단 장점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우연재에게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문서윤의 입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 빠르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관계에 붙은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친구는 한 명이 노력하면 지속될 수 있을지언정 연인은 그렇지 못했다.
연애는 오히려 문서윤이 제게 질려 헤어짐을 고할 수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저 혼자 위험 부담을 떠안은 게 무색하게도 문서윤은 오히려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첫사랑 같은 거 좆도 아니라고 한 건 너야.’
결국 그만둘 수 있다는 소리였다.
“씨발…….”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제 손으로 깨트린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은 것처럼 먹은 게 없는데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우연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이라도 먹어야 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문서윤에게 내준 공간을 나가려는데 빗방울이 번지기 시작한 창문이 눈에 띄었다. 고층 건물인 만큼 하늘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위치였다. 제법 거센 빗줄기가 창을 때리고 있었으나 조금 전 여우비가 내릴 때처럼 하늘은 새파랗기만 했다.
또다시 문서윤이 담담하게 고백을 늘어놓던 순간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날 이후로 끊임없이 달라붙는 기억이었으니까.
넌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창을 통해 들어차는 햇빛이 눈부셔 우연재는 눈을 찡그렸다. 그런데도 시선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건 문서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살에 만난 소꿉친구는 삶의 궤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유별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어른들처럼 제 눈치를 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연재는 괜찮은 친구처럼 굴기 위해 노력했다.
기준에 맞춰 사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문서윤을 따라 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태어나길 순한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문서윤은 천방지축인 남자애들에 비해 차분한 면이 있었다. 똑같이 굴기 위해 애쓰면 나름대로 본성이 중화돼 적절한 말과 행동을 선택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문서윤은 우연재의 궤도가 되었다. 여섯 살의 첫 만남 이후부터.
여우비든, 이슬비든, 안개비든 어떤 비가 내리든 항상 하늘에 떠 있는 햇빛 같은 존재였다. 완전히 탐내지 못한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가둬 두기에는 너무나도 찬란하고 예뻤다. 타고난 본성을 억눌러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우연재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햇빛의 잔재가 망막에 스며들었다.
그는 발아래에 깔린 그림자가 환희로 둔갑하는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건반에서 손을 떼어 낸 문서윤이 저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던 찰나였다.
어떻게 그런 얼굴로 웃을 수 있지?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들 그런 표정을 짓나?
문서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저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온몸을 감싸는 광적인 열락이었다. 찰나에 저를 관통한 감정은 문서윤이 보여 준 감정과는 명백히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난 그런 표정은 지을 수 없는데. 흉내라도 내야 하나. 이번에도 문서윤한테 배우면…….
우연재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문서윤을 좇느라, 그에게만 신경을 쏟아붓느라 제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가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으며 흘러나왔다.
우연재는 많은 것을 문서윤에게 배웠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규범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소꿉친구를 통해 배워 왔으니, 사실상 대부분을 그에게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감정적인 부분이라면 더더욱.
문서윤이 언제 웃는지, 어떤 식으로 웃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관찰하며 그렇게 웃는 걸 배웠다.
그러나 그를 통해 모든 걸 배운 건 아닐 테다. 문서윤이 제게 보여 주지 않았던 감정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 가령 짝사랑이라든가.
제게 들키지 않기 위해 꼭꼭 숨겨 둔 감정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해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했다.
우연재가 문서윤의 짝사랑을 마주한 건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피아노를 쳐 달라 조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우연재는 그 스스로에게 백지나 다름없던 감정을 단번에 눈치챘다. 저를 보며 웃는 문서윤의 얼굴이, 그 위에 스며든 애정이 그만큼 노골적인 덕분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짙게 깔린 미소는 지나치게 황홀했다. 제삼자의 눈에도 짝사랑이라는 마음이 훤히 보일 만큼.
그래서 제 감정도 몰랐다. 제게는 늘 문서윤이 기준이었으니까.
좋아한다는 감정은 그렇게 예쁘기만 하리라 여겼다.
햇빛 아래에서 피아노를 치던 문서윤처럼, 그리고 저를 보며 웃던, 좋아함이 듬뿍 묻어 나와 그 아래에 담긴 감정을 도저히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 없던 그 순간처럼.
그러나 우연재가 문서윤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아름다운 종류가 아니었다. 그는 문서윤이 저를 향해 내비치는 감정 그 어느 것에서도 제 것과 닮은 색채는 찾아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태 제 감정이 문서윤의 마음과 비슷한 결이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우연재는 망막에 스며드는 햇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체 없는 빛을 좇듯 눈을 떼어 내지 않았다.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는 재차 문서윤이 제게 보여 준 감정들을 더듬었다. 개중에서 배우지 못한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제가 여섯 살부터 문서윤에게 느끼곤 하던 감정들과 티끌만큼이라도 비슷한 게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스스로가 느끼던 소유욕과 충동을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문서윤이 보여 준 것처럼 찬란하기만 할 리는 없지 않나. 그렇게 예쁘고 완벽하기만 한 감정이었다면 이 세상에 헤어짐이라는 단어는 없을 테다.
찡그려진 눈매가 느릿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문서윤을 붙잡을 수 있는, 제 인생에 여태 없던 감정을 받아들인 것과 동시였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살할 수 있다는 수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해 보면 늘 아름다운 감정은 아닐 테다.
우연재는 그제야 사랑이라는 감정 이면에 존재하는 날것의 폭력성을 깨달았다.
“아…….”
바닥을 기는 컨디션으로 햇빛을 마주하자 현기증이 일었다. 어쩌면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처 자각하지 못한 거대한 무언가가 전신을 덮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재는 햇빛에 몰락당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침대에 주저앉았다. 몇 주간 날을 세우느라 긴장으로 팽팽하게 곤두선 몸이 불시에 몰아닥친 깨달음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졌다. 커다란 몸뚱어리가 스러지듯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하.”
멍청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제가 느끼던 감정이 문서윤이 담담히 꺼내 든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예쁜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오로지 하나였다.
“내가 같은 마음이면…….”
우리가 그만할 필요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