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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3)화 (93/139)

93화

예상 밖의 반응에 문서윤은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저의 통화 상대를 끌어낼 줄은 몰랐다. 하필 상대가 남태은이라 당황스러움이 더욱이 짙어졌다.

“사람한테 새끼가 뭐야.”

그는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말 돌리네…….”

우연재는 뺨을 씰룩이듯 눈가를 찡그렸다. 문서윤이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스민 의심은 그가 말을 돌리려 한다는 걸 눈치챈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잖아도 신경을 자극하던 불쾌감이 쩌억 입을 벌리며 인내심을 집어삼켰다.

“무슨 말을 돌려. 네가 애야? 자꾸 새끼 어쩌고 하니까 그렇지. 말 좀 예쁘게 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헛웃음이 샜다.

“또 다른 소리 하네.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봐.”

정곡이 찔렸는지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당황함에 젖어 파들거렸다.

“왜 숨기려고 하지? 나한테 말 못 할 상대야?”

“그게 아니라…….”

흐려지는 목소리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으니 떠올랐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몰랐다. 문서윤과 담배를 피우던,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남자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도대체 왜 자꾸 만나지.

남태은의 평판이 어떤지는 알 바 아니었다. 우연재는 남이 내뱉는 말이 아닌 제 눈으로 확인한 바만 믿는 인간이었다. 저보다 어린 애에게 담배를 가르치고, 같은 남자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주물럭거리는 새끼였다. 그런 질 나쁜 놈을, 그것도 제 눈을 피하면서까지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머릿속을 지배한 단어는 오직 하나였다. 바람. 사귀는 사이에만 존재하는 단어는 아닐 테다. 그에게는 문서윤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타인을 만나려는 것 자체가 저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좋아하는데 다른 남자는 왜 만나지. 지금껏 만나 온 관성 때문에? 만족시켜 주지 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과 섹스한 적이 없어 비교 대상을 찾기란 불가능했으나 굳이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연재는 저와 문서윤의 속궁합이 끝내주게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테다. 쑤셔 줄 때마다 신음을 줄줄 흘리며 흐느낀 게 문서윤이었으니까.

좋아하는 상대가 몸까지 바치는데 왜 자꾸 다른 새끼를 만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응. 그게 아니라?”

우연재는 몇 초간을 얌전히 기다리고 나서야 되물었다.

근래의 그는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욕심껏 문서윤을 옭아매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문서윤의 감정을 눈치챈 순간 환희 같은 만족감이 전신을 지배한 것과는 별개로 한구석에는 성가심이란 감정이 자리했다. 문서윤이 제게 티끌만 한 감정 하나하나를 내줄수록 스스로를 제대로 통제해야 한다는 성가심이었다.

우연재는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았다. 범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억눌러야만 했다.

“내가 누구 만나는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뭐?”

차분하고 명료한 발음이었으나 순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해야만 했다. 우연재는 입매를 비틀었다. 나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문서윤에게서 들으리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냥 친구 만난다니까……. 말해도 네가 모르는 사람이라서 자세하게 얘기하기 좀 그래.”

“얘기 못 할 이유는 또 뭔데.”

“그냥……. 친구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 다 하는 건 좀 과하잖아.”

삽시간에 원인 모를 열이 솟구치며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우연재는 숨을 삼키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맹렬하게 차오르는 시커먼 무언가를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그는 잇새로 혀를 깨물며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얼마나 힘을 실었는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툭 불거졌다.

“하…… 씨발, 내가 너한테 그냥 친구야?”

마지막으로 끌어모은 인내심의 한계는 문서윤을 붙들지 않는 것에서 끝이 났다. 턱이 팽팽하게 당기며 얄팍하게 늘어지는 입꼬리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욕설이 새어 나왔다.

하. 또다시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었다.

문서윤이 지금 저를 다른 새끼들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제일 친한 친구지. 친구를 친구라고 하지 뭐라고 해.”

고작 수식어 하나를 덧붙인 문서윤이 고요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우리 서윤이는 왜 이럴 때만 사람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지.

