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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00)화 (100/139)

100화

이맘때 기운 없이 축 처지는 것치고는 문서윤은 나름대로 괜찮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우연재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마음을 들킨 게 아닐까 초조함을 느낀 게 민망할 정도로 우연재는 평소 그대로였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가끔은 그가 제 보모 역할까지 하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탁에 끌고 가 앉히고, 주말에는 햇빛을 쬐게 하고는 했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실상 정신없이 휩쓸리는 것에 가까웠으나 우연재가 아니었다면 아르바이트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고마운 한편으로는 그에게 너무 기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우연재가 옆에 없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하는 언젠가 당도할 미래에 관한 걱정이었다.

‘이 정도면 계절성 우울증이 맞나.’

여름철 우울증은 무기력보다는 초조함을 동반한다던 말이 때때로 머릿속을 엄습했다. 자해나 자살 시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여태 그런 기분은 든 적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긴. 그럴 새가 없었지.”

문서윤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여섯을 기점으로 나타난 가벼운 우울증에도 지나치게 저 자신을 갉아먹는 욕구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학생이다 보니 방학 때도 학교를 나갔고, 곁에는 우연재를 비롯한 친구들이 붙어 있었으며, 입시생 특성상 거의 모든 시간을 그들과 부대껴 보냈으니 허튼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스무 살의 여름 역시 우연재가 있었다. 그 후 2년은 공백이었지만 스물한 살에는 군대에서 굴렀고, 스물두 살에는 막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적응하던 시기라 우울에 깊게 침잠될 여유가 존재치 않았다.

‘곧 기일이니까 이 시기 지나고 나면 천천히 괜찮아지겠지.’

그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도 가실 테다.

문서윤은 괜히 울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우연재가 보였다. 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삐딱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 채였다.

“내 차 타고 가라니까.”

“본가 들른 김에 챙길 것도 있고 겸사겸사 들러서 차 가져오게.”

어머니가 계신 수목장림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택시보다는 직접 운전하는 게 편하니 본가에 들러 차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아. 오피스텔에 주차할 자리 없나?”

“그건 문제없고.”

“다행이다. 그럼 그냥 내 차 가져올래.”

“지금 가?”

“응.”

“데려다줄게.”

“택시 타고 가면 돼. 번거롭잖아.”

우연재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곧게 뻗은 눈썹이 설핏 일그러졌다.

“아, 문서윤은 내가 이럴 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번거롭다고 생각할 건가 봐. 인정머리 없네?”

“뭔 소리야. 그런 생각 안 해.”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본가에 데려다주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 스스로가 그렇다 해서 데려다주겠다는 우연재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몰래 숨긴 마음 때문일 테다.

“나도 그런 생각 안 해.”

우연재가 현관을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그러니까 같이 내려가.”

문서윤은 입술을 지르물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올 거야?”

차가 멈춰 섬과 동시에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집을 멀거니 바라보던 문서윤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낯선 장소도 아니고 본가에 왔으니 편안함을 느껴야 정상이건만 역시나 속이 울렁거렸다.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집에 누구 계신지 모르겠네.”

미리 말씀드렸다가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릴까 봐 언질도 없이 온 참이었다. 이렇게 불쑥 와도 되나 싶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집에 가겠다고 허락을 받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알았어.”

“왜?”

“미리 확인하면 시간 맞추기 편하잖아.”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은 저녁을 같이 먹으니 확실히 시간을 맞춰야 편하긴 했다. 문서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오피스텔에 있을 거지?”

“아마.”

“아마는 또 뭐야. 아무튼 간다. 이따 봐.”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걸 보니 수목장림에 가면 제법 더울 듯했다.

문서윤은 제 차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집으로 들어섰다. 잔디에 반사된 햇빛이 따갑게 피부를 찔러 댔다. 새삼스레 차 안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서윤 학생.”

안으로 들어서자 인자한 인상의 여자가 그를 반겼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집에서 일을 봐 주시는 아주머니였다. 문서윤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자주 좀 오지 그랬어. 방학 때도 나가 살고. 섭섭해.”

