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알았어.”
“간다.”
이제 정말 나가려는데 우연재가 슬쩍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러곤 돌연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맨살에 코를 묻었다. 조금 전의 스킨십 때문에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었으나 손가락이 움찔 곱아들었다.
“향수 뿌렸네?”
우연재가 코를 댄 채 그대로 눈동자만 끌어 올려 물었다. 그가 내뱉는 호흡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려 가슴을 간지럽혔다. 문서윤은 슬며시 팔을 빼내며 말끝을 흐렸다.
“평소에는 뿌릴 일 없으니까……. 엄마한테 네가 사 줬다고 자랑할게.”
“나 험담한다며.”
단정하게 뻗은 눈썹꼬리가 슬며시 처지더니 우연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무룩해진 눈가와 끄트머리가 내려간 입술이 퍽 속상해 보였다.
“진짜 험담해 줘?”
장난을 치는 걸 빤히 알고 있던 터라 문서윤은 장난스레 대꾸했다.
“아니.”
현관을 막아서고 있던 우연재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예쁘게 봐 달라고 해.”
살살거리는 말투였다.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예뻐하실걸.”
진심을 담아 말하자 우연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목만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가면 언제 오게.”
“거리 조금 있으니까……. 한두 시간 정도 있다 오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고.”
“김현승이 자꾸 만나자고 보채던데.”
그러고 보니 종강하고 통 얼굴을 못 보기는 했다.
“오늘 볼까?”
“오늘?”
우연재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엄마 기일이라고 하루 종일 슬퍼할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셋이 같이 술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
술을 마시면 마음이 연약해질 테니, 피아노에 대한 문제를 손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맨정신에 말을 꺼내기는 멋쩍으니 술의 힘을 빌려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우연재와 둘만 있다면 영영 못 하겠지만, 셋이 이야기하면 대화가 그리 심각해지지는 않을 테다. 김현승이 있으니까.
적당히 가벼운 분위기가 흐르면 마찬가지로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 역시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가볍게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낙관이 들었다.
‘외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불같이 화를 내시며 피아노를 가져오려 하실 테다.
다만 뒷일이 걱정이었다.
아버지를 여기까지 이끈 건 그의 성실함과 노력, 재능도 한몫했지만, 그의 장인이자 어머니의 친부인 외할아버지의 재력 역시 한몫했다. 아버지의 재혼 소식도 은근히 불쾌해하는 기색이셨는데, 피아노 이야기까지 알게 되면 노발대발하실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아주머니 말씀 들어 보니까 당장 치울 생각은 아니신 것 같았지. 그 전에 애들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뭐든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알았어. 일단 물어볼게.”
우연재가 진심을 가늠하는 듯 가느다랗게 눈을 접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면서 다시 전화할게. 간다.”
문서윤은 그런 친구를 지나쳐 신발을 신었다. 검은색 운동화 옆으로 우연재가 신고 온 구두가 눈에 띄었다. 잘 몰랐는데, 키만큼이나 발 사이즈 역시 제법 차이가 났다.
“서윤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우연재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조심해서 갔다 와.”
차를 세운 문서윤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백합이 한 아름 담겨 있는 꽃다발이었다.
“여기도 오랜만에 오네.”
비라도 오려는지 공기가 선선했다.
그러나 아무리 공기가 깨끗하다 해도 한여름은 한여름이었다. 재킷까지 입었다가는 땀이 뻘뻘 흐를 게 뻔해 문서윤은 꽃다발만 챙겨 든 채 수목장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주 오는 장소는 아니어도 어머니가 계신 곳만큼은 단번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어?”
나무 아래에는 이미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피자 하얀색과 옅은 분홍색이 섞인 리시안셔스였다. 꽃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나풀거리는 생김새가 인상 깊어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꽃이었다.
무릎을 굽혀 앉은 문서윤은 그 옆에 제가 사 온 백합을 내려 두었다. 서로 다른 꽃 무리가 나름 잘 어울렸다. 무심코 손을 뻗어 분홍색 꽃잎을 건드리자 보들보들한 감각이 손끝을 간질였다.
한참을 그 꽃을 내려다보던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늘 제자리에 있는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네, 엄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혼잣말을 내뱉으려니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것처럼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이라 그런 것 같았다. 아버지나 피아노, 그리고 우연재에 대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나마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우연재였다.
“연재가 예쁘게 봐 달라더라.”
여름치고는 공기가 선선하고 맑았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어서인지 아니면 비가 내릴 것만 같은 미묘한 공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서늘한 기운 덕에 기분 역시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엄마 만약 살아 있었으면 예뻐했을 텐데.”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우연재를 제 형제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둘 다 남자아이인 데다, 외동이고, 친한 지인의 아들이라 어린 나이부터 봐 왔으니 그렇게 여기시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우연재의 부모님 역시 저를 허물없이 대하시는 편이니, 비슷하게 느끼고 계신지도 몰랐다.
“내가 걔 좋아한다고 엄마한테 고백했으면 싫어했으려나.”
남태은에게 털어놓은 게 효과가 있는지 우연재에 대한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어머니라면 제 고백에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시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도 한몫했다.
항상 피아노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던 분이셨으니,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리셨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우연재 예뻐했을 것 같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쏟아 내지 않기 위해서는 우연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애가 하는 짓은 예쁘니까…….”
가슴을 찔러 댄 발언들까지 전부 예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나게 행동하는 편은 아니니 어머니는 분명 계속해서 우연재를 예뻐하셨을 것이다.
바람이 살랑거리자 꽃다발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시선이 절로 나무 아래에 놓인 꽃 무더기로 향했다.
“…….”
순간 묘한 직감이 들었다. 꽃다발을 가져다 둔 사람이 우연재일 것 같다는, 정말이지 뜬금없는 직감이었다.
문서윤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꽃다발을 품에 가져왔다. 보드라운 꽃잎에 얼굴을 파묻자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역시나, 향수 냄새가 여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우연재가 왔다 갔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숙이자 부드러운 꽃잎이 이마에 닿으며 전신을 간질였다.
“우연재, 진짜…….”
제가 군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꽃다발을 놓고 갔을까.
문서윤은 검은색 슈트를 입은 오래된 소꿉친구를 떠올렸다. 동시에 얇은 꽃잎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제 감정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흘러나오는 안도의 눈물인지, 아니면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내내 꾹꾹 눌러 둔 서러움의 눈물인지 그 원인이 모호했다.
확실한 건 부드러운 꽃잎 위로 눈물이 쌓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이 나약해지자 날카로운 물음이 그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단 하나뿐인 소꿉친구였다. 제 일생을 공유한, 그래서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소꿉친구.
문서윤은 우연재가 제게 내준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불편한 자리를 구제해 주는 것도, 어머니의 기일을 챙기는 것도 순전한 호의였다.
‘……섹스한 것도.’
먼저 섹스를 제안한 사람은 우연재였지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문서윤이었다. 그리고 문서윤은 섹스를 택했다. 앞으로는 영영 힘들 테니, 조금이라도 우연재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그의 처음을 가져가고 싶다는 탐욕 때문이었다.
우연재가 내미는 호의에 익숙해져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은 명백하게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고작 짝사랑이라는 감정 하나에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우스웠다.
“하.”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자 그를 따라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서윤은 눈을 깜박였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서인지 그의 시야에 들어찬 풍경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따뜻한 색채의 포장지와 그 안에 담긴 찬란한 꽃 무리가 전부였다.
진창인 마음과 달리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제 짝사랑은 결국 죄악이자 기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