온 신경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과 함께 몸이 이성의 제어를 엇나가기 시작했다. 문서윤을 붙들기 위해 팔을 뻗으려는 찰나 제가 선물한 향수를 꼭 쥐고 있는 손이 시야를 침범했다. 하얀 조명 아래 서서인지 유독 하얗고 가느다랗게 보였다.

“서윤아.”

거침없이 뻗어 나가려던 팔이 한순간에 제동 장치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멎었다. 우연재는 숨을 죽이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온몸을 자글자글 좀먹는 열화는 그 스스로가 삼켜 내야 했다.

애 놀라게 하면 안 되지. 또다시 혀끝을 짓씹자 미미하게 느껴지던 비린내가 날카로운 이에 고여 들었다.

“내가 너한테…….”

잠깐 말이 끊겼다.

문서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고 우연재를 응시했다. 고작 약속 하나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우연재가 낯설었다. 그러나 의문도 잠시였다.

차라리 주아 만난다고 할 걸 그랬나. 의아함 뒤로 후회가 밀려왔다. 우연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거짓말인데,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했으니 화를 내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같은 거짓말을 할 거라면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거짓말이 나았을 테다.

“질투 많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뒤이어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눈을 깜박였다.

‘나 질투 많은 거 알잖아.’

그는 우연재가 그 말을 내뱉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에도 생각을 붙잡던 과거의 파편이었다.

“너한텐 그 소리가 좆도 아니었나 보다, 그치.”

저를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느지막이 내리깔리는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거실은 밝기만 한데 창밖은 짙은 어둠이 내리깔려서인지 새까만 눈동자가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짤막하게 시선을 내린 우연재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문서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나한테 화났구나.

향수병 특유의 질감이 손바닥을 타고 가슴으로까지 기어 올라온 듯했다. 마음이 유리처럼 연약하게 얼어붙었다. 겉은 단단해 보여도 실상 나약하기 짝이 없어 조금의 압력만 가해져도 깨지고 말 테다.

그 안에 담긴 속내를 줄줄이 내보이면서.

* * *

“드디어 미쳤구나.”

소주를 마신 남태은이 신랄한 평가를 내놓았다. 빤히 예상한 반응이라 문서윤은 픽 웃으며 그를 따라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나, 소독용 알코올 맛이라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네가 본가 들어간 줄 알았지, 그 새끼 오피스텔 들어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새끼라는 지칭어에 며칠 전 그 새끼 운운하던 우연재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는 미묘한 냉전 상태였다. 평일에는 고작 오전에만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전부라 애초에 붙어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보니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어린애들도 아니고,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서늘한 표정이 아른거려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싸운 게 이런 건가. 우연재와는 싸운 기억이 없어 더 헷갈렸다.

‘저번 학기에 몇 번 부딪친 거랑은 좀 다른 느낌인데…….’

그때는 제가 일방적으로 추궁당했다면, 이번에는 제 쪽에서 우연재에게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연재에게는 잘못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다른 친구와 논다고 하면 누구냐고 묻곤 했었으니 이번에도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레 찔려 필요 이상으로 방어선을 쌓은 건 이쪽이었다. 그게 못내 미안하면서도 선뜻 말을 붙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문서윤은 사각거리는 파인애플 맛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말을 해 봤자 한심한 이유라 솔직히 털어놓기가 민망했다.

“돈 많은 집 도련님이 뭐가 모자라서 다른 데도 아니고 거길 들어가서 살아.”

“무슨 돈 많은 집 도련님이에요……. 그리고 아버지가 저 혼자 사는 건 허락 안 해 주세요.”

남태은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네. 내가 알기로 문서윤은 분명 군필인데. 내 생활관 동기가 문서윤이 아니라 문남윤이었나?”

“재미없어요.”

남태은의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다 큰, 군대까지 다녀온 아들의 자취를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는 드물 테다. 짚이는 바가 있긴 했으나 그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 들 생각은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그런데 걔랑 사는 건 허락해 주시고?”

“오래 봤다니까요.”

아버지가 우연재에게만 너그러운 이유를 시시콜콜하게 설명하기가 곤란해 문서윤은 대충 말을 뭉뚱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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