아주머니가 넉살 좋게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교수님 뵈러 온 거야? 자리 비우셨는데. 학회 때문에 주말에도 바쁘신 것 같더라고.”

“아…….”

바쁘시구나. 문득 어머니의 기일은 언제 챙기려고 하시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문서윤은 머리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오려는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며 여자의 말에 대답했다.

“괜찮아요. 잠깐 뭐 가지러 들른 거라. 아, 그리고 저 갈 때 차 가지고 갈게요. 혹시 아버지가 물어보시면 말씀해 주세요.”

“알았어. 올라갈 거야? 주스 한 잔 갖다줄게.”

오랜만에 뵙는데 거절하기도 민망해 문서윤은 감사하다는 말만 건넸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서재였다. 문을 열자 기억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문서윤은 차근차근 서재를 둘러보는 대신 곧장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차를 가지러 온 김에 앨범에서 사진 몇 장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우연재의 본가에서 어머니 사진을 본 이후로 사진 한 장 갖고 있지 않은 게 쭉 마음에 걸렸다.

“왜 없지?”

늘 있던 곳에 앨범이 없었다. 문서윤은 손으로 책등을 훑어 내리며 조심스레 책꽂이를 살폈다. 책과는 재질이 다르니 쉽게 눈에 띌 텐데도 이상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아주머니께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서재 밖으로 나가는데 마침 음료를 들고 오던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볼일 있다는 게 서재였어?”

“네. 혹시 앨범 못 보셨어요?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만든 앨범이요.”

“아…….”

아주머니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애매하게 웃었다.

“피아노 방으로 옮겨 뒀어. 저번에 서재 청소하는데 교수님이 부탁하시더라고.”

문서윤은 그녀가 내민 음료를 받아 들며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으니 아버지의 결정이 의아하지만은 않았다. 속이 쓰린 것과는 별개로.

“주스 감사해요. 이따 컵 가져다 드릴게요. 잘 먹겠습니다.”

“으응.”

피아노 방으로 향하려는데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팔을 건드렸다.

“저, 서윤 학생.”

“네?”

“교수님이 피아노 치울까 하신다던데, 들었어?”

“……네?”

처음 듣는 소리에 문서윤은 눈만 끔벅였다. 그 표정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찾았는지 여자는 쩔쩔매는 기색을 보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내 입이 방정이네. 아직 말씀 못 들었나 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어봤어. 사모님이랑 서윤 학생이 치던 거잖아.”

“처음 들어요. 언제 얘기하셨어요?”

“한 달 전쯤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당장 어제 그제도 아닌, 한 달 전이라면 제게 말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시간이 있었다. 이러려고 속이 울렁거렸나. 또다시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뺨 안쪽을 깨물었다.

“……어머니 기일 지나고 얘기하려고 하셨나 봐요.”

말을 내뱉는데도 목소리가 턱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서윤 학생도 거의 안 치고, 또 졸업하고 미국 간다며? 그래서 치우는 게 낫지 않나 하시더라고.”

“미국이요?”

“유학 가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지난번 우연재가 툭 내뱉은 말을 멋대로 결정지으신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눌렀다. 괜히 아주머니 앞에서 감정적 동요를 내비쳐 애꿎은 분을 당황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근래에 잘 안 치기는 했죠.”

“안색이 안 좋은데. 물 가져다줄까? 어휴, 내가 괜히 말했나 보네.”

문서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처음 듣는 얘기라 잠깐 놀란 거지 이제 괜찮아요. 저 그럼 피아노 방 들어가서 앨범 찾아볼게요.”

“그래,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알았지?”

“네.”

유리잔을 쥔 손을 떨지 않기 위해서는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피아노가 덩그러니 남겨진 방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닫자마자 주르르 미끄러졌다.

문서윤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잔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까딱하면 깨질 것 같아 무서웠다.

“……하.”

그제야 긴 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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