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햇빛 샤워
어떻게 오피스텔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하…….”
의자에 걸터앉은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순식간에 피곤함이 몰아닥쳤다.
우연재에게 끝내자는 말을 내려놓은 순간 때마침 비가 그쳤다. 어쩌면 그 전에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내리는 줄도 모르게 내리기 시작해서 지나간 줄도 모르게 지나가는 게 여우비였다.
우연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비가 그쳤다는 걸 눈치챘는지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우산을 접었을 뿐이다.
문서윤은 충동적으로 내뱉은 고백을 후회하지 않았다. 우연재가 제 마음을 몰랐으면 또 모를까, 그는 제 짝사랑이 누구를 향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혹시나, 싶었던 의심은 드물게도 낭패감이 깃든 얼굴을 본 순간 확신으로 돌아섰다.
그때쯤에는 우연재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연재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산책로를 걸은 뒤 함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처음 걷는 길이 아닌 만큼 비가 내린 땅을 밟는 발걸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고요하게 내리깔린 침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어색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 침묵으로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물방울처럼 톡 튀어나온 고백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깨끗하기만 했다. 그저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걸었던 것 같다. 그동안 괴로워한 게 꿈인 것처럼, 깔끔하게 털어 낸 기분을 느끼며.
문득 우연재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목소리…… 듣긴 들었구나.’
막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의식한 티가 날 것 같아 문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방에 들어가서 좀 잘게. 어제 운전 오래 해서 그런가, 피곤하네.’
내 방. 우연재의 공간과 제 공간을 명백하게 분리하는 말이 의식할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문서윤은 가까스로 지난밤의 섹스를 운전이라는 핑계로 덮어씌웠다.
‘알았어. 쉬어.’
우연재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짧은 대답이 전부였다. 너무나도 짧고 간결해 그 안에 담긴 감정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고백과 함께 마음을 접겠다는 말을 담담히 내놓긴 했어도 한 번 시선이 비껴간 이후로는 다시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산책로를 걸을 때도,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에도, 그리고 같은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문서윤은 이번에도 우연재와 눈을 맞추는 대신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
차분한 고백 이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으니,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 표정에 드러난 감정과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떡하지.”
아무래도 비 내리는 날 특유의 청명한 공기가 잠깐 잡념을 앗아 갔던 모양이다.
폐쇄된 공간 안으로 들어와서인지 아니면 7년간 간직한 마음을 토해 내서인지 곱씹음이 지나가고 나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문서윤이 고한 건 관계의 종말이었다. 감정의 종말은 아니었다.
짝사랑이라는 일방적인 관계에 대한 끝일 뿐이었다.
고작 선언 하나에 무 자르듯 툭 잘릴 마음이었다면 7년이라는 시간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마음을 접기 위한 노력을 해 볼 생각이었다.
우연재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문서윤은 아직도 그가 제 마음을 알면서도 침묵을 택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짐작 가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다.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는 덕분인지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울어 댔으니 눈물샘이 말랐을지도 모르겠다. 문서윤은 한숨을 삼키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나를 좋아해.’
바람대로 돼서 좋다고 생각했을까.
우연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무엇 하나 보증되지 않은 남자보다는 안전한 저를 좋아하는 게 나을 테니까. 굳이 알은체하지 않은 것 역시 이런 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음을 접길 바라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친구 관계는 유지할 생각이었나 보네. ……다행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안심하게 됐다. 우연재가 친구 관계까지 끊을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아서.
마음을 모르는 척한 것도 그래서일 테다. 우연재는 관계의 맺고 끊음이 명확했다. 한 번 맞지 않는다 생각한 이가 생기면 그대로 가차 없이 끊어 내는 편이었다. 그러니 침묵을 택했다는 건 이대로 넘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제 마음을 알고 있다는 티를 냈다면 언젠가 저와 우연재 사이에서는 관계가 재정립되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을 것이다. 우연재에게 같은 마음을 달라고 애원할 생각은 없지만, 문서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무럭무럭 자라난 욕심이 염치를 집어삼키고 종내에는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게 만들지도 몰랐다.
