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15)화 (115/139)

115화

“이렇게 회피하면 안 되는 문젠데.”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연재와 이대로 멀어져야겠다 마음먹은 게 아닌 이상 일방적으로 내뱉은 말을 대화로 풀어 나가야 했다. 마음 접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동안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걔는 나 때문에 섹스까지 했는데.’

짝사랑이라는 감정을 죄로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강요하면 죄가 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그저 간질간질한 마음일 테다.

그러나 문서윤은 제 감정은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부풀리기 전에 들킨 건 다행이었지만, 조그마한 욕심이 소꿉친구의 입에서 섹스하자는 말을 이끌어 낸 것 같아 미안했다.

우연재가 섹스에 불편해하는 낌새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동성 친구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제가 엉키게 만든 관계이니 먼저 나서서 풀어야 하는데도 그가 선택한 건 결국 회피였다.

“회피가 아니라 도망이지…….”

문서윤은 자책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회피보다는 도망이라는 말이 더 맞았다.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애인이 생긴 우연재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군대로 도망친 것처럼 이번에도 도망을 택한 것이다.

도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이미 도망친 상황이라 그런지 우연재에게 선뜻 연락하기가 무서웠다. 차라리 답이 오면 메시지를 이어 나가다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을 눈치챘는지 우연재는 그럴 만한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하긴, 우연재도 어이없겠지.’

뜬금없는 고백과 함께 그만하겠다는 말만 내려 두고 기숙사로 사라졌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당시에는 이게 최선의 방향이라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최악의 방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저를 배려해 오전에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그가 챙기는 식사를 꾸역꾸역 입에 넣고 소화시킨 것도 그래서였다. 우연재가 제게 보이는 배려를 차마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입실 가능 날짜가 되자마자 기숙사로 짐을 옮겼다.

혹시 주말에 나랑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이성적인 생각이 든 건 기숙사에 들어오고 며칠이나 흐른 뒤였다. 아르바이트가 없는 데다 일방적인 종말을 고한 날로부터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우연재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난 그대로 도망쳤고.’

지나치게 감정에 매몰돼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들고나서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하…….”

문서윤은 얼굴을 감싼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곧 개강이었고, 우연재는 대부분의 시간을 경영대에서 보낼 테니 지금으로서는 우연히라도 마주치기를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괜찮지 않을까, 막연하게 그런 희망이 들었다.

* * *

“오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송주아가 반갑다는 기색을 뿜어내며 달려왔다.

“주아야.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계속 알바했으면 어제도 봤을 텐데.”

“카페 요즘도 바빠? 일은 어때?”

문서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개강 시즌이라 바쁘긴 한데 같이 일하는 애가 친한 친구라 편해서 괜찮아요. 원래 프차 카페 알바하던 애라 능숙하기도 하고요.”

“다행이다.”

“그래도 오빠만큼 저랑 손 잘 맞는 건 아니지만?”

송주아가 얄궂게 웃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뒀으니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전처럼 얼굴을 자주 보기는 어려울 듯했다.

문서윤은 개강에 맞춰 카페를 그만두었다. 진작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고 사장님께 미리 말씀드린 터라 인수인계 역시 깔끔했다. 마침 송주아의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어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오빠랑 일하는 것도 재밌었는데, 아쉬워요. 이제 스터디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으음, 그런 것도 있고…….”

문서윤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이번 학기에 또렷한 목표가 있어 그만둔 건 아니었다. 다만 이것저것 주변 환경을 바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어 내린 결정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고 해서 우연재를 향한 감정까지 정리되지는 않겠지만, 계속 일을 하다 보면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럼 신경 쓰일 테니까.’

차라리 직접 마주치면 또 모를까, 우연재가 없는 장소에서까지 그를 떠올리며 그 순간을 곱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든 우연재와 관련이 있다면 발걸음부터 끊는 게 마음을 끊어 내는 일에도 도움이 될 테다.

“하여튼, 진짜 부지런하다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린 송주아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친구 연락 와서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다음에 봐요!”

“응. 다음에 봐.”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문서윤은 기숙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개강하면 한 번쯤 마주치겠거니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신기할 정도로 우연재와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같은 건물에 있어도 전공이 겹치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지난 학기도 같은 시간표가 아니었다면 우연재와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문서윤은 머리를 털어 냈다. 우연재에 관한 생각은 의식적으로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간신히 떨어져 나갈 테다. 이렇게라도 떨쳐 낸 뒤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노력이 쓸모없음을 증명하듯 또다시 우연재가 떠올랐다.

‘애들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수업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것 같던데.’

알고 싶지 않아도 경영대에 있다 보면 종종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집행부 후배들은 제가 우연재와 친한 걸 알고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편이었다.

덕분에 문서윤은 우연재가 별일 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메시지에 답이 없는 건 의아했으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하…….”

두통이 몰려와 인상을 찌푸리는데 돌연 몸이 앞으로 밀리는가 싶더니 기다란 팔이 어깨에 턱 걸쳐졌다.

“왜 죽상이야?”

볼 것도 없이 남태은이었다.

“개강하니까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충 그럴싸한 답을 내놓았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건 아니고?”

그 힘에 이끌려 기숙사로 들어가자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서윤은 발걸음을 옮기며 힐금 남태은의 눈치를 살폈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뻔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생각해 봤자 네 속만 쓰리다, 문서윤아.”

“……알아요.”

“알면 그만 생각해.”

남태은에게는 우연재와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는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잘 생각했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을 뿐이다. 섹스했다는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어 군데군데 구멍이 난 이야기였으나, 제 감정 상태는 대강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렇죠.”

“내가 좋은 방법을 알지.”

“뭔데요?”

눈이 마주치자 시원한 입매가 씨익 호선을 그리듯 올라갔다.

“죽도록 움직이기.”

“형, 진짜…… 미친 사람 아니에요?”

문서윤은 간신히 말을 바꿨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짧게나마 호흡을 들이마시는 상황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 비속어가 튀어 나갔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태은이 낄낄거렸다.

“잡생각 안 하려면 몸 힘든 게 최고야.”

남태은이 말하는 죽도록 움직이기가 운동이라는 건 예상했으나 이렇게까지 뛸 줄은 몰랐다. 문서윤은 그가 건넨 물을 마시며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아니, 하, 누가 보면 체대생인 줄 알겠네.”

남태은이 또다시 낄낄거렸다. 군대에 있을 때도 툭하면 축구를 하던 사람이라 몸 쓰는 걸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을에 접어드는 시기였으나 바람은 아직도 더웠다. 문서윤은 땀방울을 대충 닦아 내며 반쯤 마시다 남긴 생수를 다시 남태은에게 건넸다.

“문서윤 체력 완전 쓰레기 다 됐네. 군대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태은이 남은 생수를 한 번에 비우고는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문서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아닌데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형은 맨날 운동만 해요?”

“죽지 않으려면 해야 돼.”

돌연 진지한 표정이 된 남태은이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