‘섹스한 것도 그렇고.’
그때처럼 적선 같은 유혹이 닥치면 다른 선택을 하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
문서윤은 눈두덩이를 짓누르던 손을 내려 허벅지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머리를 지탱할 힘이 없어 가만히 고개를 내리자 아무렇게나 놓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짝사랑은 피아노나 마찬가지라고. 오랫동안 마주하지 않아도 한 번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면 저절로 손이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단단하게 굳어도 상대를 마주한 순간 손쉽게 흐무러지는 게 마음이었다.
‘앞으로 피아노 치는 일 없을 테니까…….’
건반을 누르지만 않으면 피아노를 칠 일도 없다.
마음도 똑같았다.
지금부터 접기 위해 노력하면 어떻게든 단단하게 굳힐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의 내리침에 산산조각 나 마침내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 잔해처럼 남아 있는 건 다시금 부드럽게 변해 말랑거리는 마음이 아닌, 다시는 본래의 형태를 되찾을 수 없는 파편들일 것이다.
아무리 몸에 배어 본능적으로 이어 갈 수밖에 없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리고 제 의지로 다시 시작하지만 않는다면 점차 잊힐 테다.
가능할까.
가능하겠지.
문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기숙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넓은 방이 시야를 침범했다.
익숙한 풍경을 멀거니 들여다보던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염치없이 계속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 * *
우연재는 느지막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난 며칠간 그는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한 공간에 있으면 문서윤이 불편하게 여길 게 불 보듯 훤했다.
‘마주치면 내 쪽에서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고.’
엄밀히 따지자면 문서윤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순전한 이기심이었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문서윤이 겁을 먹으면 손해를 보는 건 이쪽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오피스텔을 아예 나간 건 아니었다. 새벽같이 복싱장에 나가 몸을 움직이다가 문서윤이 아르바이트를 갈 때가 돼서야 돌아오는 일과였을 뿐이다.
착하게도 문서윤은 챙겨 두고 가는 아침과 점심을 꼬박꼬박 먹는 듯했다. 식기세척기를 돌린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우연재는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몸을 움직이는 도중에도 머릿속을 꽉 채운 건 문서윤과 저 사이에 놓인 관계에 대한 명명이었다.
무엇을 그만하라는지 그 목적어는 여전히 불분명했으나, 어쨌거나 중요한 건 결과였다.
운동복을 세탁실에 던져둔 그는 문서윤의 방문 앞에 섰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
길게 그인 눈매에 자리한 새까만 동공이 방 안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하.”
이내 끄트머리가 올라간 입술이 비죽이 찢어지듯 비틀렸다. 그간 몸을 혹사하듯이 움직이며 억눌러 둔 열기가 다시금 자글자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팽팽 도는 느낌에 우연재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방 안 어디에도 문서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 *
쓰러지듯 침대에 눕자 익숙한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천장이었으나 문서윤은 무늬를 셈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개강 날짜보다 며칠 일찍 입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짐을 기숙사로 옮긴 상태였다. 본가에서 차를 가지고 온 덕분에 짐을 옮기는 일도 나름대로 수월했다.
멀거니 천장만 올려다보던 그는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냈다. 화면을 켜는 손길에서 망설임이 묻어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서윤은 잠깐의 고민 끝에 망설임을 핸드폰 화면과 함께 밀어냈다. 메시지 몇 개가 쌓여 있었으나, 우연재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서윤은 한참을 망설이다 메시지창으로 들어갔다.
[나 기숙사 들어왔어.]
우연재에게 보낸 메시지가 화면을 수놓았다. 며칠 전에 보냈는데도 아직까지 답장을 받지 못한 메시지였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런 답도 오지 않길 바라는 건지 마음이 퍽 혼란스러웠다.
재차 한숨을 내쉰 문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내려 둔 손이 마침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질였으나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